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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김해 허씨와 인천 이씨는 허왕후의 직계자손

수로왕과 허왕후⑤

 

◇허왕후와 함께 온 장유화상

 

최근 한 종중(宗中)에서 사위들도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다. 종중 재산을 아들·딸·며느리만 나눠 받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대법원에서 딸들도 종중의 구성원이 된다고 판시한 것은 2005년이다. 그 전에는 딸들도 재산 분배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사위의 분배 요구는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회에서는 딸은 물론 사위도 아들과 같은 동등한 법적 권리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종친회’에 대한 ‘정의’를 “집단적인 정체성을 가지는 ‘부계(父系)’의 친족모임”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은 허왕후를 시조모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정의와 다르다. 《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는 허왕후에 대해 “아유타국 공주인데 한 광무 건무(建武) 9년 계사(癸巳:서기 31) 7월 7일 탄강하셨는데, 열여섯 살 때인 가락 개국 7년 무신(戊申:서기 48)년 7월 7일 큰 배를 타고 석탑(石塔)을 싣고 가락국에 이르렀다…연희(延熹) 임인(壬寅:서기 162)년에 보주(普州)황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석탑을 싣고”라는 구절과 ‘보주왕태후’라는 존호이다. 같은 기록은 “태후의 동생은 보옥선인(寶玉仙人)으로서 일명 장유화상(長遊和尙)인데 금관국에 와서 지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 ‘보주태후’와 ‘장유화상’이 나온다. ‘보주태후’가 허왕후의 존호라는 것인데, 이는 조선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경상도 김해편에도 나오는 용어다. 《여지도서》는 허왕후릉이 “구지산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에 왕비는 아유타국의 왕녀인데 혹 남천축국(南天竺國) 왕녀라고도 한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이고 호는 보주태후인데, 김해읍인들이 왕릉에 제사지낼 때 함께 제사 지낸다”라고 말하고 있다.

허왕후의 존호가 보주태후라는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의 동생이라는 보옥선인, 즉 장유화상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올 때 석탑을 싣고 왔다는 내용과 태후의 동생인 장유화상이 허왕후를 따라와서 금관국에서 함께 지냈다는 내용은 우리나라 불교전래 시기와 관련되어 매우 민감한 현안이다. 화상(和尙)이 수행을 많이 한 승려에 대한 존칭이라는 점에서 이는 허왕후 때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허왕후와 수로왕이 낳은 10남 2녀

 

《김해김씨세보》는 허왕후가 10남 2녀를 낳았다면서 후손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장남은 태자이고 두 아들은 왕후를 따라서 허씨 성을 내려 받았고, 일곱 아들은 세상에서 보옥선인과 함께 두류산에 들어가 칠불암에서 신선으로 화했다고 말하는데 칠불암은 하동(河東)에 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는 10남 2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부친의 성을 따서 김씨가 되었는데, 그가 2대 거등왕이고, 둘째·셋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의 장남 거등왕의 후손들이 김해 김씨이고 둘째, 셋째 아들이 허왕후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같은 가락종친회에 속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아직도 혼인을 꺼린다.

이런 내용이 실린 족보를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족보학인 보학(譜學)을 모르면 양반 노릇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국왕도 임금 노릇하기 힘들었다. 몰락한 향반(鄕班)일수록 보학에 밝았던 것은 보학이 자신이 양반 출신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양반전》에서 쓴 것처럼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지위도 돈 주고 살 수 있었다. 소설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전비(戰備)가 부족해지자 조정에서 일종의 벼슬임명장인 〈공명첩(空名帖)〉을 팔아 전비에 충당했다. 그러나 족보를 사고 〈공명첩〉을 샀다고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다른 곳으로 이주해도 보학에 밝지 못하면 가짜 양반이라는 사실이 곧 탄로 나게 되어 있었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조선 명종 17년(1562)에 간행한 문화 류씨의 《가정보(嘉靖譜)》라고 알려졌지만 이보다 90여 년 전인 성종 7년(1476) 《안동권씨세보》가 간행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단종 2년(1454)의 남양 홍씨(南陽洪氏), 성종 7년(1476)의 전의 이씨(全義李氏), 성종 9년(1478)의 여흥 민씨(驪興閔氏), 성종 24년(1493)의 창녕 성씨(昌寧成氏) 등이 족보를 발간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외손을 족보에서 지우기 시작하다

 

 

사회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던 고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족보에 대한 연구결과는 아주 흥미롭다. 문화 류씨의 경우 앞 시기에 발간된 족보보다 뒷 시기에 발간된 족보의 권수가 더 적다는 것이다. 명종 17년(1562) 간행한 문화 류씨 족보는 10권인데, 127년 후인 조선 숙종 15년(1689)의 족보는 5권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후손들이 계속 태어났는데 족보의 권수가 어떻게 줄어들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 외손들을 족보에서 지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혼인하고 그대로 머물러 사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었는데, 이 전통이 1562년부터 1689년 사이에 크게 퇴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류부가혼은 데릴사위혼으로 불리는데 고구려의 서옥제(婿屋制)가 그것이다. 글자 그대로 ‘사위(婿)가 머무는 집(屋)’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열전은 고구려에서는 신부의 집 몸채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것이 ‘서옥’이다. 신랑은 신부의 집에서 혼인을 치른 후 서옥에서 거주하다가 아들을 낳아서 장대(長大)해지면 그제야 아내와 함께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 민족에게 이색적인 혼인풍습이 아니었다. 우리민족의 전통 혼인풍습은 여성위주였거나 최소한 남녀평등이었다. 최재석 교수는 우리나라 성씨가 원래부터 부계위주의 성씨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라 왕실의 경우 사위에게 계승된 것이 8사례, 외손에게 계승된 일이 5사례, 딸에게 계승된 일이 3사례나 되는데, 이는 사위(외손)도 아들(친손)과 같은 대접을 받았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최재석 교수는 “1562년에서 127년이 지났음에도 1689년의 족보가 오히려 10권에서 5권으로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127년 동안 증가한 친손보다도 제외된 외손이 월등하게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562년과 1689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외손이 차별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최재석, 《역경의 행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명종 17년(1562) 간행된 족보는 외손도 수록했지만 숙종 15년(1689) 간행한 족보는 외손을 삭제했기 때문에 족보의 권수가 되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인천 이씨도 허왕후의 후손들

수로왕과 허왕후의 후손들의 모임인 가락종친회에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뿐만 아니라 양천 허씨, 태인 허씨, 하양 허씨 등과 인천 이씨도 포괄하고 있다. 허왕후의 23세손인 신라의 아찬(阿飡) 허기(許奇)가 경덕왕 14년(755)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마침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했다. 당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지역인 촉으로 몽진할 때 다른 사신들은 모두 제 살길 찾기 바쁜데 허기는 현종을 따라서 촉까지 호종했다. 그래서 당 현종이 장안(長安)으로 되돌아온 후 당 황실의 성인 이씨 성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기라는 이름 앞에 이(李)를 붙인 이허기(李許奇)가 인천 이씨의 득성조(得姓祖)가 되었다. 이허기의 10세손이 이허겸(李許謙)이고, 그의 손자가 이자연인데 《고려사》 〈이자연 열전〉은 고려 문종에게 딸 셋을 시집보냈던 이자연에 대해 “그 선조는 신라의 대관(大官)이었는데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갔는데, 천자가 가상하게 여겨서 이씨 성을 하사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 최고의 명가였던 인천 이씨의 족보는 허왕후의 후손들의 계보가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 대학의 역사학과를 장악한 강단사학자들은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혼인 자체를 부인하는데, 이를 따르면 2015년을 기준으로 445만여명에 달하는 김해 김씨나 32만여명에 달하는 김해 허씨, 8만3천여 명에 달하는 ‘김씨·허씨·이씨’들은 모두 뿌리가 없게 된다.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강단사학의 허구성은 우리 역사의 실제를 조금만 살펴보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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