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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16 - 아! 애관(愛館)

 “인천의 부호 정치국씨는 예전에는 떠꺼머리 총각 엿장수였다. 그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와 성공한 재산가이다. 일본말 하는 사람이 귀하던 시절에 이에 능통한 외지인으로써 일본인과 결탁한 실업가이다.

그는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이다. 당시에는 남사당패 또는 굿중패가 흥행계의 주역이었다. 인형극 ‘박첨지’, ‘흥부놀부’, 땅재주와 줄타기, 무동타기, 승무도 있었고 ‘성주풀이’가 공연되기도 했다.”

 

고일(高逸)은 그의 저서 인천석금(仁川昔今)에서 공연장 협률사의 탄생 배경과 초창기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인천 문화계는 1895년 문을 연 협률사를 1902년 서울 정동에 들어선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신소설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이 1908년 7월 종로 새문안교회 터에 창설한 원각사보다 13년이나 빠른, 조선인이 세운 국내 최초의 공연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협률사는 1912년 축항사(築港舍), 그리고 1921년 애관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 설립된 때로부터 126년, 애관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쌓아온 지도 물경 100년이다. 고일이 묘사한대로 처음에는 놀이패 등의 각종 공연이 주로 펼쳐졌고 ‘육혈포 강도’를 비롯한 신파연극, 신극을 거쳐 무성영화, 유성영화로 이어져온 그 분야 인천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애관은 또 이렇다할 공공시설이 없었던 일제 식민시대 시민 문화운동, 학생들 청년문화운동의 요람이었고 해방 이후 연설회 등 각종 행사가 숱하게 열렸던 만인의 공간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인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까지 인천은 한 해에 1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우리영화 역사 초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배우 최불암의 부친 최철(1919~1948)은 인천 최초의 영화제작자로 꼽힌다.

 

그는 1948년 수우(愁雨)라는 영화를 만들었으나 동방극장에서의 시사회를 앞두고 갑자기 사망, 지역사회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이러한 전통 속에 인천 시내에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화관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애관, 오성, 미림, 인형, 문화(뒤에 피카디리), 동방, 키네마, 중앙, 자유, 현대, 인천, 장안... 지금은 거의 모두 사라졌지만, 그 이름이 주는 설렘과 정겨움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다.

 

영화관들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말 부터다. 인천에 복합영화상영관이 문을 열면서다. 1999년 12월18일 남동구 구월동에 ‘CGV 인천 14’가 개관했다. 큼지막한 건물 2개 층에 상영관 14개, 관람석만도 4000여 석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최신 시설과 첨단 운영시스템을 갖춘, 한곳에서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레저까지 즐길 수 있는 ‘멀티플렉스’가 이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비례해 기존 영화관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춰갔다. 기껏해야 상영관 하나에 옛날식 매점, 그리 넓지 않은 휴게공간이 전부였던 이들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관이 그 명맥을 지금까지 유지해오느라 겪었을 어려움과 쏟아부은 노력이 어떠했을 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대부분 영화관이 문을 닫던 시절 애관은 원래의 건물(현 1관)과 인접한 여관을 매입, 2~5관을 새로 만들고 안팎을 현대적 감각으로 리모델링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와 경영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들과 당당히 맞서면서 역사를 이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눈물 겨운 분투도 ‘안정적인 경영’을 담보하지 못했다. 2018년에 이어 최근 또다시 매각, 폐관설이 나돌면서 시민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가뜩이나 관객이 줄어든 터에 코로나19는 직격탄이 됐다. 가장 큰 1관은 이미 1년 전부터 운영을 중단했고, 매월 적지 않은 적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황은 2018년 당시보다 더 심각하다. 코로나19는 여전하고,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서비스(OTT)라는 새로운 강적이 무서운 속도로 영화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웬만한 멀티플렉스 상영관들도 견디지 못해 문을 닫는 것이 요즘의 사정이다.

 

애관 살리기에 또다시 시민들이 나섰다.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인천시민모임’을 중심으로 인천시가 애관의 역사와 문화를 보전하고, 원도심 주민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이자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인프라로 거듭나게 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무척 다행인 점은 인천시도 애관이 간직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알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옮겨가는 문제의 찬반 양론으로 최근 지역사회가 시끄럽다. 공공기관, 학교의 이전이나 폐쇄는 단순한 ‘사라짐’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곳을 중심으로 오랫 동안 형성된 문화와 정서, 시끌벅적함과 활기가 송두리째 그리고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이다.

 

대신 공허함과 나른함이 그 공간을 채운다. ‘대체’나 ‘재생’이 제때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적지 않이 볼 수 있다.

 

공공기관이나 학교가 이럴진대 여가생활의 중요한 축인, 더구나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간직한 우리의 심장인 문화시설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 인천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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