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대치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조사기구의 성격과 역할, 조사범위 등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특히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이 박근혜 전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군내(남로당) 프락치 총책”이라고 지칭하는 등 여야 지도부가 직접 과거사 문제에 대한 상대 당의 입장을 강한 톤으로 비난하고 나서면서 정국 경색이 심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여야는 금주초 원내수석부대표 회담을 속개해 과거사 청산 문제 등을 협의할 예정이나, 주요 쟁점에 대한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난항이 예상된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은 과거사 조사 범위, 과거사 관련 기구의 형식과 역할, 국회밖 기구 설립시 국가기구화 문제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조사 범위=여야의 입장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이다.
열린우리당은 분단상황으로 인해 일제하 친일행위자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지 못한 점에 대한 역사적인 심판, 유신과 신군부 정권하에서의 의문사 및 인권침해 등이 과거사 진상규명의 초점이 돼야 한다는 입장이며, 친북 용공 행위를 대상에 포함하자는 한나라당의 주장을 ‘정치공세’로 일축하고 있다.
우리당 ‘과거사 태스크포스’ 간사인 강창일 의원은 “친북 용공 문제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권하에서 수십년 동안 지속적으로 심판이 이뤄졌기 때문에 이를 다시 거론하자는 것은 부관참시”라며 “한나라당의 주장은 상식을 넘어선 것이며 말로는 과거사 규명을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하지 말자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강 의원은 “권력을 이용해 친북 용공 행위를 은폐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사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포함돼야 할 것”이라고 역공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친북 용공 행위에 대한 조사가 반드시 포함돼야 하며, 친일과 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등에 초점을 맞추려는 여당의 의도는 야당 지도자에 대한 흠집내기에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은 “열린우리당이 친북?용공 행위 조사와 중립적 기구 구성을 거부할 명분이 없다”고 말했고, 구상찬 부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여권의 과거사 공세는) 공동의 적을 설정, 여권 결집을 꾀하려는 ‘내부 단속용’이자, 정권 지지기반인 급진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주체세력 교체’ 시도”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민주노동당은 ▲친일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학살 ▲군사정권하에서 이뤄진 인권유린 사례 등 3가지가 조사 대상이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과거사 기구의 형식과 역할=국회밖에 포괄적인 과거사 청산을 위한 중립적인 기구를 둬야 한다는 데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당초 국회의장 산하에 학계 등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를 두고, 이 자문기구의 자문을 받아 국회내 과거사특위가 입법 및 진상규명 활동을 주도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국회내에 자문기구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우리당은 외부에 중립적인 과거사진상규명위를 두고, 국회내 과거사특위는 진상 규명에 필요한 입법을 처리하는 역할에 국한하도록 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중이다.
한나라당은 처음부터 국회밖에 중립성과 객관성이 검증된 학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고, 국회내 입법 절차는 굳이 특위를 구성하기보다 관련 상임위에서 처리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조사위의 국가기구화 = 시민단체는 국회밖 과거사진상규명위가 실질적인 조사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나 ‘의문사위원회’같은 국가기구화를 주장하고 있고, 열린우리당도 외부에 중립적 기구를 둘 경우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과거사 조사위가 국가기구화하면 자율성과 형평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의문사위가 취지는 좋았지만 잘못 운영된 것처럼 국가기관화하면 정부 여당의 입김이 작용해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우리당 강창일 의원은 “실질적인 조사 권한을 주지 않고 학자들의 연구모임 형식의 과거사 조사위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반박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은 과거사조사위가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갖되 권한과 책임은 분명하게 부여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