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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에코 정치의 긴급성”

 

- 발걸음으로 시작된 인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그의 책 《우리 인간이라는 종자(Our Kind)》에서 인간 역사의 시초에 “발걸음이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성서의 창세기 첫 문장 “태초에”를 본뜬 건데 직립보행의 인류사를 압축한 문장이다.

 

그런데 이 발걸음이 있기 위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 생물학적 진화 못지않게 기후다. 또는 기후의 변화가 진화를 촉진했다고 할 수 있다. 빙하기가 지속되는 한 인간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기온이 올라가면서 얼었던 땅이 녹고 그만큼 초목이 들어차면서 초식동물의 이동이 있게 되고 그 뒤를 따라 이들의 포식자가 움직이고 인간의 생활영토 역시 넓어지게 된다.

 

최초의 인류 발상지를 아프리카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루시’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원시 유골 발견이기도 한데 거기에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역시도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의 압박 때문이었다. 방하기를 지나 적도 지대의 온도가 급상승하면서 숲이 건조한 사바나 초원이 되자 나무 위에서 땅으로 내려와 살아야 하는 상황은 직립보행의 결정적 조건을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젖줄인 나일강 유역도 주변이 사막화되면서 이곳으로 이동한 인간의 밀집도가 높아지면서 생겨난 문명권이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의 이동은 지식, 기억, 경험, 문화, 습관 등을 모두 뇌와 몸에 새겨 집단적 체험으로 만들어간다. 이 가운데 천문지리와 관련한 지식은 필수적 생존전략의 소산이었다.

 

이동을 위한 방향설정, 기후와 토양에 대한 이해는 유목과 농경 모두에 걸쳐 핵심 지식일 수밖에 없다. 자연은 지구의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이뤄지는 기후의 자장(磁場) 안에서 활동했고 인간 또한 그 자연의 일부로 사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는 생명의 법칙으로 작동했다. 자연의 내면으로 스며드는가, 아니면 그걸 역행해서 사는가는 “순리(順理)”의 문제였다.

 

 

- 자연과 분리된 인간의 비극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자연을 자신과 분리시켰다. 자연은 인간의 도구이며 대상일 뿐 그 안에서 함께 공존하는 생명이 아니었다. 순리가 깨져나가면서 자연은 물질로 격하되고 그 물질을 장악하고 소유하는 권력을 최고의 욕망으로 삼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탐욕의 구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제국주의는 그 구조의 결정판이었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은밀한 육체적 연정을 그려낸 작품으로들 이해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주제는 산업문명의 폐허에 대한 고발이다. 코니의 남편 채털리는 참전으로 장애인이 된 인물로 광산 소유주이자 삭막한 품성을 지닌 반면, 멜 러즈는 그에 비해 하층계급인 노동자이면서도 책을 읽는 지적 인간이며 자연에 대한 지식이 깊다.

 

아니나 다를까, 채털리는 들꽃을 함부로 짓밟고 가지만 멜 러즈는 그 꽃 이름까지 알고 성애(性愛)를 통해 코니의 몸에서 생명의 꽃들이 피어나게 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그래서 자연과 분리된 몸에 자연을 돌려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다. 탄광은 산업혁명의 중추 에너지 생산기지인데 이것이 주도하는 삶에 저항한 로렌스의 문명의식이 탁월하다.

 

기후비상행동의 선두에 선 그레타 툰베리가 “우리와 자연의 관계가 파괴되었다”고 호소한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이 오래 누적되어온 결과의 비극을 짚은 발언이었다. 인간에게 “발전”은 자연을 제압하고 약탈하는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성취되는 목표였는데 그것이 도리어 인간의 종말을 재촉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제6차 멸종”에 대한 경고는 이제 드물지 않다.

 

《총, 균, 쇠》, 《문명의 붕괴》 등으로 유명한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이런 경고를 계속 내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는 인류문명의 시간이 30년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라며 최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준 주요한 가르침이 바로 모든 나라가 안전하지 않을 경우 아무리 초강대국일지라도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적인 해법을 갖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코로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지구적인 문제들이 있다. 핵무기는 어떤가? 그리고 기후변화라는 위기 요소가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점진적으로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 상황에 다다르기 훨씬 전부터 모두의 삶은 참혹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 “인류세” 아닌 “자본세”의 종말이 되어야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말로 인류문명의 지층을 설명한 지 오래이고 이런 인류세가 조만간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논지는 오늘날 지구적 화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런 경고와 따로 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인류세라는 개념도 사실 따지고 들면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종말로 치닫는 산업문명의 책임이 인류 전체에게 있기보다는 자본의 탐욕과 약탈구조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이슨 무어는 “자본세(Capitolocene)”이라는 말을 대신 사용한다. 그는 “자본세”와 “생명의 그물”을 대치시키면서 인류가 어느 가치로 이동할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생명의 그물망 속의 자본주의 (Capitalism in the Web of Life)》에서 ‘싼값의 자연(Cheap Nature)’을 확보, 약탈하는 과정이 노동의 착취이자 자본의 축적 과정이라고 직격한다.

 

이렇게 축적하는 자본의 성채를 지켜내기 위해 자본주의는 거대한 폐기물 처리를 공적 공간으로 넘기면서 인류 전체의 재앙을 가져오고 있는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가 사용한 “생명의 그물망” 개념은 우리에게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으로 잘 알려진 프리초프 카프라가 발명한 개념이다.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망”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과학이 데카르트적 2분법으로 인간과 자연을 갈라놓은 것을 새롭게 연결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런 노력이 단지 철학적, 문명사적 차원이 아니라 법과 제도로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내에서 《최후의 전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커먼즈와 생태법》으로 번역된 《The Ecology of Law》는 “자연을 사유화하는 자본의 지배”를 위한 법체계에서 “공공성을 가진 생태적 법체계로의 전환”을 일깨운다.

 

 

- 기후깡패의 나라, 에코 정치의 출현을 기대하며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현실과 비교해보자면 우리는 어떤가?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나 “기후깡패국가(Climate Villian)”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동안 다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은 탄소 배출량을 평균 8.7% 줄였지만, 한국은 오히려 24.6%나 늘렸다. 그 바람에 2019년 유엔기후변화총회가 발표한 ‘기후변화 대응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전체 61개국 가운데 58위 상태에 있다.

 

“파리기후협약”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이와는 달리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트럼트 시기 파리기후 협약 탈퇴를 반전시키면서 출범 직전에 이미 파리기후협약 복귀를 선언, 미래정치의 전환을 선언했다. 핵심은 저탄소 청정 에너지 인프라 계획으로 알려져 있고 투입되는 예산도 천문학적이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르는 2조 달러 규모의 예산을 4년 동안 투입해 일자리 100만 개를 창출하고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라고 한다. 통상 분야 공약에도 화석연료 사용으로 환경 의무를 준수하지 못하는 국가나 기업 제품에 대해 추가 관세를 물리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른바 화석연료, 화석자본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토록 긴급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에코 정치(Eco-poliitcs)”는 아직도 낯선 용어로 머물고 있다. 탈원전 하나도 치열하고 정밀한 논쟁과 정치적 결단 없이 비방의 수준인 논란만 존재하고 있으며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전반의 구조전환을 위한 미래설계와 식량정책, 교육은 무(無)에 가깝다. “탄소 배출 제로” 목표에 대한 사회적 의지를 발동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망상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건 자멸로 이르는 길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부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Down to Earth)》에서 “신기후체제의 정치(Politics in the New Climate Regime)”을 제창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급격한 난민 이동과 불평등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모델을 강구하자는 것이다. 그 핵심은 결국 지구라는 차원 전체를 포괄하는 인류적 논의구조와 정치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잘한 정치를 뛰어넘어 생명의 정치를 지향하게 된다. 실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지는 정치가 이를 외면하면 어찌 될까?

 

발걸음이 있었다, 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가 발걸음이 이젠 끊어지고 말았다, 로 마무리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에코 정치”는 이제 필수다. 모든 것을 거기에서 시작하는 정치, 그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지구는 무한한 우주에서 인간에게 지금 유일한 거처다. “창백하고 푸른 점 하나”, 칼 세이건의 경탄과 우려가 함께 담긴 이 말에서 “지구적 패러다임”이 일상이 되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린 누구나 “지구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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