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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65 - 1930년대 이후 대청도 교육기관

 1920년대 ‘대청사숙(大靑私塾)’의 숙장(塾長)과 ‘대청사립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김학선은 당시 대청도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1928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의 김동진 기자가 작성한 도서순례 백령도 방면 기사에 의하면 “문화정도가 향상된 대청도민들은 일찍이 이것을 염려한 바 있어 이 섬의 원로 격이오, 보통학교 교장이며, 운수회사 경영자인 김학선씨 등의 발기로 불문률(不文律)로 된 동규(洞規)가 있어서 도박을 엄금하며 옥외흡연을 금지합니다.

 

옥외흡연을 금지하는 까닭은 어부들이 길로 다니며 담배를 먹다가는 함부로 던지어 이전에 큰 화재가 있었음으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범하면 벌금이 일 원이오, 도민이 도박을 하면 첫 번은 주의를 시키되 두 번 이상에는 근신을 명하여 다른 사람이 그가 회개하도록 교제를 아니하는 법입니다.

 

술은 외지 선박이 많이 정박하는 배진포와 옥죽포에서만 팔게 하되, 도민은 절대로 영업을 못하게 하며, 외촌사람이라도 매음덕 행위를 할 사람에게는 허가를 아니합니다. 내동을 비롯하여 농사를 위주로 하는 촌락에는 술로 말미암아 어부들이 들어와서 풍속을 깨트릴 염려가 있다고 양주와 음주를 절대로 금지하여 경박부화 음탕의 침입을 엄중히 방지합니다. 가히 섬 중의 이상촌이외다. 완전한 자치촌 이외다”와 같다.

 

당시 김학선은 선진동 중심의 포경업 등 외국인의 출입이 빈번했던 옥죽, 선진포 일대와 조선인 중심의 전통적 촌락 공동체인 내동 일대를 구별하고, 대청도에서 미풍양속을 경계하는 마을 규약을 통해 유교적 이상촌을 만들려는 의지를 보더라도 대청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도 김학선의 영향력은 대단했었다는 것이 대청주민들의 전언이며, 아마도 이것은 3·1운동 이후 1920년대 문화통치 때 문맹퇴치를 위한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 선진동 논골(畓洞)시절 대청공립보통학교

 

김학선이 건립했던 교육기관이 동내동에서 선진동으로 옮긴 시기는 언제일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진포가 포경업이 발달함에 따라 외국인의 유입과 대청도의 경제 중심지가 내동에서 선진포로 이동하며, 한촌(寒村)에 불과했던 배진포가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1999년 인천문화원이 발간한 ‘옹진군일원 향토사료조사보고’에 의하면 지역 원로인 김정옥(金晶玉, 당시 87세)의 대청진 관련 증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 대청진 청사는 1929년 선진동 논골(답동)에다가 대청사립보통학교를 지으면서 학교사택을 지을 때 이 진청사를 헐어다가 그 재목으로 지었다고 한다.

 

대청도 청사 건물은 우리나라 방어요새지인 수군기지 건물로서 오래도록 보존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내 고장의 향토유적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사적임에도 불구하고 헐어다가 학교사택을 지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그 당시 역사와 문화재 보관에 무관심했던 것을 알 수 있고… ’라는 증언 내용으로 보아 1929년 내동에서 선진동 논골로 이전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답동이라 불리는 논골은 검은낭산 아래 편평한 대지에 종합운동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1936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동백나무 자생북한지(自生北限地)에 ‘산43 선진포학교림에 26그루’라는 표현이 있다. 선진포에 있던 공립보통학교 부근에 26그루가 자생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 당시 학교는 이미 선진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시기적으로 언급했던 내용을 뒷받침해 준다.

 

답동 시절 해방 전후 대청공립보통학교를 다녔던 ‘김○수’(90세, 선진동 거주)씨가 보관하고 있는 2장의 고문서를 소개한다. 그 이유는 당시 졸업증서의 형태 변화와 교육제도의 단면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1947년 6월 27일 당시 국민학교 6년의 전 과정을 마치며 졸업했기에 그의 국민학교 시절은 해방 이전 4년, 해방 이후 약 2년 간이다. 한 장은 졸업증서인데, 앞서 소개했던 ‘문○’의 졸업증서와 비교해 보면 4면 테두리 상부 중간에 태극기 무늬가 추가 장식됐고, 내용의 자구는 한자와 일본어 대신 한자와 한글로 작성했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당시 광복과 함께 한글과 태극기 무늬가 추가된 졸업증서를 받았던 졸업일의 뿌듯함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다른 문서는 학업성적표로 이것은 광복 이전에 다녔던 저학년 시절에 해당하는데 학교장과 擔任訓導(담임교사)가 동일인으로 학교장이 담임교사 역할을 겸했으며 이름은 ‘安田尙翊(야스다)’, 학기는 2학기가 아닌 3학기, 성적표기는 매학기별 점수가 아닌 ‘갑(甲), 을(乙), 병(丙)’의 3단계로 표현했다.

 

‘김○수’씨가 배웠던 교과와 과목은 國民科에 修身(수신), 國語(국어), 理數科(이수과)에 算數(산수)와 理科(이과), 體練科(체련과)에 體操(체조)와 武道(무도), 藝能科(예능과)에 音樂(음악), 圖畵(도화), 工作(공작)이었다.

 

4월부터 학기가 시작돼 다음해 3월까지 이뤄지며 출석일수는 233일, 출결은 결석·지각·조퇴로 3분되는데 결석은 다시 病氣(질병), 事故(사고)로 구분하며 遲刻度數(지각도수, 지각횟수), 早引度數(조인도수, 조퇴횟수)가 있다.

 

신체검사는 신장, 체중, 시력(좌·우) 등 14개 항목으로 검사하며 ‘가정으로 통신’란도 매 학기별 德育方面, 智育方面, 體育方面으로 나누어 작성했다. 방학은 7월 마지막 주부터 9월 첫째 주, 그리고 1월 3주 간 운영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당시 소규모 학교여서 교장이 담임교사 역할을 하고 1년이 3학기, 성적표기 방식 등 오늘날과 차이점이 있지만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일원으로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학생의 학교생활을 智(지), 德(덕), 體(체) 3가지로 구분해 서술했다는 점도 특이한 사실이다. 학교장은 ‘安田尙翊(야스다)’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창씨 개명한 한국인인 ‘安尙翊(안상익)’씨로 보인다.

▶ 양지동(대청7리) 대청공립보통학교

 

논골에 있던 대청공립보통학교는 1929년 동내동에서 옮겨와 40여 년 동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죽포에서 검은낭 산허리(모래고개)로 넘어오는 모래에 묻혀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학교 주변에 모래가 쌓이게 되자 이전하게 되는데, 그 시기는 1960~70년대로 추정된다.

 

시기를 아시는 분들의 제보를 기다려 볼 뿐이다. 그 후 동내동 앞 논 가운데(논앞)로 옮겼고, 다시 인가가 나오면서 원순제의 궁궐터인 현 자리로 교사를 옮겼던 것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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