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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블랙팬더의 부활, 혁명도 상술이다. 혹은 상술인가?

58. 안테벨룸 - 제라드 부시, 크리스토퍼 렌즈

 

새 영화 ‘안테벨룸’은 쉽게 정체가 드러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얘기는 곧, 쉽게 정체를 드러나게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뜻이다. 단 한 줄의 설명도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기 쉽다.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단 하나, 안테벨룸은 최근 수 년간 나온 작품 가운데 단연코 설정이 가장 뛰어나고 놀랄만한 작품이라는 점은 얘기할 수 있겠다. 영화의 전체 이야기 구조는 극 후반에 가서야 나타난다. 그게 약 72분이 걸린다. 그러므로 왜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느냐고 너무 불평하지 말고, 참고 앉아 있으시라. 곧 영화의 내용이 극장 전체를 폭발시키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극 흐름 중간중간 키워드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첫 번째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흐르는 자막이다. 이런 내용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이다. “과거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과거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는 핸드폰 소리다. 핸.드.폰.소.리. 영화를보면서 이걸 꼭 기억해 두시기들 바란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핸.드.폰.소.리. 그게 아주 결정적이다. 돌이켜 보면 남군 병사 한 명의 태도도 이상하긴 했고 그것 역시 이 영화의 장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 여성노예를 언제든지 유린하고 강간할 수 있는 이 병사는 막상 오두막에 들어 와서는 마음이 약한 척 군다. 착해 보이는 이 백인 남성에게 흑인 노예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려 한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른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하지만 내용은 이렇다. “내가 폭력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여기서 방점은 ‘굴어야 한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에 있다. 자 이게 다 무슨 얘기인가.

 

 

제목 안테벨룸은 남북 전쟁 이전의 시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1812년부터 1861년까지다. 1812년은 1700년대 후반 오랜 숙적 관계, 곧 식민 종주국과 식민지 관계였던 영-미의 오랜 전쟁 이후 실질적으로 독립을 한 미국이 다시 한 번 영국과 짧은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는 해였다. 이때의 ‘민병대=미국 군대’가 대체로 우리의 이미지에 남아 있는, 소위 남군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원래 미국의 주력 부대는 남군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1861년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발생하는 해이다. 남북 전쟁의 핵심은 노예제 폐지에 있었지만, 그런 인간주의적 이유보다는 급속한 산업화와 공업화를 이어 가던 북부 도시들의 부르주아들이 흑인 인구의 유입으로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려 했던 욕망이 근본적 원인으로 꼽힌다. 남부는 목화 재배 농장들이 주력 산업을 이루었고 당연히 이들도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의 초기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을 어떻게, 그리고 누가 더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의 문제가 남북전쟁의 기본 이슈였던 셈이다. 따라서 1861년을 전후한 시기는 흑인들에게 가장 가혹했던 역사의 시대였다. 그들은 그때 그야 말로 짐승 취급을 받았다.

 

안테벨룸의 이야기는 두 가지 축으로 벌어진다. 하나는 1861년 시대로 보이는 남부 목화농장에서의 이야기다. 이든(자넬 모네)이라 불리는 흑인 여자 노예는 여기서 잔혹한 일을 겪는다. 영화의 첫 부분은 아마도 이든이 탈출을 시도했던 모양이다(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복기해 보면 이든은 막 여기에 도착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녀는 남군 사령관에게 매질을 당하고 인두로 낙인이 찍히며 목화밭에서 다른 흑인 노예들과 함께 강제노역에 혹사당한다. 그녀는 사령관에게 정기적으로 강간을 당한다. 흑인 노예들은 서로 간 대화도 금지될 만큼 철저한 감시 체계 속에 살아간다. 여성 흑인 노예들은 이든처럼 병사들의 성 노리개들이다. 그중 줄리아(키어시 클레몬스)라는 여인은 임신까지 하게 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엘리(통가이 키리사)라는 남자 노예는 줄기차게 이든에게 몰래 접근해 언제 탈출을 감행할지를 촉구한다. 그리고 핸드폰 소리.

 

시대는 현대로 돌아온다. 베로니카 헨리(역시 자넬 모레)는 성공한 흑인 여성이다. 그녀의 성 담론, 페미니즘 이론은 각계에서 환호를 받는다. 베로니카의 이론은 꽤나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며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계급과 인종(혹은 민족), 그리고 젠더 이론이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성의 문제를 인종과 계급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녀가 행하는 강론의 주제다. 여성주의의 계급화는 자칫 사회의 핵폭탄급의 정치적 움직임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들 다수에게는 환호를 받지만 일부 극단적 남성주의자들(여기에는 여자도 포함된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로니카의 강연 투어 중에 묘령의 여자가 그녀의 뒤를 캐고, 쫓는다. 베로니카는 결국 친구 돈(가보리 시디베) 등과 함께 만찬을 즐긴 후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 소리…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오버랩 되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겹친다. 이든은 베로니카가 되고 묘령의 여자는 과거 목화 농장의 간악한 여주인 엘리자베스가 된다. 사령관 밑에서 흑인들을 관리하는 악독한 남자이자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재스퍼 대위(잭 휴스턴)는 자세히 보니 현재 시점에서 베로니카를 납치하는 범인이다. 자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는 두 시대의 얘기를 병립해서 보여 주면서 과거의 일이 여전히 현재의 상흔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 정도에 불과하다면 이 영화의 설정이 뛰어나다, 혀를 내두를 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제라드 부시, 크리스토퍼 렌즈의 상상력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 72분이 지나서야, 핸드폰 소리를 다시 한 번 듣게 되고 나서야, 우리 모두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진심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우리의 인류사가 문명화된 것,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백여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얼마나 악독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 번 목격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에게 여전히 얼마나 못되고 악한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윌리엄 포크너의 얘기대로 과거는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현재까지 계속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국가나 체제가 그럴 듯하게 위장하고 있고 미디어가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야만의 만행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야 말로 이 영화 안테벨룸의 주제다.

 

극 후반, 결말로 휘몰아치는 과정에서 이든=베로니카의 공격과 복수가 통쾌한 감흥을 준다. 이든 같아지고 싶어진다. 베로니카처럼 응전을 해주고 싶어진다. 영화 속 남군 백인들처럼,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살아가는 기득권층과 억압계층들을 향해 피지배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한번 만큼은, 단 한번이라도, 속 시원하게 보복을 하고 싶어진다. 요즘 할리우드에는 블랙팬더 당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듯이 보이며 이 영화를 비롯해 지난 3~4년간 만들어진 영화, 곧 ‘겟아웃’, ‘어스’, ‘캔디맨’ 등을 보면 그 같은 저류의 움직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들이 할리우드를 뒤엎고, 미국을 흔들고, 세상을 뒤집기를 기대해 봄직하다.

 

 

단 하나 들게 되는 의문은 영화가 한편으로는 상당히 양가적(兩價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결론은 인종, 계급, 여성 문제 해결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복수의 서사를 단순히 즐기게 함으로써, 또 즐기는 것으로만 그치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 혁명성을 순치(順治)시키는 역효과가 날 것인가라는 점이다. 영화가 어느 쪽으로 기능하게 될지 가늠하기란 쉽지가 않다.

 

예컨대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헝거 게임’은 캐피탈이라는 독재 도시에 맞서 생존게임에 나선 여자 주인공이 다른 무리들과 함께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였다. ‘헝거 게임’은 미국의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 시위(월가 점령 시위)’ 이후 나온 영화로, 혁명도 상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때문에 오히려 젊은이들의 개혁 열기를 스크린 안으로 가둬 두려는 할리우드 부르주아들의 고단수 정치 상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영화는 늘 그렇게, 이중적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 볼 것인가. 한국의 대선,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등등 혼탁한 시대에 안테벨룸은 진정, 생각할 거리를 준다. 해외에서는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다소 심할 만큼 낮은 점수를 줬다.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러닝타임을 너무 많이 써먹었다는 것이며, 장르영화로서 그건 옳지 않다는 지적이 대세였다. 짐작하겠지만 그런 평가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뒤의 30분가량이 중요한 작품이다. 그 부분을 잘 보시기들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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