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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똥 같은 세상, 똥 같은 자본주의

81. 풀타임 - 에리크 그라벨

 

영화 ‘풀타임’이 평화로운 건 오프닝 타이틀이 흐르는 딱 1분 반 동안만이다. 어둠 속에 얕은 숨소리가 들리고 ‘저게 뭘까’하는 순간, 여주인공 쥘리(로르 칼리미)의 얼굴 윤곽을 카메라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아주 느리게 따라 보여 주는 장면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순간 알람이 울린다. 해가 떠오르려면 한참이 남은, 여전히 심야인 시간에 쥘리는 간신히 눈을 뜬다. 억지로 일어난다. 잠들어 있는 딸과 아들아이를 역시 억지로 깨우고,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이웃에서 홀로 살아가는 나이 든 여자에게 데려다준다. 거기까지가 영화의 3분이다.

 

이때부터 쥘리는 줄곧 냅다 뛰기 시작한다. 파리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차는 파업으로 중간에 끊어진다. 쥘리는 발을 동동 구르다 대체 버스를 타서 일정 구간을 이동한 후에 다시 열차로 갈아타고, 내려서는 다시 뛴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5성급 호텔까지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쥘리는 호텔에서 일하는 메이드이다. 쥘리는 오늘도 지각을 할 판이다.

 

영화 ‘풀타임’은 격렬한 영화다. 88분의 상영 시간 동안 관객들은 주인공 쥘리와 함께 숨이 차오른다. 삶이 막바지까지 내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인생이 꽤 비참한 노동의 연속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비루하고 궁색하다. 이런 삶이라면 그다지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아가기 힘들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지금의 나 자신, 혹은 우리 모두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그 극사실주의가 오히려 영화를 보는 내내 절망감을 준다. 쥘리는 살아남을 것인가. 우리 또한 잘 견뎌내고 이겨낼 것인가.

 

 

쥘리는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 맘이다. 파리에서 꽤 떨어진 외곽 마을에서 거주하는데, 도시 서민 아파트에서 애를 키우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근무지를 생각하면 자주 지각하는 이유에 대한 변명이 되기는 어려워진다. 호텔 동료들도 그녀에게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오는 걸 생각해 보라는 핀잔을 할 정도다.

 

연일 이어지고 있는 강경한 철도 파업은 쥘리의 삶 전체를 흔든다. 냅다 뛰어다니는 출근길에서조차 그녀는 신용협동조합에서 대출 이자를 갚으라는 전화를 받는다. 애들 양육비와 생활비를 책임져야 할 전 남편은 이달 치를 보내지 않은 데다 전화까지 받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새로운 직장에서의 채용 면접을 코앞에 두고 있다. 거기에 가려면 현재 다니고 있는 호텔에서 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데, 그걸 바꿔 줄 동료를 찾기가 난감하다.

 

며칠 후에는 아들의 생일이기도 하다. 아들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전 남편이 보내 주는 양육비가 절실하다.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지만 그녀 역시 현금 출납기에서 카드 론을 쓰기 시작한다. 카드의 한도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녀의 직장 상사인 호텔 매니저(안 수아레즈)는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텔에서 일하려면 존재감이 없어야 해.” 쥘리도 새로 들어 온 직원에게 비슷한 얘기를 한다. “호텔 투숙객들, 특히 VIP들에게 우리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해.” 있어도 없는 존재들. 몰(沒) 개성화를 요구하는 이런 사회 시스템에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 영화는 애쓴다.

 

쥘리의 일상에서 남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남편은 전화 너머에 있거나 녹음된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남자라고는 기껏해야 파리를 오가는 카풀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 봐야 그녀에게 선택적 호의를 베푸는 호텔 벨보이거나 관계가 약간 발전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아들 니콜의 친구 아빠이자 전직 군인(시릴 구에이) 정도이다.

 

극렬한 속도로 양극화돼 가는 세습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삶은 곤궁하다. 그중에서 여성들, 하층 여성노동자들, 특히 싱글 맘들의 삶은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이들은 언제 거리에 나가 몸을 팔게 될지, 아니면 아이들과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될지, 순간순간이 위태롭기가 그지없다.

 

 

이런 ‘그녀들’의 삶에 정치와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보완적일 수 있는가. 그 보완은 또 얼마나 구체적일 수 있는가를 영화 ‘풀타임’은 일일이 열거하고, 문제점을 적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게 꽤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설득력이 강하다. 감독 에리크 그라벨이 이 영화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왜 오르종티(일종의 뉴 커런츠와 같은) 부문에서 감독상을 탔는지 이해되게 한다. 영화가 세상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시선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풀타임’의 배경은 지난 2018년의 파리 철도 파업이다. 지스카르 데스탱부터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그리고 니콜라 사르코지와 프랑수아 올랑드에 이르기까지 우파와 좌파 혹은 좌파와 우파 간 ‘코아비타시옹(좌우 동거정부)’를 거쳐 오며 힘겨우나마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폐해를 막기 위해 그 저지선의 바리케이드를 지켜 오던 프랑스가, 중도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당선된 젊은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의 급격한 우경화에 의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던 시기다.

 

파리 시민들이 모두들 노란 조끼를 입고 거리에 나섰던 것은 외형상으로는 유류세 인상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자본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자 감세에 치중했던, 미성숙한 대통령의 정책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건 국가의 재정 악화가 경제 규제에서 비롯됐다느니, 법인세나 소득세 감세로 경제의 낙수효과를 가져와야 한다느니, 국가 소유의 공기업과 기간산업, 부동산, 토지 등을 매각해서라도 재정을 늘려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정치권의 보수주의자들 입에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2018년의 마크롱 행정부가 바로 ‘그런 짓’을 저질렀으며, 그를 뽑은 민심이 한순간에 이탈한 이유이다.

 

하지만 영화 주인공 쥘리가 철도파업으로 겪는 곤란을 보고 있으면 시위가 갖는 정당성과 그에 따른 전략적 목표가 반드시 인민과 국민들의 구체적 삶에 당장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그 시간의 간극, 차이를 좁히기 위해 정치가 존재해야 하는 바, 그 또한 해결점을 찾기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이슈에 대해 감독 에리크 그라벨은 언뜻 매우 양가적 입장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론 당시 파리 시위가 다소 지나쳤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보이스 오프로 처리되는 뉴스 멘트는 몇 명이 다치고 몇 명이 사망했다, 불길이 치솟고 최루탄이 발사됐다는 식으로 시위가 갖는 폭력성을 묘사하는 등 당시의 정치 투쟁이 지녔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영화 속 캐릭터들,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파리 시민들이 시위에 대해 암묵적으로나마 거의 전적으로 지지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에리크 그라벨이 생각하는 지점은, 정치적 시위, 그것이 혁명적인 것이든 개혁의 과정 정도인 것이든, 달성해야 할 구체성이 어느 지점에 닿아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보인다. 정치 투쟁은 구체적인 슬로건을 내세워야 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매우 작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쥘리가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은 대체 교통수단이라도 있어야 일터인 호텔에 늦지 않고 출근한다는 것이다. 철도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안내를 위해 역 바깥에서 사람들과 접촉 중인 역무원에게 쥘리는 딱 한 번 화를 낸다. 대체 교통수단을 묻는 쥘리에게 그가 “그건 우리의 의무사항이 아니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쥘리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쥘리가 원하는 인생도 단순한 것이다. 아이들과 비교적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 더 나은 풀타임 잡을 구하는 것이다.

 

호텔 화장실 벽에 자신의 똥을 잔뜩 바르고 나간 손님 때문에 쥘리와 동료들은 한바탕 곤욕을 치른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 듯 메이드 간 인터콤 시스템 대화는 이런 식이다. “ㅇㅇ호실에 보비 샌즈 다녀가심.” 보비 샌즈는 IRA 대원들에 대해 정치범 대우를 해 줄 것을 요구하며 옥중 투쟁을 벌이다 단식 과정에서 사망한 북아일랜드 운동가이다. 그가 벌인 투쟁 가운데 하나가 감방 벽에 똥칠하기였다. 수석 메이드 급인 쥘리는 앞장서서 손님이 범벅을 해놓은 똥을 치우지만 그 과정에서 욕실의 고급 타일을 망가뜨렸다며 매니저에게 지적을 받는다.

 

똥 같은 세상이다. 똥 같은 자본주의이다. 영화 ‘풀타임’은 자본주의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이 왜 반(反) 자본주의에 경도되는 지를 느끼게 해 준다. 올해 개봉된 영화 가운데 사회적 리얼리즘의 테마를 서스펜스 스릴러의 느낌으로 살려 냈다. 뛰고, 달리는 쥘리의 모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정치보다 영화가, 사회와 세상을 바꾸는데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 점이 좋다. 베니스영화제 오르종티 감독상과 함께 여우주연상도 거머쥐었다. 그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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