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존엄사, 그 무한도전의 어려움에 대하여

83. 다 잘된 거야 - 프랑소와 오종

 

한때 프랑스의 악동 감독이라 불리며 불란서 영화계의 앙팡 테리블을 자처했던 프랑수와 오종 감독도 요즘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아 보인다. 그의 2021년 영화로 최근 국내 개봉된 ‘다 잘된 거야’가 안락사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루긴 다루되 이런 류의 이전 작품과는 다소 선을 긋고 간다.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이제 안락사는 ‘안락사’라는 표현보다는 ‘조력 자살’이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 것처럼 보인다. 조력 자살은 안락사하기로 결정한 죽음의 주체보다는 해당 죽음을 준비하는 주변 인물, 가족들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개념이다. 죽는 사람보다 그를 죽게 하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걸 이 영화는 거의 처음으로 웅변하고 주장한다. 그 점이 여타 작품과 다르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후반부로 가면서 서서히 가슴이 조여 오는 서스펜스(긴장감)를 느끼게 되는데, ‘과연 저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올바로 죽을 수 있는가’, ‘혹시 종종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는 것처럼 최후의 순간에 마음을 바꾸는 것은 아닌가’, ‘죽음의 절차가 저렇게 까다롭다면 조력자들이 법과 제도, 시스템에서 과연 탈출할 수 있겠는가’ 등등의 의문에 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영화 후반 내내 주인공 아버지가 제발 ‘안전하게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혹시 프랑수와 오종이 갖고 있는 은밀한 장난기가 발동해, 안락사 문제를 뒤집어 존엄사란 목표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끈질긴 의지를 강조하려는 쪽으로 결말이 맺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정말 주인공의 아버지는 잘 죽을 수 있을까. 영화를 끝까지 긴장을 갖고 쳐다보게 만든다.

 

이 영화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엠마누엘 베르네임(소피 마르소)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앙드레뒤 솔리에)로부터 이제 끝을 내달라는 부탁, 아니 요청을 받는다. 엠마뉘엘은 동생 파스칼(제랄딘 팔리아스)과 의논 끝에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한다.

 

아버지는 워낙 고집이 강하고 제멋대로였던 남자여서 그의 뜻에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엠마뉘엘과 아버지는 오랜 기간 싸우면서 정든 사이다. 그리 좋은 부녀 관계는 아니었다. 공장을 소유하고 미술품 수집가였던 아버지는 비교적 부자로 살면서 조각가인 아내(샬롯 램플링)와는 오래전에 헤어졌는데, 그건 그가 동성 연인을 이미 갖고 결혼을 했거나 아니면 결혼생활을 하면서 갖게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 마디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루거나 얻으며 살아 왔으며 자신 역시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죽는 게 그리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말이 존엄사, 존엄사하는 것이지 인간이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법과 규정이 너무 많다. 이 말은 거꾸로 얘기해서 몰래, 혹은 다 아는 비밀처럼 어겨야 할 법령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나라는 스위스 외에는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스위스도 베른에서만 가능하다. 베른에는 존엄사를 돕는 영리 단체가 몇 있는데, 만약 조력자들이 여기에 접촉해서 안락사의 여러 절차를 적극적으로 도운 흔적이 발견되면 징역 5년에 벌금만 거의 1억 가까이를 내야 한다. 죽음을 원하는 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베른에 가야 하되, 죽음에 이를 때는 관련 단체 소속인 소수의 사람만이 참관하고 가족들은 나중에 통보를 받아야 한다. 아니면 비밀리에 출입국을 해서 입회하거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의 약물 투여를 존엄사 단체 혹은 병원에 준하는 기관에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수면 유도 후 주사 같은 것이 아니라), 직접 100㎜에 해당하는 약물을 삼켜야 하고 이를 토해 내지 않기 위해 구토약까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스스로 죽는 길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또 다른 고통에서 구제하는 길이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그 모든 과정을 극영화의 방식으로 다큐처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역경의 절차를 다 거쳐서까지 과연 사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가이며,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죽음을 준비하고 조력해 낼 수 있는 가라는 점이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매우 실질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던진다. 1. 충분한 돈이 있는가(베른에서의 마지막 과정에 1만 유로, 곧 1400만 원 정도가 든다) 2. 존엄사에 대한 생각을 본인과 가족들, 가까운 사람들이 공유하고 동의했는가 3. 온갖 법적 송사에 휩싸일 각오가 돼 있는가 4. 이렇게까지 불편한 과정을 통해서라도 상대를 존엄하게 죽게 해 줄 만큼 그를 사랑하는가 등등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번째이며, 영화 ‘다 잘된 거야’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들 말로는 쉽게 위의 네 가지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생각해 왔던 모든 게 너무 경솔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죽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늘 그렇지만 차라리 사는 게 쉽다. 죽는 것, 죽어 가는 것에는 종교·사회윤리규범 등 제어 장치가 너무나 많고, 이제 그것이 족쇄로 작용하고 있음을 영화는 알 수 있게 해 준다. 과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약간의 고약한 장난기가 있었던 감독이 기성화 됐다고 해서 과거 버릇을 버리지는 않는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뇌졸중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향해 엠마뉘엘은 어릴 때 모습으로 누워 있다가 아버지가 보관한 총으로 그의 머리에 총을 쏜다. 수개월의 간호로 지친 엠마뉘엘이 꾸는 꿈이다. 아버지의 안락사를 받아들인 후 그녀의 잠재적 욕망이 꿈에 나타난 셈이기도 하다.

 

 

영화는 딱 한번 웃음을 주기도 하는데 아버지와 두 딸이 병실에서, 아버지는 침상에서 두 딸은 양쪽에 앉아, 안락사 실행 날짜를 정하는 장면이다. 둘째 딸 파스칼은 아들 연주회 때문인지 6월이 짝수 달이고 방학이어서 안 된다고 한다. 엠마뉘엘은 5월엔 영화박물관장인 남편이 없는 때여서 안 된다고 하고, 3월도 안 되는데 그건 파스칼의 생일이 있는 달이어서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그녀가 항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4월 9일로 낙착을 본다. 죽음을 결정하는 세 부녀의 협의 과정이 평화롭다. 오종 감독이 굳이 이 장면을 넣은 것은 평화와 행복은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모든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유럽 사회가 조력 자살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꺼내 든 느낌이다. 영화는 늘 사회와 세상에 어젠다를 던진다. 이 문제는 곧 이슈가 될 것이다. 죽음을 도와주는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법리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다. 언제까지 불법의 영역에 묶어 놓을 것인가.

 

최근 타계한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 역시 안락사였음에도 갑작스럽게 전달된 소식처럼 들렸던 이유는 그걸 쉬쉬하지 않았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권리가 주어지지 않지만, 곧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만, 죽음만큼은 스스로 고귀함을 누릴 수 있도록 권리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영화 ‘다 잘된 거야’의 주제이다.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