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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81. 만절필동(萬折必東), 조종암(祖宗嵒)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祖宗面)은 고려 때 조종현(朝宗縣)에서 유래하였고, 1396년(태조 5) 가평현에 편입되면서 조종면이 되었다. 조종(祖宗)이란 여러 강물이 바다로 흘러 모인다는 뜻이다. 이후 조종상면(朝宗上面)과 조종하면(朝宗下面)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 가평군 하면 7개 리로 개편되었는데 지역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2015년 12월 조종면으로 바꾸었다.
 
조종암은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명나라의 은덕을 기리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부터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 후손들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와서 명나라가 부흥하기를 기다리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기리고, 명나라 태조, 신종, 의종(毅宗)황제를 제사 지냈다.
 


숙종(肅宗) 10년(1684)에 창해처사(滄海處士) 허격(許格)이 조종(祖宗)이라는 지명을 좋아해서 군수 이제두(李齊杜)와 의사(義士) 백해명(白海明)과 함께 조종천 냇가의 바위에 의종황제가 쓴 ‘사무사(思無邪)’라는 3자를 크게 새기고, 조선 선조(宣祖)의 글씨 ‘만번 굽이쳐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니, 번방의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뜻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藩邦)’ 8자를 새겼다.

 

 

또 효종(孝宗)이 말한 ‘날은 저물고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다.’는 뜻인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至痛在心)’ 8자를 송시열이 써서 새겼다. 또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글씨를 받아서 ‘조종암(朝宗嵒)’이라고 전서(篆書)로 새겼다. 낭선군은 선조 임금의 손자로서 글씨에 능했고, 역대 왕실 자료 및 금석문자료 편찬과 서화가들의 작품을 정리하였다. 1804(순조4)년에 기실비(紀實碑)를 세웠다.

 

 
그 후에 명나라 9의사(義士)의 후손인 왕덕일(王德一), 왕덕구(王德九) 등이 제단을 조종암 동쪽 벼랑에 설치하고, ‘대통행묘(大統行廟)’ ‘구의행사(九義行祠)’라 이름하고 명나라 건국일인 1월 4일에 명나라 태조를 제사 지내고, 9의사를 1월 6일에 제사 지냈다. 대통단이라고도 한다.
 


원래 명나라 신종(神宗)황제를 제사지내려고 의논했으나 의견이 모아지지 않다가 송시열이 듣고 좋게 여기면서, "의종황제를 어찌 뺄 수 있느냐?" 하였다. 이 일이 오래도록 이루어지지 않다가 1703년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송시열의 명(命)을 받아 청주(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조종암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데서 그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나타낸 것이다.
 

 


훗날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 갈 때 면암 최익현, 화서 이항로 등 많은 의병활동가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최익현은 1900년 제향에 참여하고 조종암의 내력을 설명한 기록을 남겼다. 젊었을 때 일찍이 참배했는데, 68세 때에 눈보라와 거센 바람을 무릅쓰고 걸어서 큰 재를 넘어서 제향에 참석한 것이다. 이항로가 제왕의 유적을 봉심(奉審)하고, 그 옆 맑은 못가에 사오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바위가 있음을 보고 거기에 정자를 지으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50년이 지난 1874년, 유중교가 선생의 뜻을 실현하기로 하고, 우선 ‘견심정(見心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지어 바위에 새기게 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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