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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세상이여, 연인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107. 나의 연인에게 - 앤 조라 베라치드

 

미안한 얘기지만 새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달콤쌉싸름한 연애 얘기가 아니다. 시대가 어두운 만큼 사랑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높겠지만, 이 영화 ‘나의 연인에게’를 지난 2022년 베를린영화제가 괜히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절하고 비극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살짝 멜로영화의 고전 격인 ‘러브 스토리’(1971) 처럼 시작하는 척, 사실은 드니 빌뇌브의 역작 ‘그을린 사랑’으로 전개되다가 폴 그린 그래스가 만든 ‘플라이트93’의 결말을 향해 가되 그 시선은 친미나 반미가 아닌 중립적인 노선을 취하려 애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매우 복잡한 시선과 감정을 갖게 되는 영화이다. 무엇이 옳은가. 사랑은 옳아야 하는가. 옳지 않아도 사랑을 하면 괜찮은 것인가. 사랑은 모든 걸 다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옳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원제는 코파일럿(Copilot), 부조종사이다. 영화 속 아실리(카난 키리)는 사이드(로저 아자르)의 연인이자 자신의 마음속 부조종사이다. 사이드가 미국 어느 상공에서 조종간을 잡았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아마 그 어떤 것보다(알라 보다, 이슬람의 영광보다) 이 튀르키예 여인 아실리가 떠올랐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법이니까. 사랑하는 여인 한 명이 거대한 민족을 이기고, 그녀 한 명에 대한 육욕이 ‘위대한’ 애국심을 이기는 법이니까.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는 영화의 앞자락에 많은 부분이 노출된다. 독일에서 각각 의대와 치대를 다니고 있는 튀르키예계 여대생 아실리(부모가 독일에 이주한 상태)와 레바논 출신의 유학생 사이드가 처음 만나는 장소는 놀이동산이다. 당연히 빙글빙글 돌고 공중에 떳다 가라앉았다 하는 놀이 기구를 타기 마련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사이드는 그런 놀이기구의 스릴마저 부담스러워하던 인물이었다.

 

친구들 몇 명이 모여 게임을 하며 놀면서 사이드는 진심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부모의 뜻에 따라 독일에까지 와서 치대에 다니는 것, 그 ‘안락하고 비겁한 삶의 길’이라고 말한다. 사이드는 점점 자신이 생각하기에 의미가 있는 일, 진리에 이르는 길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아실리는 그런 그를 사랑하면서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가 종종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함부르크와 예맨을 오가는 것 역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이드는 결국 플로리다까지 가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고 조종자 자격까지 따게 된다. 사이드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실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아실리가 놓친 척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일까. 시간은 점점 2001년 9월 10일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만약 첩보 스릴러류의 상업영화였다면 온 세계 수사기관이 사이드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고, 그를 뒤쫓고, 결국 어떤 사건이 터짐으로써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로 짰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연인에게’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2001년 사이드가 일으킨 ‘사건’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대적인 복수극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거의 모든 세상 인식과 세계관을 미국 중심으로, 곧 미국을 피해자로 간주하는 시점으로 짜 맞추게 해놨지만 돌이켜 보면 모든 일은 근인과 원인,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균형이 생긴다.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하려 하게 된다.

 

‘나의 연인에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실리의 튀르키예 엄마가 왜 그렇게 사이드를 싫어하는지부터 생각해 보면 그 지름길이 찾아진다. 튀르키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후예들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아랍이나 페르시아인들과 다른 수준의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아실리의 엄마는 아실리에게 끊임없이 ‘우리는 귀한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엄마가 생각할 때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실로 엉망진창이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레바논은 1975년 이후 현재까지도 끊임없는 내전에 휩싸여 있으며 중동의 파리라 불리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폐허가 된 지 오래다. 사이드의 부모가 아들을 독일로 유학 보내려 했던 것 그리고 비교적 무색무취한 직업인 치과의사를 시키려 하는 것 등등 역시 모두 한결같이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전쟁 같은 상황의 나라에서 아들을 빼내려 했던 것인바, 이 같은 분위기는 영화 속에서 사이드를 동반하지 않은 채 아실리가 사이드의 베이루트 집을 방문했을 때 드러난다. 사이드의 대가족은 아들이자 집안의 주요한 후손이 뭔가 다른 일을 계획 중이라는 사실에 크게 불안해한다. 그리고 아실리에게 아들의 행방을 다그친다. 이제 곧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의식, 그 아우라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레바논은 세 정치종교집단이 지배 그룹을 형성하던 국가였다. 기독교계 마론파와 이슬람의 시아파 그리고 수니파가 그들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계 인구가 절대 우위였고, 따라서 지배 구조는 기독교계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슬람 수니파나 시아파 총리 식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건국 과정에서, 본래 그 땅에서 살아 가던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면서 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거 레바논 남부 쪽으로 유입되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는 레바논의 민족 성비가 바뀌게 되는 계기다. 기독교인들보다 이슬람 교도들 수가 더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파트가 이끄는 무장 투쟁기구 PLO(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 본부가 레바논에 입성하고, 반이스라엘 전선이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PLO와 이스라엘의 싸움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대리전으로, 나중에는 세 나라 및 민족이 마구 뒤섞이면서 레바논은 바야흐로 기독교와 이슬람, 범아랍주의와 소레바논주의, 우익과 좌익, 친미와 반미 등 대립으로 격화된다.

 

나라는 실로 뒤죽박죽이 돼 간다. 이런 모든 얘기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뮌헨’(2006)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뮌헨’은 요르단에서 PLO가 공격받았던 사건, 이른바 ‘검은 9월’ 사건으로 ‘검은 9월단’이 만들어지고 이 무장 극단주의 단체가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일으킨 사건이다.

 

아수라장의 레바논 내전 과정에서 기독교계 민병대(레바논 기독교계 마론파에서 만들어진 팔랑헤당의 외곽 무장단체)가 무차별적으로 회교도들을 학살했는데, 이때 이른바 버스 학살 참사가 벌어졌고(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 여기에 반격하기 위해 이슬람 극단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생겼으며, 이 모든 과정에서 대미 군사작전을 기획하게 되는 알카에다 조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 9.11 테러의 뿌리는 이 레바논 내전, PLO-이스라엘-시리아 간 싸움을 넘어 중동 분쟁에서 시작된 셈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그 혼란의 씨앗이 한 인간에게, 한 연인에게 어떠한 상처를 남기는지를 역력하게 보여준다. 그것참 매우 슬픈 일이지만 어찌 보면 상당히 자명한 일일 수도 있는 일인 지라 냉정하게 바라보면 역설적으로 사랑의 진수,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도 있겠다.

 

사랑과 이념, 종교, 정치적 투쟁은 두 가지 지점에서 공통적이다. 하나는 맹목적이라는 것이고, 하나는 20대 젊은이들의 사고체계를 자극하고 지배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이드에게 있어 이슬람을 압제에서 구하는 것과 아실리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종교를 위해서도 여자를 지켜야 하고 여자를 위해서도 종교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사이드에게 종교는 전체이고 여자는 부분인데, 전체는 부분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아실리와 사이드의 현재적 삶과 사랑이 성취될 수 없는 것은 그 둘의 책임 때문이 아니라 레바논 내전 때문이고,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욕 때문이고, 이들을 조종하는 주변 국가, 강대국들 때문이다. 곧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성세대들은 아실리와 사이드의 비극적 사랑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바로 그런 질문을 하는 작품이다.

 

사랑은 정치이자 혁명이다. 영화도 정치이자 혁명이다. 정치는 사랑과 영화이다. ‘나의 연인에게’는 사랑과 정치에 대한, 그 절묘한 균형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영화이다. 세상이여, 연인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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