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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아주 이상한 길복순

108. 길복순 - 변성현

 

영화 ‘길복순’에서 의외로 놀라고 좋았던 것은 (근데 이건 감독을 둘러싼 기이한 논쟁들, 이른바 그의 ‘일베 성향’을 둘러싼 의혹들에 비하면 이상하다고 할 정도) 가상의 킬러들 세계조차 철저한 자본주의 양극화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설정이다. 이건 꽤 괜찮은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영화는 이런 패턴의 세계관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다소 비뚤어진 지역 감정과 왜곡된 역사의식의 시한 폭탄을 숨겨놓음으로써 논란을 자초했다. 근데 그건 좀 심하게 이상한 일이다. ‘길복순’은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위험성도 지니고 있는 바, 이건 순전히 감독 리스크, 곧 변성현 리스크에 따른 것이다. 변성현은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선생이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돈된 역사의식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다.

 

변성현 리스크는 영화를 텍스트(text)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면 콘텍스트(context)로 평가할 것이냐의 해묵은 고민과 갈등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길복순’은 영화 자체만으로는 웰메이드 작품일 수 있으나 영화 바깥의 맥락으로는 평가할 가치를 스스로 상실하고 있다.

 

‘길복순’의 길복순은 킬러이고 그것도 최고 에이스의 청부살인 업자이다. 그녀는 영화 속 킬러가 흔히 ‘독고다이(독코우타이. 특공대를 뜻하는 일본어로, 조직과 상관없이 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로 일하는 것과 달리, 철저하게 조직에 속해 있으며 반드시 배정된 일만, 완벽하게 해내는 인물이다.

 

 

길복순이 소속된 회사는 MK엔터. 대표이사는 차 사장(설경구)이다. 이 회사는 세 가지의 잔혹한 규칙을 내세운다. 근데 이건 마치 아이작 아시모프의 그 유명한 ‘로봇 3원칙’을 연상케 한다. 어쨌든 세 가지 규칙은 일종의 회사 정관이기도 하다.

 

첫째는 미성년자는 죽이지 말 것. 둘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만 할 것. 그리고 셋째, 회사가 하는 작품은 반드시 ‘트라이’할 것이다. 특히 이 세 번째가 미묘한데, ‘반드시 트라이를 한다’는 말에는 시도는 했지만 실패한 사례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실패한 것에는 큰 차이가 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길복순은 바로 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실패’를 자행하게 되면서 회사와 맞서게 되고 회사 내의 수많은 경쟁자들, 곧 다른 킬러들의 표적이 된다. 그녀는 살아 남기 위해 조직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도 그녀는 15살 중학교 3학년인, 질풍노도의 딸 재영(김시아)을 정상적으로 키우려고 애쓴다.

 

근데 그게 또 다른 의미의 혈전(血戰)이다. 영화는 킬러의 세계와 한국 사회의 모습, 또 그 안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가 완벽하게 등치 관계임을 우회적으로 역설하려 한다. 그 중의(重義)의 테마 구조, 3단 혹은 4단의 중충적 서사 구조가 흥미롭다. 감독이 꽤 영리한 영화 어법을 구사할 줄 아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변성현은 영화적 레퍼런스를 이것저것에서 끌어다 댈 수 있을 만큼, 솔찮게 많은 소프트를 쌓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번 ‘길복순’의 기본 구조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2003, 2004년작 ‘킬 빌1’, ‘킬 빌2’이다. 특히 차 대표와 길복순의 관계는 ‘킬 빌’ 시리즈의 빌(데이빗 캐러딘)과 베트릭스 키도, 일명 블랙 맘바로 불리는 여성 최고 킬러(우마 써먼)의 사이를 연상시킨다.

 

 

이 둘은 한때 연인이었으며, 스승과 제자 관계였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킬러의 모든 기술을 배운다. 차 대표와 길복순의 관계도 그렇다. 그들 둘도 한때 사귀었거나 아니면 여자가 남자보다는,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했던 관계로 보인다. 그건 영화 후반부에 둘이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을 플래쉬 백으로 보여 주면서 설명된다.

 

차 대표의 현재 애인인지 아니면 진짜 오빠 여동생 관계인지 다소 헷갈리게 하는(둘의 이름은 각각 차민규와 차민희이다), 이 회사의 여성 이사(이솜)는 둘의 관계를 매번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 본다. 그녀는 결국 길복순과 일종의 ‘경영권 분쟁’을 일으키고 그건 자본주의 기업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죽고 죽이는 싸움의 모습을 띠게 된다.

 

어쨌든 ‘킬 빌’ 시리즈의 빌과 키도가 둘 사이에 어린 딸을 두고 있는 것처럼, 길복순의 딸 재영이도 어쩌면 차 대표와의 사이에서 낳은 것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풍긴다. 그러나 그 진실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길복순’의 현란한 액션은 최신의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 가져왔는데, ‘존 윅’ 시리즈를 차용한 것이 그렇다. 특히 무술 스타일이 유사하다. 한국의 합기도, 일본의 주짓수, 필리핀의 칼리아르니스 같은 근접 전투 무술들이다. 무술감독 정두홍식보다는 또 다른 액션감독인 브루스 칸식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촬영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는 얘기다.

 

조직 내 모든 킬러가 길복순을 노리게 된다는 점은 거의 완벽하게 ‘존 윅’을 따라 간다. 이런 설정은 이후 2편, 3편의 시리즈물을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길복순과 섹스까지 나눈 후배 킬러 한희성(구교환) 등 일군의 무리와 길복순이 일 대 몇으로 싸우는(실제로는 신참 킬러 영지가 돕지만) 영화 속 액션 클라이막스 장면은 회사와 맞서거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일은 실로 외롭고 처참한 길임을 보여 주기도 한다.

 

‘길복순’의 오프닝 신, 특히 온 몸에 야쿠자 문신을 하고 한강 다리에서 잠을 깨는 자이니치(在日,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 재일동포 2·3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다 신이치로, 곧 김광일(황정민)의 모습은 리들리 스콧의 1990년 영화 ‘블랙 레인’의 야쿠자 사토(마츠다 유사쿠)의 모습을 닮았다.

 

‘길복순’이 흥미로운 것은 괜찮은 뮤턴트(mutant), 곧 돌연변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짬뽕이 돼있긴 한데, 그 안에 나름 창의성이 녹여져 있다. 그래서 아주 새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낡은 작품은 아닌, 그 무엇의 수준을 성취한 상태이다. ‘길복순’이 돌파해 낸 부분이다.

 

특히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고, 심하게 앓고 있는 정치사회적 갈등 구조, 극단적 독점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문제 인식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핏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 준다.

 

 

하지만 변성현의 자기 성찰은(이 부분이 중요하다), 극단적 독점 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리는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은 극단적 독점 자본주의의 특혜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이 영화 ‘길복순’이 이룬 성취의 한계이다.

 

‘변성현 리스크’, 곧 이 영화를 둘러싼 일베 논란 역시, 감독 스스로나 프로듀서 혹은 기획자인 넷플릭스 등 그 두 가지 상충과 간극의 지점을 깨닫지 못한 세상 인식의 모자람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자가 철저한 자본주의 옹호론자일 수는 있다. 그 둘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비판과 옹호가 어떤 지점에서 다른 길로 가야 하는 지를 헷갈려 하면 안될 일이다. ‘길복순’이 아쉬운 것은 바로 그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돌연변이는 늘 매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늘 이상한 존재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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