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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외교란, 진실을 말하기보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110. 외교관 - 데보라 칸

 

다소 으쓱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외교관’은 이런 부류의 영화, 곧 전문가를 다루는 내용의 작품에 있어 미국, 할리우드가 앞서도 한참을 앞서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여기 나오는 배우들을 실제 외교 현장에 데려다 놓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캐릭터 하나 하나가 정교하며 이야기가 갖는 리얼리티가 높다.

 

이런 부류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최고 급으로 분류되는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 이후 또 한편의 탁월한 국제정치 시즌 드라마가 나온 셈이다.

 

일단 이런 저런 설정이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며, 미-러시아의 군사적 갈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급박한 중동 정세(이란과의 오랜 적대 정책)가 오버랩 되고, 아프간에서 친미국적 활동을 한 사람들을 구해 오지 못한(사실은 구하지 않은) 바이든 정부의 의도적인 외교 참사 같은 것이 여주인공의 행동 동기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잉글랜드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정치상황도 매우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동한다. 핵 전쟁에 대한 위기감, 러시아가 전술핵 정도는 별거 아니라며 언제든 쏠 수 있을 것이는 발언과 진술 등등은 기본 메뉴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의 전함(戰艦)이 정체 모를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불시의 공격으로 영국의 장병 41명이 사망한다. 영국은 이 미사일이 이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란은 온갖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을 우회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영국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건 미국 백악관도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중동 전문가이자 뛰어난 현장 요원인 케이트(케리 러셀)가 이런 상황에서 레이번 대통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신임 주런던 미국 대사로 발령받는 이유다. 상대가 이란이니 만큼 급한 불을 끄라는 얘기인 셈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자 전문 외교관인 핼(루퍼스 스웰)과 런던에 오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양 불편해 한다. 외교가(街)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런던에 오기 전 카불로 떠나기 위해 막 짐을 싸던 중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극중 내내 파티용 드레스를 입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늘 구두를 벗어서 들고 다닐 정도다.

 

무엇보다 케이트는 남편 핼과 이혼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정작 레이번 대통령은 케이트를 차기 부통령 후보로 고려 중이다. 현 여성 부통령은 남편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으로, 사임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핼은 부통령이 될지도 모를 아내 때문에 혹은 아내를 위해서 이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게 케이트의 정치생명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것인지 다소 모호하다.

 

케이트에게는 이란에게 대대적인 보복 공습을 생각하는 영국 여론을 달래는 것이 1차 과제이다. 이란이 공격했다는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일 공격의 주체, 국가 혹은 테러 집단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다. 잘못하면 자칫 엉뚱한 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게 만약 이란이라면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중동 정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국제적 악재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영국 총리 니콜이 기름을 붓는다.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는 용의주도하지(외교적이지) 못하게, 장병 유가족들 앞에서 이란이라는 국가 이름을 언급하며 피의 보복을 약속한다. 이란과의 전쟁은 일촉즉발 상황에 빠진다. 케이트는 영국의 외무 장관 데니슨(데이비드 기아시)과 교묘하게 협력하며 미영 양국의 강경 노선을 완화시키려 한다.

 

이 와중에 둘은 주런던 이란 대사로부터 테러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고, 용병 군사조직인 ‘렌코프’가 동원됐다는 기밀을 입수한다. 이때부터 상황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제는 상대가 핵 전쟁을 마다 않는 푸틴의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케이트와 데니슨 장관, 교활한 외교적 술수로 유명한 남편 핼, 케이트의 공관 차석인 스튜어트(아토 에산도흐) 그리고 그의 비밀 애인이자 공관 내 CIA 지부장인 에이드라 박(알리 안)은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 와중에도 영국 총리 니콜은 이름도 모르는 러시아 한 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가할 계획을 세운다. 총리는 스코틀랜드 보궐 선거의 결과로 분리 독립 운동이 거세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대 러시아 전쟁은 다분히 국내 정치용인 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의 미사일 테러가 정말 렌코프 조직이 일으킨 것이냐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의 동맹 외교는 중차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총 8부작의 결말은 실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국제 외교와 세계 전쟁에 있어 진짜 적은 누구인가. 어리숙한 정치인들은 외교적 언사를 마다하고 주적(主敵)을 함부로 입에 올린다. 이들이 국익,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데 있어 그 행동 폭을 스스로 좁히는 우를 범하는 이유다.

 

미국의 국무장관인 게넌(미구엘 산도발)은 영국 총리가 주선한 디너 파티에서(이날 게넌 장관은 니콜 총리가 제안한 리비아 내 렌코프 조직을 제거하는 군사 작전을 거부한다) 아랍 속담을 들먹이며 이렇게 말한다. “제일 좋은 것은 진실을 알고 그걸 말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진실을 알아도 그냥 야자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케이트는 강경 영국 총리 옆에 서려는 레이번 대통령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정치는 늘 49대 51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주인공 케이트는 한때 전설의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대사의 ‘부인’이 된 남편 핼과의 사이에서도 외교적(개인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케이트는 핼이 자신을 부통령으로 만든 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일종의 합리적 의심이다.

 

그러나 중동을 누비며 같이 활동했던 일이 케이트로 하여금 핼과의 사이를 애증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다. 핼은 그녀의 정치적 경쟁자이자 동반자이다. 마치 그건 국가적 동맹 관계와 비슷한데, 영국 총리 니콜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반면에 미국과 등을 지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고.” 레이번 대통령은 영국과의 전통적인 동맹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 ‘초등학교 10살 때 했던 약속 같은 것’이라고 경멸한다. 외교를 모르는 인간들이나 동맹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미국 드라마이지만 ‘외교관’은 지금 우리가 처한 국제 정세와 외교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국가의 정치외교 상황에도 빗댈 수 있는 보편적인 스토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누구에게나 반면교사가 되는 드라마라는 말이다. 미숙한 외교 행정으로 빈축을 사고 있는 국가들에겐 꽤 괜찮은 국제정치 교과서가 될 수도 있겠다.

 

드라마가 현실을 너무나 잘 그리면 종종 그 현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법까지도 찾아 내는 경향을 보인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우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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