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 처벌 엄중해야 한다 ¶단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지만 마약보다 술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술에 취하면 자신의 행동거지나 마음가짐이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어진다고 느끼는 그 순간 사건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단란한 일가족 4명이 음주운전에 희생됐다. 참으로 애통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1일 새벽 0시40분께 인천공항고속도로 서울 방향 영종대교 진입로 앞에서 제네시스 승용차를 몰던 A(38)씨가 앞서가던 쏘나타 승용차를 추돌했다. 뒷 차에 받친 승용차는 도로 우측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충격으로 반대쪽으로 튕겨나와 멈췄으나 불이 나는 바람에 전소됐다. 이 차에 타고 있던 B(44)씨 부부와 12살과 8살의 두 딸 등 가족 4명이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경찰조사결과 A씨는 혈중 알콜농도가 면허취소 수준인 0.101%였다. 음주운전은 자신은 물론 남의 생명을 위협하고 많은 재산피해도 가져온다. 경찰청에 따르면 매년 2만8천건이 넘는 음주교통사고로 700-800명이 숨지고 5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교통사고는 달리는 차량끼리 충돌하거나 추락하는 등 위험도가 높아서 많은 희생이
교사들이 학생 폭력을 보고도 못 본 척, 모른 척, 못 들은 척 해 폭력을 더 키운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렇게 3척을 한다는 것은 교원의 도리가 아니다. 어찌 보면 스승으로서의 존경 받지 못하고 비난 받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즈음 사건을 보면 이 3척에서 누구인들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 40대 남자 회사원이 새벽 1시경, 술 취해 귀가하던 중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중생을 보고 훈계하다 격분해 그만 뺨을 때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취중에도 학생에겐 담배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훈계한 것이다. 여중생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다정한 말로 선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가 담배 사줬어요? 여자가 담배 피면 안 되나요?” 하고 항의하듯이 말했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분 상하는 반응이 있더라도 빰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잘 가르치려고 하려다 감정이 격해져 그만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흡연 학생은 자기를 선도하려는 것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맞은 것이 억울해 이 남자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해 불구속 입건됐다. 차라리 모른 척, 못 본 척 하고
1991년 오늘 소련 러시아공화국의 첫 직선 대통령선거가 실시됐다. 개표 결과 보리스 옐친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당선됐다. 1985년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한 옐친은 급진개혁정책만이 정체된 소련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두 달 뒤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즉각 반(反)쿠데타 세력의 선봉에 서서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물리쳤다. 그 후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을 참여시켜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한다.
1950년 오늘, 한국은행이 정식 발족했다. 한국은행은 강력한 권한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중앙은행으로서 화폐발행과 통화신용정책, 은행감독업무 등을 수행하게 됐다. 일제 때에는 1909년 10월 구 한국은행이 설립됐고 1911년 8월 조선은행으로 개칭돼 8·15광복 때까지 존속했었다. 한국은행은 창립 13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전쟁비용을 조달하고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데 업무의 역점을 두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경제 재건을 위한 금융자금을 원활하게 지원하는 데 전력했다.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은행 본관건물은 전쟁으로 내부가 불타거나 파손됐다가 1956년 원상태로 복구해 현재에 이른다.
찬마루 지나 건넌방, 자다 깨도 달안개 이슥한 곳에서 나는 매일 밤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할머니 귀신이 자꾸 좇아와 뒷간도 못 가겠어 하면, 가만 아랫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 뒷간엔 허깨비가 사능 겨 니가 올려다보면 고놈은 산만 해지고 내려다보면 고만 퇴끼 똥만 해지지 아래턱에 힘주고 뒷간에 걸터앉으면 누군가 속삭였습니다. 나는 사람이 더 무셔 보면, 아래에는 내 똥, 위에는 내 그림자 언제부턴가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 이하 시집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 2012년/실천문학 어릴 적, 화장실에 관해 난무하던 온갖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귀신’으로 통칭되던 두려움의 대상들. 할머니는 배를 쓸어주며 타이른다. 뒷간에 허깨비가 산다고, 그 허깨비는 네가 생각하기에 따라 산만 해지기도 하고 토끼 똥만 해지기도 한다고. 그러나 허깨비는 뒷간이 아니라 내 속에 숨어 살았던 것. 어릴 적엔 보이지 않던 내 속의 허깨비들이 보이는 나이가 되면 ‘나는 내가 더 무셔’라고 혼자 중얼거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똥과 그림자 사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설희 시인
지난해 3월 을지대학-의정부시는 의정부 금오동 일원인 미군기지 캠프 에세이욘에 오는 2017년 경기북부 최대 규모인 1천208병상의 을지병원을 개원하고 2020년에는 입원정원 500명, 재학생 2천명을 편제로 하는 을지대 의정부캠퍼스 개교를 위해 상호협력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8일 경기도와 국방부, 의정부시는 을지대 의정부캠퍼스 및 을지대학 병원의 조기 건립을 위한 상생과 소통·협력회의를 개최했다. 을지대 건립에 따른 협력 방안을 논의함은 물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을지대학은 지난해 양해각서 체결 이후 관계 기관간 협조체계를 구축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임에도 토지매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등 반환공여구역 개발과 대학유치에 모범적인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이날 이한규 경기도 평생교육국장이 인사말을 통해서도 밝힌 바 있지만 대학과 국방부간의 땅값문제로 대학건립을 눈앞에 두고 안타깝게 포기한 이화여대 파주캠퍼스 사례가 떠오른다. 이대 파주캠퍼스 유치가 성사되지 않고 불발로 끝나자 당시 지역발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많은 지역 주민들과 경기도-의정부시가 크게 실망했다. 이 자리는 이 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
유럽연합(EU)산 위스키의 가격거품이 너무 심하다. 현재 시판되는 EU산 위스키의 소비자가격이 수입가격 보다 5배나 높다고 한다. 녹색소비자연대가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조사한 결과, 스카치위스키의 경우 수입업체는 100㎖당 평균 2천664원에 들여와 유통업체에 8천376원에 넘긴다. 유통업체는 소비자에게 1만3천501원에 판매한다. 이는 외국보다 평균 36% 비싼 가격이다. 게다가 작년 7월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로 관세가 내렸는데도 위스키 가격은 되레 0.23% 상승했다. 소비자들이 FTA 혜택은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봉’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FTA 목적은 수출을 늘려 일자리를 창출하고 물가 안정을 통해 소비자 후생를 증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 혜택은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 사회의 양극화를 막기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 관세청에 따르면 한미 FTA가 발효된 지 2개월 만에 대미 수출은 11.3% 증가했다. 대 유럽 수출도 지난해 7월부터 6개월 간 7.4% 감소했지만 관세 인하 품목의 수출은 16.1% 늘어났다. 유럽 재정위기와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 등으로 전체 수출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FTA의 수출 증대 효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에서 중국과의 수교품으로 인삼을 보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 전부터 인삼은 중요한 한약재로 쓰여 왔다. 당시 인삼은 산에서 야생하는 것을 채취했기 때문에 지금으로 말하면 산삼을 뜻한다. 원래 인삼은 음지식물로 광합성량이 매우 적어 생장속도가 매우 느리다. 깊은 산속에서 자생하는 산삼이나 산에서 키운 산양삼(장뇌삼)은 1년에 겨우 1g 정도 자란다. 지금처럼 밭에서 크는 인삼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야생삼은 큰 나무 밑에서 자라므로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풀뿌리와 치열한 양분쟁탈전을 벌여야 하며, 비바람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인삼은 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인삼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 여러 시도가 있었다. 조선 중기(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은 인삼의 재배를 장려했는데, 소백산 등지에서 산삼씨를 채취해 농가 주변에서 인위적인 재배를 유도했다. 지금의 산양삼 재배와 비슷한 재배방식이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생산량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조선 후기 영조 때(1725∼1776) 이르러 지금의 해가림 재배와 비슷한 방법이 개발돼 수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러한 해가림 재배법은 선조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