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여든여덟 살 때의 일이다. 선생은 이른 아침 <샘터>에서 일하고 있던 정채봉 씨에게 전화를 걸어 ‘정 선생, 나 지금 공항에 나왔어요.’ 하더란다. 정채봉 씨가 ‘선생님 어디 가시려고요?’ 하니, 선생은 ‘독일 좀 다녀오려고요’ 하기에 ‘아니 혼자서요?’하고 되물으며 당황해하니까 선생께서는 껄껄껄 웃으며 오늘이 만우절 아닙니까. 하시더란다. 그때서야 정채봉 씨는 만우절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고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어서 그는 가족끼리라도 장난이라도 치면서 키들키들 웃으며 살자고 했다. 팍팍한 세상 아침 시간 산길을 걷는다. 가을 산의 마지막 이별의 이미지인가. 낙엽이 빗물을 머금고 있다. ‘가을에는 소 발굽에 고인 물도 먹는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하늘이 목마른 가을의 이별 앞에 빗물로 목을 축여주는가 싶기도 했다.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에 좋은 시절… / 갈 까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다형(茶兄) 김현승 시인의 무등차(無等茶)라는 시다. 광주광역시가 고향이었던 그는 ‘씀바귀 잎에 바람이 지
‘안녕하십니까. 댁 가족은 무사하신지요?’하고 안부를 묻고 싶은 코로나 방역시대이다. 어디선가 사슴의 눈망울로 늙어갈 여자 친구의 안부도 궁금하다.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메고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수필 쓰는 작가로서 독자의 안부와 함께 서리 내리는 상강을 맞아 따뜻한 인사와 말 한마디라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어제는 후배 수필가의 수필집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풍부한 능력의 소유자이고 귀한 직장에서 관리자로 업적도 든든히 쌓은 사람이다. 그의 책 제목은 『당신 가족은 안녕하신가요』 이었다. 시집같이 예쁜 책이었다. 바로 엽서 편지를 썼다. ‘가을 낙엽 위 집 한 채 같고, 시집 같은 수필집 잘 받았소. 책이 수필가들의 영혼을 씻어주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써 보냈다. 어떤 화가는 행복한 그림은 상처를 다독여 주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그림이 보는 이의 상처를 위로한다고 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살았어. 나도 무척 힘들었어. 한이 서린 그림은 이런 독백을 끌어낸다고 한다. 이번 수필집을 받고 문학의 힘과 예술이란 의도가 이런 것 아닐까 싶었다. 정조의 치세 어록을 보면 1797년 12월 말, 광주 목사 서형수에게 보낸 비밀편지 내용과 함께 신하에게
서울의 점잖은 수필문예지에서 원고 청탁이 왔다. 전에 써 둔 수필을 다듬어 완성해놓고 청탁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작품 아래 기재하는 약력에는 ‘출생지, 등단, 약력, 수상 경력, 메일’ 등을 쓰라고 했다. 그런데 맨 끝에 ‘근황’을 두 줄 정도 짧게 쓰라는 것이었다. 원고보다 이 청탁이 더 머리 무거웠다. ‘구례에서는 물난리로 소들이 절집(山寺)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나는 코로나19로 독방에 갇혀 생명의 뿌리를 고민하며 ‘한국인의 웃음문화’를 공부하고 있다’라고 써 보냈다. 산길을 걸었다. 산은 몸살을 앓고 숲은 수척해졌다. 태풍이 지나간 길에는 바람의 흔적으로 어지러웠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고 때아닌 푸른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세상살이나 자연 생명이나 호시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 달 만에 네 번의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는 것인가. 폭우로 집이 물에 잠기니 소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 있고 절간으로 대피했다. 사람들이 실종되고 길은 끊기고… 그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그 위에 소금 뿌리듯 장마에 태풍이라니. 코로나는 사람들을 수개월 동안 두려움 속에서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그런데 지금도 ‘거리 두기와 마스크와 손 소독’에 의지하
요즘 나는 자꾸 뒤돌아보는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다. 성장과 성공만 앞세우고 수출 목표 달성 비율만을 우선순위에 둔 통치자 밑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성공은 곧 돈(경제)이 되었다. 새롭게 개발한다고, ‘새마을사업’에 목숨 걸고 새벽종을 쳐대며 마을 사람들을 깨우는 시대에 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초가집·한옥·옛 절터·궁터 들은 고속도로와 고속성장으로 인하여 실종되었다. 고속도로는 국가의 혈맥과 같다고 밀어붙일 때, 강남 땅값은 서서히 종로와 인사동 땅값을 뛰어넘었다. 이어서 부동산 투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 자리는 새로운 아파트가 죽순 솟듯 하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다. 자가용 시대가 도래 하고 2000CC 이상의 자동차와 평수 넓은 아파트에 살아야 서울과 지방의 경제귀족 라인에 설 수 있었다. 이어서 성수대교가 무너져 꽃다운 무학여고생들이 벚꽃처럼 한강으로 떠날려 가기도 했다. 옆도 안 보고 뒤도 안 돌아 보고 앞만 보고 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농어촌 사람들은 서울로 흡수되어 갔고, 서울 사람들의 하층민으로서 서러운 일만을 책임져야 했다. 이웃이 붕괴 되고 인간미가 상실되는 그곳에는 오직 속도전과 달러가 있을 뿐이었다. 고시 패스하여 고위공
웃음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었다. 마음에 평안함이 없고 불안하다 못해 한숨짓는 사람이 많다. 코로나19로 그랬고 장맛비는 물 폭탄이 되어 온 국토가 처참한 재난지역으로 변하게 했다. 가난한 농민과 산촌 사람들과 가축들이 희생을 당한 채 넋을 잃고 하늘만 쳐다보게 하였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무슨 공부를 하여 생활인으로서 건강한 삶을 되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때일수록 신뢰감 넘치고 듬직한 국가적 지도자가 그립다. 거기에 더 보탠다면 유머 감각도 있고 낭만적이라면 비단옷에 금무늬가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처칠 수상의 현직 시절 이야기다. 그가 몇 개국 수뇌들과 회담 중 살짝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는데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들어와 갑자기 두 사람이 대면하게 되었다. 그 순간 처칠은 루스벨트를 향해 ‘대통령 각하 우리 대영제국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각하에게 보여드리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하여 두 정상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유머는 재치요 순발력이요 센스다. 인문학적 소양의 꽃이요 우리만의 풍류이다. 이럴 때일수록 “못생겨서 미안하다”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 씨나 “요즘 왜 안 웃기느냐?”고 물어오는 국회의원
8월은 계절의 심장 같은 달이다. 민족의 역사적 의미 또한 그렇다. 여름을 거치지 않고 뜨거운 햇볕 속에서 영글지 못한 곡식이나 과일은 단물이 고이지 않는다. 가을이 되어도 숙과가 될 수 없다. 태양 아래의 뭇 생명은 용광로 같은 계절의 불볕 속에서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을 기를 수 있도록 창조주께서 마음 써 둔 것 같다. 한 가족 삶의 이력도 그렇고 나라의 역사적 궤적도 그런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다. 나는 결코 부유한 가정에서 환영받고 태어난 사람 아니다. 학교생활을 거의 자취하면서 약한 몸으로 보대껴야 했다. 그때 누군가가 네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아이들과 노래하며 살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무렵 나는 문학을 만났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을 눈 뜨게 하려고 창조주께서는 고난의 길을 걷게 하며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가발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어떤 면에서는 조숙하다 못해 애늙은이 같은 면도 있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세상의 하늘을 볼 수 있었고 고난의 강을 건너는 동안 또 다른 생명의 초지를 발견했다. 책을 깊이 있게 읽고 글을 정직하게 쓰면서 슬픔을 슬퍼하는 법을 배웠
요즈음 어디를 가나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과 함께 낙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많은 사람이 마음 붙일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방송도 그 소식에 그 소리다. 1980년대 중반에는 ‘땡전뉴스’ 라는 말이 돌았다. 뉴스 시간만 되면 ‘땡’하고 전00 대통령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땡코 뉴스’라고 할 만큼 코로나에 대한 소식이 톱뉴스가 되었다. 그리고 귀 막고 눈 가리고 싶은 사건뿐이다. 체육계에서는 마음에 안 든다고 선수를 두들겨 패는 것이 관행이 되어 자살하는 선수가 있고, 지역 최고위직 공무원들이 여비서와의 성추행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들이 뒤를 잇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자식을 가방 속에서 질식사 하게 해놓고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부모도 있다. 세상 중심에는 자본 제일주의로서 돈이 신(神)의 자리에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과 출세만을 좆아 가는가 싶어 살맛이 시들어간다. 얼마 전에는 ‘햄버거병’이라고 하여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 신경이 피로해져 있는데 출혈성 대장균 감염증 환자가 어린이집에서 발생하면서 먹거리 공포 심리로 이중고를 겪었다. 햄버거병은 미국에서 처음 보고된 병으로 오염된 고기가
국제적인 시간과 세상의 표정은 어둡다. 망명정부 비밀 결사대같이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장갑을 낀 데다 선글라스까지 걸쳤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못한 사람은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없고 불법체류자 같이 어설프고 불안하다. 풀씨엔 막힌 통로가 없다. 곳곳의 들풀과 하나의 자연이 되기 위해 날아간다. 코로나19의 위험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풀씨를 보면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수필가 박연구 씨는 ‘바보네 가게’ 저자이다. 1973년 ‘범우사’에서 나온 그의 책 표지를 보면 화가 이중섭이 스케치한 ‘바닷게가 어린이 고추를 물고 있는’ 그림이 있다. 박연구 씨는 그가 범우사에서 주간을 맡고 있을 때 나와 두어 번 만났다. 그런 그가 ‘속담에세이’ 에서 ‘부자유친’의 글을 내비쳤다. “막내인 아들이 자기 닮아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게으름이 있다. 그래서 일요일만이라도 같이 등산을 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어느 날 아침 아들과 마을 뒷산을 오르면서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 못 보았다’고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말했다. 그런데 아들은 ‘나는 보았어요. 아빠가 있잖아요’라고 말하더라는 내용이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숲속 통나무의자에 앉았다. 편백나무 사이로 비껴드는 아침햇살이 금빛 비단 폭 같다. 날마다 보아도 늘 신비롭다. 숲속 아침 시간은 고요히 맑게 밝아온다. 내 문학의 뿌리 의식일까. 고인이 된 박완서 선생의 「트럭 아저씨」라는 수필이 떠오른다. 거기에 작가에 대한 답이 있어서일 것이다. 박완서 선생이 서울을 떠나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때의 일이다. 매일 두 번씩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오는 채소 장수 아저씨가 있었다. 멀리서 그 아저씨가 트럭에 싣고 오는 온갖 채소 이름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선생은 뭐라도 좀 팔아줘야 할 것 같아 마음보다 먼저 엉덩이가 들썩였다고 한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채소 장수 아저씨는 손이 컸다. 그 때문에 선생은 “이렇게 싸요?” 하면, 물건을 사면서 싸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듯 웃는다고 했다. 그렇게 정이 든 아저씨는 평일에는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동안 트럭 아저씨는 박완서 선생을 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나서 새삼스럽게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란다. 순박한 감정에 곧이곧대로 나타낸 존경과 애정을 거부할 수 없어 선생께서는 “내 책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으니, 책을
세상은 온통 바이러스 질병으로 숨이 막히고 보행의 자유마저 제한되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손자들 학교 가는 발걸음마저 불안하다. 그런데 6월의 캘린더마저 붉은빛이다. 1일의 ‘의병의 날’로 시작해 6일은 ‘현충일’ 10일은 ‘6·10 민주항쟁기념일’과 뒤를 이은 25일의 ‘6·25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다. 캘린더 곳곳에서 한국인의 가슴 속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 조상들은 5천 년 역사를 통해 크고 작은 외침을 천여 번 아니 정확히 931번을 당했다. 5년에 한 번꼴로 침입자들과 싸우며 죽어갔다. 성폭행은 물론 형제와 찢어져 사는 아픔을 겪으면서 굶주림에 허덕였다. 어찌 피난 갈 준비에 바쁘지 않았겠는가. ‘빨리빨리’의 정신적 습관의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마침내는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진왜란(1592) 때는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쳤고, 병자호란(1636)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내뺐다.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 각하라는 자는 서울 사람들과 국민들 몰래 자기 혼자 한강을 건너 남으로 줄행랑을 쳤다. 자기 목숨 귀한 줄만 알았던 임금과 대통령의 뻔뻔함을 탓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