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월 1일자로 국제포경위원회(IWC, 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가 상업적 포경을 전면 금지하면서 그동안 ‘로또’라 여겨졌던 울산 장생포의 고래잡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장생포. 고래는 사라졌지만 고래문화는 남았고, 이 문화의 전승을 위해 고래 문화마을이 조성돼 고래잡이 어촌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한때 지나가던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장생포의 고래잡이산업은 해방 후 1970년대가 전성기였다. 고래를 잡으면 배 옆구리에 찼으며, 항구에 들어올 때는 뱃고동을 울렸다. 배마다 뱃고동 소리의 차이가 있었기에 부인들은 남편의 귀항 여부를 판단했고, 마을 주민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나와 구경했으니 동네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배가 입항하면 고래는 곧바로 해체장으로 이동했다. 장생포 고래잡이의 일부 내용이다. 그렇다면 대청도의 풍경은 어땠을까? ▶ 대청도 고래잡이의 풍경 대청도 고래잡이의 중심지, 선진동에 거주하는 김○수(90)씨의 전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고래잡이에 나가 포획에 성공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고래를 잡으면 선박의 좌‧우현에 한 마리씩 묶어서 입항하는데
백령도 북쪽 마을, 관창동. 과거 관청에서 세웠던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행정구역상 백령면 진촌4리이며, 북한과 가장 인접한 마을이다. 필자는 인근 지역에 살며 평소 괭이갈매기에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자료와 미디어 매체를 통해 학습한 갈매기 생태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한다. 매년 4월 중순에서 4월 말, 겨우내 사라졌던 괭이갈매기가 한두 마리씩 모여들며 만입(灣入)된 안락한 해안 지형을 택해 무리를 이뤄 장관을 연출한다. 끊임없이 울어대는 소음공해 수준의 울음소리와 함께 새들은 그들만의 의식으로 몇 시간에 걸쳐 관창동 일대를 순회하며 도착 비행을 한다. 주민들은 갈매기로 인한 농작물 피해 때문에 반기기는커녕 걱정이 앞선다. 심지어 관창동 마을에는 이들을 쫒기 위해 솟대를 줄지어 세워 놓거나 철책 안으로 갈매기 사체를 걸어 놓은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괭이갈매기! 수명은 최대 30년 정도, 그들은 도착 비행 의식을 통해 옛 둥지에 찾아간다. 최대 10년 간 같은 집을 사용하는 예도 있다. 괭이갈매기에게 둥지의 높이와 위치는 매우 중요하며, 둥지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하기도 한다. 고양의 울음소리를 닮았다고 이름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