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이 대흥행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 정해인은 짧은 배역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해인이 연기한 특전사 소령 오진호의 실제 인물은 김오랑 소령이다. 경남 김해 출신인 김오랑 소령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를 한 해 늦게 졸업했지만, 김해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수재들이 모이던 부산대 공대에 합격하고도 학비가 없어 들어가지 못했다. 학비가 무료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수색대 소대장으로 근무한 그는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 후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시작으로 특전사령부 작전장교와 정보장교를 지냈다. 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제5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거쳐 1979년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79년 12월 13일 00시15분, 전두환을 수괴로 한 반란군에 가담한 제3공수특전여단 최세창 준장 일당이 급습한 특수전사령관실을 끝까지 지킨 군인이 김오랑 소령이었다. 정병주 특전사사령관을 지키던 다른 장교들은 반란군의 회유와 협박에 모두 넘어갔지만 김오랑 소령은 반란 가담을 거부하고 자신의 사령관을 사수했다. 가진 무기라고는 권총 1정에 불과했던 그는
지난 주에 만주 항일무장투쟁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헌신은 무한했으나 바란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던 '범도'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가는 여정의 마지막은 대련이었다. 나는 대련에서 잠을 설쳤다. 잠자리가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대련의과대학 드넓은 교정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정결하고 쾌적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거친 바람과 해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때문만도 아니었다. 대련에서 최후를 마친 세 거인의 생애가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여장을 푼 대련의과대학의 지척에 있는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참모중장이 교수형 당한 것이 1910년 3월 26일, 겨울이었다. 나는 소설 '범도'에서 다시 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안중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홍범도 장군을 쓰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시리고 먹먹했다. 이회영 선생이 최후를 마친 곳도 대련이었다. 상해에 머물던 그는 다시 만주로 돌아가 무장투쟁을 재개하기 위해 대련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밀정들이 이회영의 이동 경로를 일본 영사관에 알렸고, 체포된 이회영은 처참한 고문을 당한 끝에 나흘 만에 옥사했다. 1932년 11월 17일이었다. 그를 밀고한 밀정은 이회영의 조카 이규서와 연충렬이었다. 이규서는 이회영 형
소설가가 자신이 쓴 소설 밖의 이야기로 질문을 받는 일은 드물다. 나는 평생 받고도 남을 그 드문 질문을 지난 며칠 내내 받았다. 내가 쓴 소설 ‘범도’의 바깥에서 벌어진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에 대해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나는 누가 왜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영웅들의 흉상을 철거하려 드는지는 잘 모르지만 철거의 대상이 된 그들이 누구인지는 조금 안다. 줄이고 줄여서 6백 페이지가 넘는 책 두 권으로 펴낸 소설 ‘범도’에 담긴 홍범도와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이회영 선생의 이야기를 몇 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한 문장씩으로 대답했다. -홍범도? -항일무장투쟁 전선에서 가장 오래 싸우고 가장 크게 이겼으면서도 무엇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도 않은 채 극장 수위로 최후를 마친 조선 최고의 포수가 홍범도입니다. 홍범도가 최초의 동지 김수협과 함께 단발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한 것이 1895년 9월 19일이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1908년 일본군 천지가 된 조선을 떠나 압록강을 넘어갈 때까지 그는 가장 오래 싸우고 가장 많이 이긴 포수부대의 대장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범도'를 탈고한 다음 나는 대한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했다. 역사를 바꾼 것은 세상을 바꾸려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이고, 그 꿈을 위해 행동했던 사람들이 만든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사실을 ‘범도’를 쓰면서 더욱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자취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료를 찾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인물 한 명을 발견했다. 한국광복군 공작원 장이호다. 장이호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신이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간 해가 1936년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이었다. 조선 동포들이 많은 서주에 정착한 그는 평양냉면을 파는 ‘통일면옥’을 열었다. 성실하고 재간이 좋은 그의 냉면집은 장사가 잘되었다. 비밀활동을 하는 ‘전지공작대’와 ‘청년공작대’ 대원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통일면옥’은 독립운동의 비밀아지트가 되었고, ‘통일면옥’의 수익금은 독립자금으로 넘어갔다. 어느새 공작원이 된 장이호가 아예 정식으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대원으로 입대한 것은 1944년이었다. 1944년은 일제가 연합국의 공세에 맞서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양정의숙 경제과를 졸업한 안희재는 연해주의 중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연해주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로 붐볐다. 근대 조선에서 드물게 경제학을 공부한 안희재의 눈에 들어온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정난이었다. 독립을 주창하며 사자후를 뿜어내는 지사들이 들끓고 독립군에 지원하는 열혈청년들이 넘쳐났지만 그들의 활동과 무장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안정적으로 독립투쟁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안희재는 가장 빛이 나지 않는 그 일을 자신이 맡기로 했다. 고향 의령으로 돌아온 안희재는 제지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이 잘 되었지만 그 정도의 수입으로는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독립자금을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경상도의 거부였던 아버지 안발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2000마지기(40만 평)을 팔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는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기업인 동시에 국내외를 연결하는 독립운동 거점이었다. 안희재가 국내에서 선구적으로 백산상회를 근대적 형태의 합자회사로 전환한 것은 1917년이었다. 그는 경상도의
역사가 잊은 사람 중에 신동 이갑이 있다. 1877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난 이갑은 겨우 열두 살에 진사시험에 급제했다. 나이를 세 살 올려서 응시한 결과였다. 집안과 이웃들에게 크나큰 경사였다. 그러나 이 경사가 멸문의 화를 불러왔다. 당시 평안감사 민영준은 이갑이 나이를 속여 진사시험에 응시했다는 이유로 이갑의 아버지를 끌고 가 갖은 고문을 했다. 극에 달한 민비 일족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은 이갑 집안의 농토 40정과 재산을 빼앗았다. 고문후유증과 화병에 시달리던 이갑의 아버지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며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이갑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898년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육사 15기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동기생들은 대부분 19세 전후였는데, 그는 26세였다. 그럼에도 그는 휴식시간에도 총검술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육사 15기 동기생 중에는 한국인도 7명이 더 있었다. 한국인 동기들은 이갑을 중심으로 뭉쳤고, 스스로 ‘8형제배’라고 부르며 결속을 다졌다.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모총장과 군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우리의 지난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맞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당대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한때 나라를 빼앗겼다. 중요한 것은 빼앗긴 나라를 어떻게 되찾고 다시 세웠느냐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기울인 노력은 정녕 부끄러운 것이었을까. 아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었는가는 이석영 일가의 선택과 결단 하나만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1855년 이조판서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종숙 이유승의 양아들이 되었다. 서른 살에 과거에 급제해 고종을 보좌하는 승지로 관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라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났다. 고종이 중추원 의관에 임명했지만 그는 남양주로 낙향해 돌아가지 않았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간판마저 떼어내자 이석영의 6형제는 만주로 가 항일운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석영의 동생 이회영이 먼저 서간도로 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이석영은 양주 일대의 만 석 재산과 토지를 모두 처분했다. 이석영이 양아버지 이유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조 단위에 해
2022년 11월 30일은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이날 공개된 인공지능 채팅로봇인 쳇지피티는 바로 인간의 일상과 인간관계,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게임체인저로 등극했다. 출시된 지 단 두 달 만에 쳇지피티의 월 사용자수 1억을 돌파했다. 쳇지피티가 가장 먼저 판을 뒤흔들어놓고 있는 분야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역으로 여겼던 예술분야다. 화가와 음악가들은 경악하고 있다. 이미 AI가 그린 그림이 미국의 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쳇지피티를 개발한 오픈AI가 내놓은 ‘달리2’와 미드저니AI연구소가 내놓은 ‘미드저니’에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를 고흐 화풍으로 그려줘’라고 요구하면 30초만에 그려준다. 음악AI에 ‘연인을 잃은 사람을 위한 슬픈 발라드풍 노래를 만들어 줘’라고 요구하면 그럴듯한 가사까지 붙인 노래를 작곡해준다. 당혹스럽기는 언어를 다루는 문예창작학과의 강의실도 다르지 않다. 학생들은 쳇지피티라는 이 낯선 경쟁자가 어디까지 자신의 미래를 위협하게 될지 짐작하지 못한다. 교수들은 당장 학생들이 제출한 작품의 어디서 얼마까지를 쳇지피티가 써준 것인지 알기 어렵다. 문학이 직면한 당혹스러움은 쳇지피티가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한 혁명가가 있다.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농림학교를 졸업한 전일은 일찍이 북간도로 넘어가 광복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다음 연해주로 건너간 전일은 일본군과 반혁명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극동소비에트 정부를 지키기 위한 적군의 하바롭스크 방어전에 참전했다.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자이자 여성혁명가였던 김 알렉산드라가 외무장관으로 있던 극동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 시베리아주둔 일본군의 철퇴와 병사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유인물 5만 부를 배포하려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전일의 재판을 맡은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본업은 조선독립운동이올시다.” 그렇다면 왜 사회주의운동을 하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을 받은 전일의 대답은 간단했다. “독립운동은 조선을 위함이고, 사회주의는 세계를 위함이오.” 거침없는 그의 기세에 밀린 검사가 ‘피고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라고 질책하자 전일은 주저 없이 응수했다. “나의 몸은 일본 법률로 제재할 수 있겠으나 일본의 법으로 내 정신을 제재할
세상에는 비싸고 희귀한 명품이 많다. 인터넷에서 명품 카메라를 치면 최상위 검색어는 한결같이 라이카다. 세계 최초로 소형카메라를 개발한 라이카의 100년 역사가 곧 사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라이카의 명성을 뒷받침해온 것은 감각적인 디자인과 혁신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구한 역사와 기능만으로 라이카의 명성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첨단기술을 장착한 일본산 카메라가 세계시장을 휩쓸면서 위기에 직면했던 라이카가 선택한 길은 카메라의 기본가치였다. 누가 셔터를 눌러도 비슷한 결과를 찍어주는 작동성이 아니라 찍는 사람의 조작성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카메라를 그들은 추구했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2005년 라이카는 대한민국의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라이카 대한국인 바디>라는 60대 한정판 카메라를 생산했다. 안중근 참모중장의 인장과 친필유묵 ‘대한국인’이 음각된 이 카메라에는 '60th Jubilee Independence 1945-2005 R.O.K'라고 각인되어 있다. 라이카는 장인들이 일일이 손으로 만든 이 60대의 카메라에 일련번호를 새겼고, 1번 카메라를 민주주의자 김근태에게 증정했다. 라이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