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폭력적인 것이 가장 순수한 것이다. 불온한 상상력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의 기제(機制)가 된다. 김미례 감독의 숨겨진 노작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자명(自明)한 척 도리어 모든 진실이 묻혀져 가는 시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작품이다. 특히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한국인 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 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 현실에서 사람들의 손에, 또 그들의 머리에 무엇이 실리고, 무엇이 담겨져야 하는 가를 지목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라기보다는 고요한 포효(咆哮)이다. 거친 진술의 기록이다. 깊이 파묻혀 있던 한 시대의 분노를 발굴하는 고고학이다. 그리고 그 유물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직시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이다.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년과 75년 일본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과격 테러리스트들의 얘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선’은 이른바 정치조직이나 군사조직이 아니다. 이념이다. 이념적으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오염됐던 반정부 조직, 적군파와 달리 순수 ‘도시 게릴라’를 자처한 테러’범’들의 ‘생각=선언=주의=연대’를 지칭한다. 이들은 늑대 부대, 대지의 엄니 부대, 전갈 부대라는 소조(小組)의 이름으로 미쯔비시
오멸(吳滅. 본명 오경현) 감독이 영국産 오프로드 차 광고에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감독이 이 차를 타고 다닌다는 걸 앞세운다. 오멸이 짚차를 타고 제주 해변을 다니며 우리에게 전하려는 얘기는 무엇일까.가 광고의 컨셉이다. 그건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실제로 놀랐던 것은 광고의 앞 부분이 영화 ‘지슬’의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슬’은 제주 4.3 항쟁을 다룬 극영화이다. 광고는 한 아이가 동네 어른들이 피신해 있는 서귀포의 큰넓궤로 달려가 동굴 입구를 들여다 보는 장면을 보여 준다. 4·3이 광고에 나오다니. 그렇다면 4·3조차 상업화된 걸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4·3의 문제가 이제 그만큼 대중적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반공 정권이 수십년간 좌익의 준동이니 좌파들의 난동이니 하며 온갖 흑색선전을 뿌려댔어도, 심지어 공적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술하려 했어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이제 광고에까지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멸감독 역시 그런 시대적 흐름을 간파했을 것이다. 광고 출연료도 짭짤했을 것이다. 그 돈은 그가 또 다른 독립영화를 만들
크루엘라는 원래 빌런(villain), 곧 악당이다. 적어도 1996년에 나온 글렌 클로스 주연의 영화 ‘101 달마시안’에서는 그랬다. 도디 스미스가 쓴 동명 원작소설에서는 더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영화 ‘크루엘라’는 크루엘라가 크루엘라가 되기 전, 에스텔라 시절부터의 얘기다. 그러니까 착했을 때 얘기라는 것이다. ‘크루엘라’는 또 한편의 스핀오프(spin-off), 원작의 등장인물 한 명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꾸민 영화이다. 사람들은 선한 자 혹은 그들의 미담(美談)에는 그리 관심이 많지 않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여기서 상대적이란, 악당을 두고 하는 얘기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악당 이야기에 매료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배트맨 시리즈를 두고도 사람들은 조커 캐릭터가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악은 어디에서 오는지, 악의 평범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등등 보다 철학적인 접경을 오고 간다. 그래서 아예 ‘조커’라는 영화까지 나왔다. 영화 ‘크루엘라’도 같은 맥락이다. 도대체 이 여자, 에스텔라가 왜 미친 악녀가 됐냐는 것이다. 그 악에는 꼭 악만이 있는 것이냐, 혹은 선한 구석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선한
극장가에서 거의 사라진 (극장에서 안 보면 결코 VOD 등을 통해서는 자발적으로 보지 않을)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실로 참혹해서 영화를 보고 있기가 심란하고 불편해진다. 영화는 1995년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학살극을 다룬다. 스레브레니차는 당시 세르비아가 강제로 세운 자신들의 자치 지역이었다. 이곳의 대다수 주민을 차지했던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외곽의 UN 안전지대로 피신하지만 곧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분산 수용되는 척, 남자들은 모조리 집단 총살당한다. 잠재적 군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주인공 아이다(야스나 두리치치)는 영화 내내 뛰어다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르비아 군이 UN 안전지대까지 들어왔고 곧 아들 둘과 남편을 잡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UN 통역관으로 일한다. 그녀는 UN군에게 통사정을 해 자신의 가족이 끌려가지 않게 하려 한다. 그러나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네덜란드 UN군은 아이다의 가족뿐 아니라 사람들을 구해내지도 못한다. 아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스레브레니차에서는 단 며칠 동안 8000명이 살해됐다. 1992년에 시작돼 1995
극장가에 조용히 걸려 있는 ‘스파이럴’은 B급 공포 액션이다. 한때 젊은 층을 열광시켰던 ‘쏘우’ 시리즈의 스핀오프(spin-off),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스파이럴’의 주인공은 연쇄살인범인 직 쏘가 아니라 직 쏘의 모방범을 쫒는 형사 지크(크리스 록)이다. 경찰들이 한 명 한 명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쏘우’ 시리즈의 사람을 죽이는 방식, 그 살인의 표현 수위는 ‘일가(一家)’를 이룬다.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는데 오히려 상상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상상이 지나치면 현실감각을 떨어뜨린다. 일종의 소격효과(疏隔效果)를 불러일으켜 ‘이건 영화니까 가능한 거야’, ‘난 지금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인 거야’라는 현실감을 반대로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영화 ‘쏘우’ 시리즈는 유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 영화가 심의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불쾌감이나 거부감보다는 영화적 쾌감이 극대화된 것이라는 판단이 앞선다. ‘재밌잖아!’ 뭐 그런 식이었다. 아무튼 경찰들이 한 명 한 명 죽는다. 몸통이 날아가고, 사지가 찢기고, 불에 ‘홀라당’ 타고, 온몸에 유리가 박혀 죽어 나가는 동안 경찰서에서는 한 명의 형사에게만 편지가 날아든다. 살인을 예고하는
지난 목요일 새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 국내 극장가에서 ‘그나마’ 가장 눈길이 갔던 작품은 선댄스영화제 발(發) 화제작이었던 흑인 공포영화 ‘배드 헤어’이다. 이 영화, 이상함과 황당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설정 하나 만큼은 ‘죽인다’. 머리카락이 흡혈 귀신에 씌여서 사람들을 홀리거나 해치는 얘기다. 그런데 이 머리카락이라고 하는 것, 꽤나 상징하는 바가 재미있다. 제목 ‘배드 헤어’의 배드 헤어는 그야말로 질이 안 좋고 볼품이 없는 머리카락을 말한다. 흑인들이 천부적으로 타고날 수밖에 없는 일명 ‘뽀글이’ 헤어다. 흑인들은 늘 이런 헤어 스타일이 콤플렉스인데, 자신들의 외모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백인 주류사회에서 차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양한 ‘가짜 머리카락’들, 헤어 스타일들이 개발돼 왔는데 크림으로 그때그때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머리를 펴거나 형형색색의 가발은 물론이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싫으면 차라리 아예 머리를 박박 미는 흑인남녀들도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으뜸은 붙임 머리다. 머리를 가느다란 새끼로 바짝 당겨 묶고 그 매듭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인조 머리를 꿰매 붙이는 방식이다. 영화 ‘배드 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 ‘더 스파이’는 괜찮은 영화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도 있는 영화다. 잘 만든 것 같지 않지만 또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 인간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닌 느낌을 주기도 한다. ‘더 스파이’는 1962년 미-쿠바 미사일 위기,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 미소 냉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때 세계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다. 모든 역사를 미국 중심으로, 서구 중심으로 배워 온 우리로서는 미소 냉전과 이에 따른 쿠바 미사일 위기를 오로지 당시의 소련 탓, 혹은 막 혁명에 성공해 사회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쿠바 카스트로 정권 탓으로 돌렸다. 미-쿠바 미사일 사태는 소련이 쿠바 연안에 핵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핵전쟁의 위기를 말한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 극적인 타협으로 핵 위기를 벗어나고 오히려 데탕트의 분위기를 맞았지만 이 과정에 불만을 품은 양측 강경파에 의해 케네디는 암살되고 흐루시초프는 사망 후 생전의 흔적이 지워진다. 당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선행된 이유가 존재했지만 그 부분은 늘 역사에서 가려져 있다. 할리우드
지난 26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만큼 각축을 벌인 부문도 없었다. ‘맹크’의 게리 올드만에게 주자니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가 걸리고 홉킨스에게 주자니 그러면 또 지난해 대장암으로 아깝게 사망한 채드윅 보즈만은 어째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었던 참이다. 보즈만이 주연을 맡은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라는 작품 또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서 동정표가 몰리면 남우주연상은 그에게 돌아갈 확률이 크다고 봤다. 그러나 오래되고 고루한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그래도 될 거라고 봤다. 홉킨스는 고령이다. 그는 올해 87세다. 이번 수상은 아마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수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들도 고려됐을 것이다. 다 떠나서 작품의 완성도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결국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의 홉킨스에게 돌아갔다. 홉킨스가 ‘더 파더’에서 보인 치매 노인 연기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의 이름이 사사로이 났던 것이 아님을 역력하게 증명하는 영화라는 얘기다. 지금껏 이런 치매 연기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 지금껏 이런 치매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설정이 특이하다. 지금까지의 치매
세상을 살면서 후회할 일은 많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저질렀던 잘못된 선택? 미얀마 군부 학살을 규탄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안한 일? 그런 것들과 동급까지는 아니어도 진짜 후회할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영화 ‘노바디’를 놓치는 일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액션영화를 총 망라한 듯한 작품이다. 갖가지 요소를 다 비벼 넣었다는 그런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영화가 주는 쾌감이 극대화돼있다는 얘기다. 액션영화를 두고 누구는 너무 폭력적이라고 툴툴댄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주인공 허치(밥 오덴커크. 맞다. 당신은 이 배우를 모를 것이다. 하도 많은 영화에서 신 스틸러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배우의 진가를 드디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나 장미나 늦게 피는 존재가 향이 오래가는 법이다)의 폭력은 후련하다 못해 통쾌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화적 쾌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4월 7일 개봉된 영화 ‘노바디’의 현재 관객 수는 약 12만 명. 예전 같으면 수백만 명의 관객들이 환호했을 작품이다. 지금이라도 극장에서 이 영화로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 보시기들 바란다. 영화 내용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1936~2011) 대통령이 유명했던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청바지를 입고 뒷 주머니에 시집을 꽂은 채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상당 부분 하벨이 대통령이 된 후에 윤색된 얘기이거나 그의 전기 영화에 쓸 요량으로 첨삭된 각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벨처럼 시인이나 극작가는 정치를 해서 비교적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역(逆)은 그리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치라는 영역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끌어 들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인문학과 예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예술이 사라진 사회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인민에 봉사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 한들 선전(宣傳), 선동(煽動)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벨이 체코의 벨벳혁명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늘 미완의 혁명이며 때문에 영구적으로 혁명을 수행해 나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