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다. 영화 ‘부산행’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가 ‘반도’와 ‘방법: 재차의’ 등으로는 비교적 혹평을 받았던 감독 연상호가 이번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으로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 연상호의 화려한 부활이다. ‘지옥’ 뿐만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여전히 2위이고 ‘갯마을 차차차’, ‘연모’, ‘마이 네임’ 등도 인기가 최고 수준이다. 다들 국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8개국, 많게는 70여 개 국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K콘텐츠의 인기가 최절정이고 상한가 중에 상한가다. 그런데도 왠지 불안하다. 이런 분위기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문화의 발전은 정치의 그것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는 더욱더 그렇다. 중국의 영화계가 제5세대 감독(첸 카이거, 장예모)과 제6세대 감독(로예), 지하전영 감독들(지아장커)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왜 걸작의 불모지가 됐는 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진핑의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 때문이다. 정치가 닫히면 영화가 닫힌다.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감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변방으로 밀려났는지도 아
새로 나온, 아니 오랜만에 극장가에 나온 한국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알고 보면 장르는 로맨스 영화다. 로맨스 장르가 아닌 척해도 사실은 뼛속 깊이 로맨스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로맨스들이 심상치가 않다. 예전 같으면(라떼에는) 애들이 보기에 ‘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흔히들 얘기하는 현대인들의 성 인지 성향, 우리 사회 속 차별 문제에 대한 자의식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와 같은 작품일 수 있다. 중년 남자 교수와 학생 간의 동성애와 이웃집 아줌마와 고등학생의 미묘한 연애담이 유쾌하게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보수 기독교 단체 같은, 세상의 사랑에 대해 오도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얘기한 것처럼 그런 설정들이 ‘곁들여지는’ 느낌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전면과 정면을 살짝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를 만든 배우 출신의 조은지 감독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이 영화가 갖는 궁극의 주제는 내가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그 관계에
극장 한 켠에서 ‘은둔형’으로 개봉중인 미국 독립영화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퍼스트 카우’는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첫 젖소’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지 전혀 짐작하기 힘들게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런 얘기도 영화로 만들어질 수가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여기서 이런 얘기란, 말 그대로 별로 이야깃거리가 안 되는 얘기가 시나리오로 쓰여질 수 있다는 측면과 이런 이야기조차 제작과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생경함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글쎄, 대체 어떤 투자자가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투자분이 회수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예술은 종종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용기의 결합에서 탄생한다. 투자와 제작, 연출, 촬영, 연기의 모든 면에서 이 영화 ‘퍼스트 카우’는 대단한 용기가 전제돼야 했을 것이다. 특히 연기자들이 놀랍다. 이런 얘기로 연기가 돼?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미 북서부를 배경으로 한다. 퍼스트 카우. 그러니까 한 마을에 처음으로 젖소 한 마리가 들어 오게 되고 이 젖소의 젖을 두고 벌어지는 일종의 암투극이다. 코미디라고? 절대 코미디가 아니다. 실제로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
고만고만하고 비교적 평범한 탈북자의 얘기처럼 느껴지던 다큐멘터리 '그림자꽃'은 러닝타임 38분쯤부터 급물살을 탄다. 이 다큐의 중심인물인 김련희(53)가 한국 주재 베트남 대사관을 ‘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김련희는 베트남 대사 측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자신을 제발 북한으로 돌려 보내 달라는 것이다. 남한 정부가 자신을 억류하고 잡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 꽃'은 탈북자 여성의 얘기가 아니다. 평양 시민으로 살아가던 한 여성이 어찌어찌 해서 남한까지 흘러 들어 왔는데 당초에는 순진하게도 다시 북으로 돌아 갈 거라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일의 뒤틀림이 시작됐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김련희는 여전히 자신을 탈북자가 아닌 평양시민이라 주장한다. 남한은 그런 그녀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행위자로 간주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때리기까지’ 했다. 그녀에게는 보호관찰관이 따라 다니고 일주일에 한번 씩, 혹은 수시로, 그녀가 자신들에게 출두하기를 요구한다. 남한에서 김련희가 살아가는 삶은 한 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녀는 북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문재인 정부 하에서조차 출국금지 연장은 계속된다. 통일부 관계자는 ‘이
합의 하에 아내인 니키(세피데 모아피)와 헤어져 살고 있는(그래봤자 길 건너 아버지 집, 몇백 미터 차이에 불과하지만) 데이빗(클레인 크로포드)은 아내에게 섹스 파트너가 생긴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불길이 인다. 데릭이라는 남자인데(크리스 코이) 아마도 니키는 자신들의 별거를 좀 더 ‘실천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데이빗은 예전에 자신의 것이었던 침대에 이들이 벌거벗고 잠들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새벽에 과거 자신의 침실로 몰래 기어들어가 여자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데이빗은 결국 니키와 데릭을 죽일 것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는 결국 치정 살인극이라는 얘기일까. 그렇게 단순하고 치졸한 얘기일까.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를 보고 있으면 세상엔 여전히 젊고 신선한, 새롭고 낯선 영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늘 새로운 것,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고 그것들의 총합을 꿈꿔야 한다면 이 영화만 한 것이 없다. 이야기는 예측과 달리 완전히 ‘엉뚱한 산’으로 내달리며 자극적인 장면이나 대사와 같은 양념을 전혀 뿌리지 않는다. 독보적이랄 만큼 특이한 이야기 설정과
이게 나라인가. 나라가 나가가 되려면 나라다운 기본기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가 의사다워야 하며 교수가 교수답고 목사가 목사다워야 한다. 기자가 정론곡필을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검사나 판사가 깡패나 건달 짓을 하면 안된다. 정치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도 하기 싫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없다.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 부인이자 오랜 경력의 신경정신과 의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인상비평 하나만 믿고 공개적으로 상대 당 유력 대권 후보를 사이코패스로 진단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실수였다고 얼버무린다. 이건 외과의가 환자의 왼쪽 폐를 적출해야 하는데 오른쪽을 잘라내고 나서는 앗 착각했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환자가 죽고 나서도 단순 실수였다고 얘기하는 식이다. 이게 의사인가. 저자 거리의 약장수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에서는 의학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1, 2’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쳐다보지도 않거나 심지어 비난을 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한국사회 어디에 저런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판타지를 녹이는 TV 드라마라 하더라도 좀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영화 ‘듄’은 예상하거나 준비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아라키스/아트레이데스/하코넨/프레멘/스파이스/베네 게시리트 등 생소하고 외우기도 힘든 이름들이 계속되는데다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끝을 향해 달려가는지 러닝 타임 155분이 다 돼 가도록 도저히 짐작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 원작소설이 지닌 방대함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문명은 그것이 문학이 됐든 음악, 미술, 사진 혹은 그 무엇이 됐든 거의 대부분이 1960년대에 이루어지고 완성됐음을 이 소설은 다신 한번 웅변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60년대가 최고조였던 듯이 보인다. 이 영화를 따라가기 힘들게 하는 요소 가운데 또 하나는 등장인물,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의 면면 때문이기도 하다. 티모시 샬라메와 레베카 퍼거슨을 중심으로 오스카 아이작/조슈 브롤린/제이슨 모모아/스텔란 스카스카드/하비에르 바르뎀/장첸, 심지어 샬롯 램플링까지 배우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어떤 이는 많은 분량에 또 어떤 배우는 작은 역으로 나왔다가 사라진다. 예컨대 프레멘의 지도자 격 인물로 비중은 크지
이번 주 영화로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스트넛 맨’을 고른 것은 순전히 부산영화제때문이다. 영화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난 열흘간 신작들을 챙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당장 개봉하지 않을 영화제 출품작들을 소개해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여지책까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자랑하는 넷플릭스 작품 중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다. 일종의 덴드다. 덴마크 드라마. 이번 것은 6부작이다. 체스트넛은 밤이다. 가을철에 후두둑 떨어지는 밤송이의 그 밤. 왜 제목이 체스트넛 맨일까. 이 영화의 연쇄살인범이 사람들을 죽일 때마다 그 옆에 밤으로 만든 못난이 인형을 표식으로 놓고 가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얘기는 의외로 많다. 미국에는 쿠키를 이용한 진저맨이 유명하다. 아 캔디맨도 있다. 어린 시절 놀던 인형 만들기, 그 인형을 만들면서 불렀던 노래=동요를 살인 모티프로 자꾸 이용하는 이유는 다 그 당시 당했던 정신적, 육체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예컨대 노르웨이 작가 요 뇌스뵈의 인기 소설 ‘스노우 맨’의 연쇄살인범도 폭력적인 유부남과 사귀던 엄마가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일부러 얼음 물에 빠져 자살했기 때문이다. 경찰이었던 엄마의 불륜남은 물에 빠져 들어가
자, 007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임스 본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이제 너무 늙었고 허점투성이다.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너무 많이 휘둘린다. 영국 첩보조직 MI6로서는, 그 수장 M으로서는, 눈 딱 감고 폐기처분해야 할 요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모양이 빠지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영화 내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문제는 묘하게도 영화 외적인 것과 연결된다. 영화사 유니버셜은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와 계약 관계가 끝나 간다. 크레이그는 한국 나이 55세. 007의 액션 연기를 하기에 쉬운 나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섹시하지가 않다. 007 캐릭터의 주요 항목 중 하나가 섹시함인데, 다니엘 크레이그에게는 더 이상 본드 걸과의 베드신이 별로가 됐다. 역할 교체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 젊고 야망적인 배우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할 것인가. 다니엘 크레이그를 어떻게 모양 빠지지 않게 내보낼 것인가. 다니엘 크레이그 출연의 마지막 007 영화 ‘노 타임 투 다이’를 두고 젊은 세대들 간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대체적으로 지루하고(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43분이다) 빌런(악당)들의 죽음이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뤄지며 액션도 새로울 게 없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