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이 ‘그 놈의’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도끼로 암살한 것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트로츠키의 주장처럼 사회주의는 영구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끊임없이 민주적 과정을 거쳐 일신하고 또 일신해야 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죽이면서까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굳혔다. 일국 사회주의 노선은 사회주의의 이상 자체를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해방운동이 이것 때문에 변질됐다. 인간의 얼굴을 해야 할 사회주의가 늑대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됐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의 성과를 내기 위해 급격한 공업화 우선 정책을 폈고 그것을 위해서는 농산품 수출이 필요했는데 당시 소련으로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그 방법으로 밖에는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농산품 수출을 위한 식량 조달은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를 갈취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스탈린의 이 ‘강도’ 행위로 우크라이나 인민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홀모도모르 사태다. 영화 '미스터 존'은 그 부분만을 뚝 떼어 내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이러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 원한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당연히 친러파보
레벤느망은 우리말로 사건이다. 영어로 event, happening으로 나와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accident가 맞다. 사고다. 영화 ‘레벤느망’의 주인공 안느 뒤신(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은 영화 속에서 사고를 당한다. 뜻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임신이라는 사고. 그녀는 이 사고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임신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안느가 1940년에 출생했다는 점, 이야기가 벌어지던 때는 그녀가 23살이니까 현재 (우리 식으로) 1964년이고 배경은 프랑스라는 점이다. 이때 프랑스뿐만 아니라 거의 전 세계적으로도 중절 수술이 불법화돼 있었던 때이다. 물론 지금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시대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슈는 여성 인권의 사안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그 금지의 수위를 낮춰 왔다. 가톨릭에서는 여전히 태아를 죽이는 일을 살인 행위로 간주한다. 우리나라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기존 낙태죄를 폐지하면서 임신중절의 합법화 길을 열었다. 여성 스스로 자기 결정권에 의해 임신 14주 이내에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레벤느망’에서 안느는 임신 10주째 돼서,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해 주는 非의사에게서 아기를 뗀다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그렇게 명료하지가 않다. 분위기와 몇 개의 장면들이 마치 환등기(幻燈機)의 슬라이드 마냥 한 장 한 장씩 기억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적으로 사람들에게 있어 유년기란, 풀 숏이나 부감 숏 그리고 롱 숏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비교적 롱 테이크들이다. 클로즈업으로 떠오르는 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 정도다. 케네스 브래너의 위대한 역작 ‘벨파스트’가 딱 그렇다. 이 영화가 초반에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흑백과 롱 숏&롱 테이크와 풀 숏 위주로 촬영돼 있기 때문이다. 아홉 살 버디(주드 힐)의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의 자태가 꽤나 그윽한 데다 여전히 예뻐 보이는데도 얼굴은 잘 안 보이게 찍혀 있다. 자나 깨나 아들 둘 걱정에 남편과 가정의 앞날에 대한 시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엄마의 표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제대로 잡히기 시작한다. 영화 ‘벨파스트’는 1969년의 벨파스트 사태, 흔히들 북아일랜드 분쟁이라 불리는 극심한 내전의 상황이 배경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핏빛 전투와 테러, 폭탄과 총탄이 난무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벨파스트 어느 동네의 한가로운 모
영화와 예술은 공교롭게도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영화는 밝은 시대보다는 어두운 시대에 더 잘 되는 경향이 있다. 아니 그보다는 어두운 상황에 대한 얘기를 더 잘하는 경향이 있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그랬다. 한국사회가 문재인 정부 하에서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하게 곪아 있고 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줬다. 그건 신자유주의가 심화된 때문이고 한국 자본주의가 극도의 천민화, 양극화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문재인 이전 이미 9년 동안 진행돼 왔었다. '기생충’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 모두 이러다가 비극적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 드라마로 등극한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극중 인물인 1번 노인을 통해 이 드라마는 보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 영화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그러나, 한 템포 정도 약간 늦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대체적으로 3년이나 4년, 늦으면 5~6년 전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러니까 ‘기생충’은 박근혜 시절이 계속됐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를 보여줬던 셈이다.
새 영화 ‘안테벨룸’은 쉽게 정체가 드러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얘기는 곧, 쉽게 정체를 드러나게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뜻이다. 단 한 줄의 설명도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기 쉽다.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단 하나, 안테벨룸은 최근 수 년간 나온 작품 가운데 단연코 설정이 가장 뛰어나고 놀랄만한 작품이라는 점은 얘기할 수 있겠다. 영화의 전체 이야기 구조는 극 후반에 가서야 나타난다. 그게 약 72분이 걸린다. 그러므로 왜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느냐고 너무 불평하지 말고, 참고 앉아 있으시라. 곧 영화의 내용이 극장 전체를 폭발시키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극 흐름 중간중간 키워드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첫 번째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흐르는 자막이다. 이런 내용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이다. “과거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과거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는 핸드폰 소리다. 핸.드.폰.소.리. 영화를보면서 이걸 꼭 기억해 두시기들 바란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핸.드.폰.소.리. 그게 아주 결정적이다. 돌이켜 보면 남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변수로 따지면 일종의 돌발 변수다. 예상치 못한 작품이고, 예상치 못한 내용인 데다, 예상치 못한 반응들이다. 흥행 역시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만들어 혜성처럼 등장해 각광을 받았고, 그 다음 작품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700만 관객까지 모으며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장철수 감독이 만들었다. ‘김복남’과 ‘은밀하게’는 서울 강북과 강남만큼 큰 차이가 난다. 보폭이 워낙 크게 벌어진 작품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장철수 본인도 대체적으로 돌발 변수적인 측면이 큰 감독이다. 그 역시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얘기다.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새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개봉 전, 일부 평론가와,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일부 네티즌, 유튜버들 사이에서 ‘싸구려 포르노’란 소리를 들었다. 동의하지 않는다. ‘포르노’란 단어는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얘기다. 영화의 표현 수위가 높은 것은 맞다. 섹스 신, 베드 신, 애정 신으로 극 전편이 이어진다. 근데 섹스는 이 영화의 소재를 넘어 주제이다. 주제가 섹스이기 때문에 섹스 장면
워낙 유명했던 작품을 다시 만드는 것은, 게다가 그게 세계적 명작 수준의 원작소설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면 더욱 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어떻게 바꿀까’, ‘무엇을 바꿀까’다. 첫 번째는 결국 만드는 자의 차별성, 곧 자신만의 정체성 문제 같은 것이다. 마치 화가의 낙관(落款)같은 것을 자신의 영화엔 어떤 문양으로 찍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인데 이건 결국 시대정신과 관련이 있다. 지금의 시의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올바로 원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다. 두 번째, 무엇을 바꿀 것인가의 문제는 트렌드와 유행, 그 모던함을 어떻게 살려 낼 것인 가이다. 영화가 올드 패셔너블한가, 모던한가의 반응은 여기서 갈린다. 영국 셰익스피어 연극전문배우 출신의(그만큼 전통과 정통의 연기파라는 얘기를 듣는) 케네스 브래너는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나일 강의 죽음’을 두고 똑같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피터 유스티노프, 베티 데이비스, 미아 패로, 제인 버킷, 올리비아 핫세 등이 나왔던 1978년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 작품이었다. 너무 바꾸면 원작이 갖는 무게감, 그 의미를 실어내
마이클 돕스가 쓰고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의 박수민 대표가 번역한 다소 장황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그래서 이른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미국 작가 조너던 사프런 포어의 소설 제목이자 영국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톰 행크스와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았다.)’ 느낌을 주는 책 『1962–세기의 핵 담판과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은 논픽션 르포르타쥬이다. 그런데 실로 내용이 너무나 다이나믹하고 풍부해서 한편의 밀리터리 첩보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다큐를 이런 식으로 쓴다. 한 권의 대하소설처럼 쓴다. 그래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 책 『1962』는 그런 면에서도 귀감이 된다. 제대로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나 역사학자가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등급 차이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1962』는 1962년의 급박했던 미국-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다룬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비엔나에서의 미-소 정상회담 때 했던 약속을 뒤집고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비밀리에 조성한다. 그리고 핵 탄두를 반입하기 시작한다. 뒤늦게 이를 안 존 F. 케네디 정부
영화 ‘리코리쉬 피자’에는 리코리쉬 피자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를 암시하는 대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망이 구축된 체인점 레코드 숍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런 뜻이 없는 척 미국인들, 특히 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 ‘리코리쉬 피자’가 과거의 얘기를 하는 작품이란 걸 알게 만든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영화 제목이 ‘난다랑’인 셈이다. 난다랑은1980년대 초중반 서울 여기저기서 성업했던 카페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리코리쉬 피자’는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 개리 고츠만의 실제 성장담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츠만은 ‘나의 그리스식 웨딩’, ‘맘마미아’, ‘폴라엑스’, ‘더 파크랜드’ 등을 제작한 인물이다. 개리 고츠만과 이 영화를 만든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가까운 사이다. 고츠만은 1952년생, 앤더슨은 1970년생이다. ‘리코리쉬 피자’의 주인공 이름은 개리이며 그의 15살 때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아마도 개리 고츠만은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평소 ‘라떼에는(‘나 때에는’을 우습게 표현한 말)’ 방식으로 수다를 떨곤 했었을 것이다. 그걸 평소
정치하는 것과 연애하는 것은 사실,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너무 사랑해서 미워하고 또 너무 미워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신파는 정치의 영역에서나 연애의 과정에서 똑같이 벌어진다. 이런 식의 대사는, 그것만 잘라서 들으면 도대체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정치인지 연애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 오로지 당신 자신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된 줄 알아?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 그런데 당신이 이럴 수 있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자 이건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아니면 남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부터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담아내고 있는 변성현 감독은 신작 ‘킹메이커’에서도 정치판 두 남자의 얘기를 역시 ‘브로맨스(남자 간의 특별한 감성. 우정을 넘어서는 무엇)’의 빛깔로 그려낸다. 유독 이번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게이 감성을 곳곳에 심어 놓는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역의 조우진은 완벽한 여성적 캐릭터이다. 조우진은 이후락을 연기하고 있으며 실제 역사에서의 이후락 중정부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킹메이커’는 1960~7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