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한국정치 사회구조, 조금 좁혀서 정치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1990년대의 미국 민주당의 흐름을 복기하면 조금 도움이 된다. 그 학습을 위해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가 출간한 카툰 북 《버니》를 참조했음을 미리 밝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기 전 닉슨은 월남전의 여파로 재선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때문에 1972년 그가 재선에 성공한 것은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는데, 그건 베트남전을 비롯해서 중남미에서 연이어 일어난 좌파 혁명의 성공과 그 분위기로 인해 미국 사회가 오히려 보수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미 국내에서의 지난(至難) 했던 반전 시위가 피로감을 가져온 것도 일부 사실이다. 이때부터 미국 민주당은 급격하게 우클릭한다. 민주당 내 우파 그룹은 처음엔 DNC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 민주당 전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이후엔 CDM(Coalition for a Democratic Majority : 민주적 다수를 위한 연합), 혹은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 민주당 지도자회의)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을 끊임없이, 그리고 줄곧, 우경화된 상태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이번 주 소개 영화는 미안하게도 OTT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일본영화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파이널’이다. 제목만으로는 시리즈의 맨 마지막 회 같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 최종회는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비기닝’이라고 해서 프리퀄이 하나 남아 있다. 이 시리즈는 총 5회이다. 자 그러니 일각에서는, 앞의 세 편을 다시 다 찾아봐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대답은 그래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에피소드는 비교적 독립적인데다 과거의 이야기를 할 경우 그 핵심적인 내용은 플래시 백 기법을 써서 그 연결 지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번 4편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파이널’도 그 이전의 회차들과 기본 줄거리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역날검의 명수이자 최고의 검객 소리를 듣는 주인공 히무라 켄신(사토 타케루)이 도쿄 인근에서 연인 카오루(타케이 에미)가 운영하는 무예도장에 은둔해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켄신에게 악의 세력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대형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악의 세력들 모두, 흔하게 얘기해서 간단치 않은 무공과 칼 솜씨를 지닌 무사 출신들이다. 일명 밧토우사이(발도제, 抜刀斎 / 발도술, 拔刀
제주도 말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무엇일까.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그린 소준문 감독의 ‘빛나는 순간’은 영화 내내 가르쳐 주지 않다가 맨 끝에 가서야 얘기해 준다. 그래서 ‘아하, 이 영화의 러브 스토리는 그리 해피 엔딩이지 않겠구나’하는 예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결국은 가르쳐 주긴 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제주말로 ‘이녁 소랑햄시다’이다. 완전히 다른 말이다. 제주와 ‘육지것’들은 소통하기 힘든 언어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감독의 그런 장치, 곧 당신을 사랑합니다의 서울말과 제주말의 구현에 시간 차를 두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기조(基調)이다. 그 점을 알아채는 사람은 비교적 영화의 감이 좋은 사람들이다. 영화를 좀 봤구나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영화가 너무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간다고 느낄 수 있겠다. 그래서 다소 고답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순간’은 그렇게 기성의 질서에 머무는 작품이 아니다. 무엇보다 제주 해녀의 얘기로 시작해서 찬란한 러브 스토리를 이끌어 낸다. 그것도 아주아주, 좀 더 강조해서 ‘아주아주아주아주’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영화는 70살이 다 된 제주
학기가 끝나고 성적을 입력하면서 젊은 친구들에 대한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임시 교편’ 과정에서 좋은 학생들을 만났다. 한 번도 출석에 빠지지들 않았고 과제를 거른 적도 없으며 비대면 수업이지만 학습 태도들도 좋았다. 모두들 훌륭한 점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과제 명은 ‘올리버 스톤의 영화로 본 미국 현대사 1954~1974’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변방의 한국에서 자신의 영화가 역사 공부에 쓰이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영화감독으로서 나름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화 중 ‘플래툰’과 ‘7월 4일생’ 그리고 ‘하늘과 땅’은 베트남전쟁사와 그와 연관된 미국 국내사를 들여다보는 데 있어 최적의 텍스트다. 특히 ‘플래툰’은 미군에 의한 미라이양민학살사건을 그리고 있고 이로 인해 미국 국내에서 반전 운동이 어떻게 확산되는지, 거기에 CBS TV 기자이자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 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올리버 스톤의 ‘베트남 3부작’은 통킹만 사건에서부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반정부 게릴라가 연합한 구정 大공세, 치열했던 다낭 전투 등 전쟁 전사(全史)를 복기하며 그려
2016년 한국에서 단 2000명의 관객이 들었던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 응징의 날’이 한국영화 ‘발신제한’으로 리메이크 돼 흥행에서 비상(飛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스펜스가 상당하고 주연인 조우진을 비롯해 그를 떠받치는 조연들, 곧 지창욱, 진경, 류승수, 김지호의 무게감이 남달라 총합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건 이 영화를 연출한 김창주 감독이 편집감독 출신이라는 점, 스태프, 배우들과 대체로 동류 의식이 강했을 것이라는 점 등등이 왜 이 영화에 중견, 중량급 인물들이 비교적 작은 역할에도 대거 참여했는 가를 짐작케 한다. 영화도 정치가 잘 돼야, 프로덕션이 잘 굴러가야 결과물이 좋은 법이다. ‘발신제한’은 그런 느낌을 준다. ‘발신제한’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테러 위협에 직면한 한 남자(조우진)의 하루를 다룬다. 남자는 중견 은행의 PB 센터장이고 다루는 액수만 수백억 원대인 인물이다. 자신이 보유한 현금도 좀 있고, 당연히 자기 집이 있는 데다 와이프와는 그럭저럭, 딸 아들과도 그런대로 살고 있으며, 막 새로 출시된 수천만 원짜리 SUV로 출퇴근을 하는, 꽤 성공한 은행 간부다. 그런데 오늘, 학교에 가는 아이 둘을 데리고
중국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감독으로 알려진 지아장커의 신작 ‘강호아녀’는 강호의 아들과 딸이란 뜻이다. 결국 강호남녀라는 얘긴데, 한 마디로 ‘강호의 사람들’이라는 의미겠다. 흔히들 요즘 강호에 도가 떨어졌다는 소리들을 하곤 한다. 이 영화 속 강호남녀에게는 의리가 중요할까 사랑이 중요할까. 지아장커는 영화 내내 그 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지아장커가 보기에 의리든 사랑이든 그게 다 돈과 관련이 있고, 사회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원래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와 지금의 중국사회가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 있음을 지목하고 거기에 따라 인간형과 인간성도 변질됐음을 고발한다. 그게 다 중국 공산당의 독재와 부패에 따른 것이며, 당이 주도하는 자본주의화가 결국 천민적(賤民的) 성향을 띤 결과라는 것이라고 그는 지목한다. 이야기는 2001년 다퉁시에서 시작해 2018년 다시 다퉁시에서 끝난다. 다퉁시에서 살아가는 차오(자오타오)는 빈(랴오판)의 여자이다. 빈은 다퉁시 조직의 보스다. 그는 다퉁시의 재개발 바람에 편승해 이곳저곳의 이권에 개입해 조직을 확장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극히 허접하고 누추하기가 이를 데 없다. 20
가장 폭력적인 것이 가장 순수한 것이다. 불온한 상상력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의 기제(機制)가 된다. 김미례 감독의 숨겨진 노작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자명(自明)한 척 도리어 모든 진실이 묻혀져 가는 시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작품이다. 특히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한국인 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 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 현실에서 사람들의 손에, 또 그들의 머리에 무엇이 실리고, 무엇이 담겨져야 하는 가를 지목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라기보다는 고요한 포효(咆哮)이다. 거친 진술의 기록이다. 깊이 파묻혀 있던 한 시대의 분노를 발굴하는 고고학이다. 그리고 그 유물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직시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이다.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년과 75년 일본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과격 테러리스트들의 얘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선’은 이른바 정치조직이나 군사조직이 아니다. 이념이다. 이념적으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오염됐던 반정부 조직, 적군파와 달리 순수 ‘도시 게릴라’를 자처한 테러’범’들의 ‘생각=선언=주의=연대’를 지칭한다. 이들은 늑대 부대, 대지의 엄니 부대, 전갈 부대라는 소조(小組)의 이름으로 미쯔비시
오멸(吳滅. 본명 오경현) 감독이 영국産 오프로드 차 광고에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감독이 이 차를 타고 다닌다는 걸 앞세운다. 오멸이 짚차를 타고 제주 해변을 다니며 우리에게 전하려는 얘기는 무엇일까.가 광고의 컨셉이다. 그건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실제로 놀랐던 것은 광고의 앞 부분이 영화 ‘지슬’의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슬’은 제주 4.3 항쟁을 다룬 극영화이다. 광고는 한 아이가 동네 어른들이 피신해 있는 서귀포의 큰넓궤로 달려가 동굴 입구를 들여다 보는 장면을 보여 준다. 4·3이 광고에 나오다니. 그렇다면 4·3조차 상업화된 걸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4·3의 문제가 이제 그만큼 대중적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반공 정권이 수십년간 좌익의 준동이니 좌파들의 난동이니 하며 온갖 흑색선전을 뿌려댔어도, 심지어 공적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술하려 했어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이제 광고에까지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멸감독 역시 그런 시대적 흐름을 간파했을 것이다. 광고 출연료도 짭짤했을 것이다. 그 돈은 그가 또 다른 독립영화를 만들
크루엘라는 원래 빌런(villain), 곧 악당이다. 적어도 1996년에 나온 글렌 클로스 주연의 영화 ‘101 달마시안’에서는 그랬다. 도디 스미스가 쓴 동명 원작소설에서는 더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영화 ‘크루엘라’는 크루엘라가 크루엘라가 되기 전, 에스텔라 시절부터의 얘기다. 그러니까 착했을 때 얘기라는 것이다. ‘크루엘라’는 또 한편의 스핀오프(spin-off), 원작의 등장인물 한 명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꾸민 영화이다. 사람들은 선한 자 혹은 그들의 미담(美談)에는 그리 관심이 많지 않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여기서 상대적이란, 악당을 두고 하는 얘기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악당 이야기에 매료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배트맨 시리즈를 두고도 사람들은 조커 캐릭터가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악은 어디에서 오는지, 악의 평범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등등 보다 철학적인 접경을 오고 간다. 그래서 아예 ‘조커’라는 영화까지 나왔다. 영화 ‘크루엘라’도 같은 맥락이다. 도대체 이 여자, 에스텔라가 왜 미친 악녀가 됐냐는 것이다. 그 악에는 꼭 악만이 있는 것이냐, 혹은 선한 구석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선한
극장가에서 거의 사라진 (극장에서 안 보면 결코 VOD 등을 통해서는 자발적으로 보지 않을)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실로 참혹해서 영화를 보고 있기가 심란하고 불편해진다. 영화는 1995년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학살극을 다룬다. 스레브레니차는 당시 세르비아가 강제로 세운 자신들의 자치 지역이었다. 이곳의 대다수 주민을 차지했던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외곽의 UN 안전지대로 피신하지만 곧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분산 수용되는 척, 남자들은 모조리 집단 총살당한다. 잠재적 군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주인공 아이다(야스나 두리치치)는 영화 내내 뛰어다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르비아 군이 UN 안전지대까지 들어왔고 곧 아들 둘과 남편을 잡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UN 통역관으로 일한다. 그녀는 UN군에게 통사정을 해 자신의 가족이 끌려가지 않게 하려 한다. 그러나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네덜란드 UN군은 아이다의 가족뿐 아니라 사람들을 구해내지도 못한다. 아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스레브레니차에서는 단 며칠 동안 8000명이 살해됐다. 1992년에 시작돼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