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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칼럼] 청년이 아니라 청년’적’ 정치를 꾀해야

 

 

오멸(吳滅. 본명 오경현) 감독이 영국産 오프로드 차 광고에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감독이 이 차를 타고 다닌다는 걸 앞세운다. 오멸이 짚차를 타고 제주 해변을 다니며 우리에게 전하려는 얘기는 무엇일까.가 광고의 컨셉이다. 그건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실제로 놀랐던 것은 광고의 앞 부분이 영화 ‘지슬’의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슬’은 제주 4.3 항쟁을 다룬 극영화이다. 광고는 한 아이가 동네 어른들이 피신해 있는 서귀포의 큰넓궤로 달려가 동굴 입구를 들여다 보는 장면을 보여 준다. 4·3이 광고에 나오다니. 그렇다면 4·3조차 상업화된 걸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4·3의 문제가 이제 그만큼 대중적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반공 정권이 수십년간 좌익의 준동이니 좌파들의 난동이니 하며 온갖 흑색선전을 뿌려댔어도, 심지어 공적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술하려 했어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이제 광고에까지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멸감독 역시 그런 시대적 흐름을 간파했을 것이다. 광고 출연료도 짭짤했을 것이다. 그 돈은 그가 또 다른 독립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 간다.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 요즘엔 무릇 언론들이 전부 '이준석 돌풍'이 시그널이라며 침을 흘리듯 기사들을 써댄다. 하지만 이준석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환경운동가) 같은 친구가 아니다. 사람들이 툰베리에게 열광하고, 그녀를 지지하고, 심지어 이 아이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녀가 16살에 불과해서가 아니다. 청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문제, 환경의 문제, 지역분쟁의 문제, 원전과 탈핵의 문제 등이 한결같이 씨줄날줄로 연결돼 있음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16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16이라는 숫자를 뛰어 넘는 정치적 사회적 혜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의 간극을 무너뜨리는 공감의 정치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타칭 정치평론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준석 청년 돌풍을 민주당을 비롯한 다른 당들, 한국의 정치판이 배워야 한다. 이 흐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들 입을 모은다. 본말이 전도된 한심한 논평들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물리적인 나이의 청년 정치가 아니다. 그걸 뛰어 넘는 ‘청년적’ 정치이다. 청년들, 특히 20대 남성들이 숱하게 보수화 돼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나치의 유겐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우려스럽다. 이런 계층들이 사회를 주도한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고 다 낡은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고령이어도 청년적 이상을 여전히 잘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를 청년화 하는 것이지 청년들을 시대화 하는 것, 시대에 끼어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이준석이 청년정치를 올바로 가져 가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왜 5·18 학살의 주범이고 연원을 더 거슬어 올라가 한국 쿠테다 역사의 원범인 정당에 들어가 있는지, 세월호 문제와 윤석열 항명 사태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태도는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아마도 이준석의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청년 정치가라는 라벨을 붙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여, 정치평론가들이여 제발 그 입들을 다물라. 이준석이 청년 정치가 아니듯 윤석열은 공정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 그건 박근혜가 사실은, 여성’적’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그녀를 여성으로서 지지한다고 했던 건 무슨 무식의 발로인가. 소위 ‘이준석 돌풍’에서도 그 같은 무지함이 감지된다.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CF를 찍는 감독은 시대의 변화를 안다. 이제 오멸이 앞에 나서도, 지금 ‘지슬’을 앞장 세워도 이 광고가 세상에 먹힐 것이란 걸 안다. 그레타 툰베리도 자신이 어린 나이임에도 세상이 자기의 목소리에 귀기울 것이란 걸 안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진작에 감지했거나 자신에게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명분이 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한국의 언론은 바로 그 지점을 회복해야 한다. 이준석의 정치활동에 돌풍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는 일은 제발 집어 치우고 그 안에 숨겨진 구악(舊惡)의 단말마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앙샹레짐(ancien régime)의 반동이 다소 세련되게 온 셈이다. 거기에 속아서는 안되는 언론들이 제일 먼저 속고 있다. 아니면 속고 있는 척 하거나. 통탄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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