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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우리 안의 광기, 우리 안의 파시즘

67. 그대가 조국 - 이승준

 

다큐멘터리는 종종 선동(煽動)을 한다. 그 안에 종종, 아니 자주 강한 주장을 넣는다.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그렇다. 옳고 그름이 정확하게 판단되지 않았을 때 더욱 그런 경향성을 보인다.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얘기는 다 헛소리이다. 다큐멘터리가 그렇지 못한 건 사람 자체가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계급성을 지니며 당연히 당파성을 지닌다. 다분히 진영논리를 추구한다. 다큐멘터리도 그렇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내심의 선택’이 강하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것, 이 말을 이 다큐에 대해 말할 때 쓰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는 저잣거리의 쓰레기 같은 말이 돼버렸다. 이쪽, 저쪽 ‘이놈 저놈’이 함부로 막 갖다 쓰면서 공정은 가장 공정하지 않은 말이 돼버렸다. 오죽했으면 ‘공정주의자’란 말이 생겼고 선택적으로 공정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 됐겠는가.

 

조국 다큐 ‘그대가 조국’은 태생부터 논란을 안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파에서는 이를 자기변명을 위한 소모적인 정치 행위라고 비판한다. 한편 그 반대편에서는 일명 ‘조국 사태’가 얼마나 왜곡된 것이었는가를 밝히려 하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정당한 저항임을 밝히려 한다. 이래저래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런데 정작 주목할 것은 이 다큐를 만든 감독이 바로 이승준이라는 것이다. 이승준은 일종의 정통 다큐멘터리스트이다. 그는 정공법으로 작품을 찍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승준은 ‘뻗치기’의 달인인데 며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자신의 취재 대상 옆에 머물며 순수하게 기록하고 또 기록하고, 또 기록하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팩트가 중요하다. 이른바 ‘윤색의 윤리학’도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준은 사실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팩트의 높낮이를 달리한다든지, 팩트의 배열을 다르게 한다든지 하는 일조차 금기시하는 작가이다. 그의 전작들 ‘달팽이의 별’이 그랬고 ‘부재의 기억’이 그랬으며 ‘그림자꽃’이 그랬다. ‘달팽이의 별’은 2011년 세계 최대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대가 조국’이 충격적(?)인 것은 조국 전 장관 스스로 이 다큐 오프닝 신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국 다큐를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조국을 직접 목도하게 될 줄은, 약간 과장하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조국은 억울하게 전 가족이 탄압받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미지화돼 있다. 언제부턴가 조국은 국민의 반으로부터 ‘내로남불’의 상징이 돼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구체가 아니라 추상이 됐다. 자연인 조국은 사라졌다. 그런데 다큐 첫 장면부터 사람들은 조국의 ‘실제’에 맞닥뜨린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다큐에서 조국은 넥타이를 매고 법정으로의 외출 준비를 하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밥에 김을 얹혀 홀로 밥을 먹는다. 설거지를 하고 밥을 먹다가 딸과 통화를 하기도 한다. 전화는 딸 조민과 하는 것이다. 통화 말미에 그는 딸에게 말한다. “힘내!” 이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조민은 아직 ‘온전할’ 때이다. 사람들은 아비가 딸한테 하는 그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이승준이 조국을 ‘등판’시킨 것은 명료한 자기 판단이 있어서다. 이승준은 조국이, 자기방어권을 온전하게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거의 완벽하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조국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되 그것을 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승준은 조국의 일상을 보여 주는 데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조국 스스로 자기방어권을 실현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인 것만큼 사람의 진실을 담아내는 행위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법은 이승준의 전작인 ‘그림자 꽃’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탈북 여성 김련희 씨의 진심과 그녀를 둘러싼 진실을 보여 주기 위해 평양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남편과 딸아이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냥 둘이 마주 앉아 묵묵히 저녁밥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그 어떠한 주장이나 주의를 들려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세 명의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이, 하루빨리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대가 조국’에서 조국의 출연은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닌다. 조국 개인 자체에 대한 판단을 어떤 의미에서는 새롭게 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 ‘그대가 조국’은 친(親) 조국이나 조국 수호자가 보기에는 다 아는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비(非) 조국 혹은 반(反) 조국이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새롭고 충격적인 내용일 수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비 조국, 반 조국용 영화일 수 있다. ‘그대가 조국’은 직접적인 증거나 증좌를 보여주지 않는데 그건 상당이 의도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직접적인 증거나 증언의 나열은 다분히 정치적 쟁점에 불과하다고 이승준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신 그는 방증을 보여주려 애쓴다. 외곽을 때려 정면을 향해 뚫고 가려고 한다.

 

이번 다큐에서 조국은 조연이다. 대신 장경욱 교수와 박준호라는 사람이 주연이다. 동양대에서 정경심 교수와 같이 근무했던 장경욱 교수는 ‘조국 사태’의 핵심인 표창장 위조 문제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고 법정에서 수없이 밝히려 했으며 언론에 그 사실을 무수하게 말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음을 증언한다. 장경욱은 자신이 진실을 밝히는 일에 실패해서 정경심 교수가 4년형을 받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번 다큐에서 눈물을 흘린다.

 

글을 가지고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고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런데 면 대 면 인터뷰에서는,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일종의 아이 콘택트가 되기 때문이다. 증인이 거짓말을 하면 카메라는 그것을 포착해 낼 수 있다. 조국 동생 조권의 친구인 박준호는 검찰에서 ‘당한’일을 증언한다. 그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욕의 최고치를 경험했음을 증언한다. 검찰이 얼마나 짜 맞추기 수사를 하려 했는지에 대해 그는 그냥 온몸으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장경욱, 박준호 두 사람의 증언은 조국이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이상의, 그 백 배, 천 배 이상의 효과와 효능감을 보인다. 팩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팩트여도 조국이 직접 얘기하면 호도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으로부터 파고 들어가는 식의 전법은 그 사실성을 훼손할 일이 거의 없다.

 

 

‘그대가 조국’이 진짜 충격인 것은 표창장 위조라는 검찰의 주장과 공소유지, 구형 언도의 행위가 모두 거짓이었을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직인 논란!, 장경욱 교수는 직인이 찍히게 되는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 표창장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음을 보여 주려 한다. 여직원의 증언이 덧붙여져 있기도 하다. 강사실 PC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는 컴퓨터 전문가의 논리적, 이성적 증언과 증거도 보여 준다. 그럼에도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법부에서는 판단의 고려조차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국 다큐 ‘그대가 조국’은 조국 사건을 둘러싼 진실 공방을 보여주려 한 작품만은 아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보다 이 다큐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집단의 광기를 보여주고 기록하려 한다. 그 광기가 작게는 한 개인과 한 가족을 어떻게 망가뜨렸으며 크게는 사회와 국가 전체를 되돌이킬 수 없는 거짓의 나락으로 빠뜨리게 했는지를 그려 낸다.

 

집단의 광기는 곧 파시즘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지난 3년간 뼈저리게 경험한 셈이다. 그 파시즘에 경도됐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 모두는 지난 3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날이 머지않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도래할 것이다. ‘그대가 조국’은 바로 ‘그런 날’을 준비하는 요한계시록 같은 작품이다. ‘두려워할지니,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올지니’ 이승준의 속삭임이 담겨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심판의 날에 울고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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