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인천의 역사는 인천항과 그 궤를 같이 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변변한 산업기반이 없던 오랜 기간, 경제는 더더욱 그러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낯선 크기의 선박들이 외국으로부터 물밀듯 쏟아져들어왔다. 숱한 사람이 오가고 막대한 양의 화물도 들고 나갔다. 배와 육지 간에 짐을 내리고 싣는 일이 필요해졌다. 부두노동(하역)의 시발이었다. 1년 365일 부두에서의 일거리가 넘쳐나는 인천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까이서 멀리서 남부여대(男負女戴), ‘인천 드림’을 향한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두노동은 대부분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하는 일에 따라 하륙군(화물을 선박에 싣고 내림), 두량군(미곡의 분량을 계량하고 포장), 칠통군(선박과 부두 사이에서 화물을 싣고 내림), 지계군(육상에서 화물 운반) 등으로 나뉘었고 이들은 통칭 모군(募軍)이라 불렸다. 전혀 조직적이지도, 숙련되지도 못했던 이 일꾼들을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한 기구가 생긴 게 1887년이다. 화도진 별장 겸 인천 경무감이었던 김광신이 중구 내동 167번지에 ‘경기청’과 ‘영남청’을 설치했다. 경기청은 하역업, 영남청은 각각
“나는 어렸을 때 인천에서 살았다. 집 앞에는 창영국민학교가 있었는데, 학교의 울타리는 철조망이었다.” “지붕 위에서는 시가지가 구석구석 잡혔다. 오른쪽으로는 측후소가 우뚝 선 오정포 산, 그 옆은 만국공원, 만국공원 속에는 평화각, 또 그 옆으로는 뾰족 성당, 저 멀리 황골고개 너머 공설운동장, 그리고 바로 눈 앞이다 싶게 상인천역(지금의 동인천역)의 지붕, 역 좌우로는 배다리와 철다리...(중략)...구름다리 저 건너 괭이부리 쪽으로 는 바다가 쪽박 우물만큼 고여 있었다.” “수도국산과 오리나무산으로 이어진 광철이네 대문 앞으로 뻗어오른 그 길은 이뿐이네 집과 장님네 집에서 네거리로 갈라졌다. 그 중에서 송현동 쪽의 한모서리가 이뿐이네 이발소였고 맞은편 송림동 쪽 모서리는 육형제네 토담집, 송현동 쪽으로...” 이런 소설이 정말 있을까 싶다. 두 편의 소설, 인천의 동구를 잘 표현한 소설 세상에 없지 싶다. ‘지붕 밑의 한낮’, ‘강 건너 저쪽에서’ 등이다. 한남철! 그는 누구인가. 인천이 낳은 진정한 소설가라 부르고 싶은 이름이다. 1937년 인천(강화)에서 태어나 창영동에서 유년기를(창영초교 졸업) 보내고 인천중학교와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에
▲오후 2시 영상메시지 촬영/ 시청 영상편집실
백령도 서남쪽 조그만 포구, 정겹지만 백령도 나아가 우리나라 근대문화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교회사에 한 획을 그었던 중화동 교회다. ‘19세기 조선시대 당시 중화동에 터를 잡고 고구마 이외 농사가 잘 되지 않았던 척박한 토질을 알고 있었다면 교회가 뿌리를 내렸을까?’라는 생각에 포구의 위대함마저 든다. 어느덧 역사는 한 세기가 훌쩍 지나 당시의 인걸은 간데 없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자취와 그림자가 중화동 골목을 맴도는 것 같다. 백령도의 기독교 전래와 관련된 초창기 이야기를 살펴보자. ▶ 체크포인트 1. 양천(陽川) 허씨(許氏), 백령도와 인연을 맺다 지금부터 약 1100년 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전투할 때 공암촌(孔岩村)에 살던 허선문(許宣文)이라는 지주가 군량미를 후원한 바 있는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허선문의 공로를 인정해 공암촌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고, 허선문을 ‘시조’로 하는 양천 허씨가 생겼다. 허씨 가문의 역사적 인물로는 ‘홍길동전’을 저술했던 허균, ‘동의보감’을 저술했던 허준, 조선 중기 서인의 송시열과 라이벌이었던 남인 출신의 미수(眉叟) 허목(許穆) 등이 있다. 백령도와의 인연은 서
박남춘 인천시장이 21일 이날 문을 연 포스코 글로벌연수원 생활치료센터를 찾아 나은병원 의료진을 격려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오후 5시 휴머니튜드 양해각서 체결/ 시청 재난상황실
▲오전 10시 티타임/ 온라인 ▲오후 2시 연합뉴스 인터뷰/ 시청 접견실
▲오전 10시30분 산단 산업문화공간 대개조 관계기관 업무협약/ 온라인 ▲오후 2시 인천SOS랩 MEET-UP Day/ 온라인
해병 6여단 장병들이 오는 26일 개장을 앞두고 있는 옹진군 백령도의 한 해수욕장에서 지뢰탐사작업을 벌이고 있다. ( 사진 = 해병 6여단 제공 ) ▶관련 기사 15면
백령도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중화동(中和洞). 1802년에 저술된 ‘백령진지(白翎鎭誌)’에는 중화진(中和津)으로 기록돼 있다. 다른 지역은 모두 동(洞)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곳만 유일하게 진(나룻터)으로, 긴 역사를 간직한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중화동 마을은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진촌(津村)인 셈인데, 현재 53세대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은 백령도 백고구마의 자존심이자, 우리나라 기독교의 온실 역할을 한 성소인 중화동 교회가 자리한 곳이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담장에 장식된 사진 자료는 과거 초기 종교의 맥락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을 보여주며, 현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네 주민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인 셈이다. 시너지 효과일까? 금연과 절주를 통한 신앙윤리를 실천하면서 건강과 장수의 행운을 얻었다 하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아늑한 만(灣)으로 이뤄진 해안가. 또 해안가를 따라 조성된 중화동 마을. 마을 벽화 사이를 걷다보면 100여 년 전 중화동 포구를 드나들며 신앙 활동을 하던 선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현재는 마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기독교 전래 선구지로 표지석까지 세워 알리고 있으며, 나아가 중화동 교회를 근간으로 백령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