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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21 - 영진공사

 근대 인천의 역사는 인천항과 그 궤를 같이 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변변한 산업기반이 없던 오랜 기간, 경제는 더더욱 그러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낯선 크기의 선박들이 외국으로부터 물밀듯 쏟아져들어왔다. 숱한 사람이 오가고 막대한 양의 화물도 들고 나갔다. 배와 육지 간에 짐을 내리고 싣는 일이 필요해졌다. 부두노동(하역)의 시발이었다.

 

1년 365일 부두에서의 일거리가 넘쳐나는 인천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까이서 멀리서 남부여대(男負女戴), ‘인천 드림’을 향한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두노동은 대부분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하는 일에 따라 하륙군(화물을 선박에 싣고 내림), 두량군(미곡의 분량을 계량하고 포장), 칠통군(선박과 부두 사이에서 화물을 싣고 내림), 지계군(육상에서 화물 운반) 등으로 나뉘었고 이들은 통칭 모군(募軍)이라 불렸다.

 

전혀 조직적이지도, 숙련되지도 못했던 이 일꾼들을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한 기구가 생긴 게 1887년이다. 화도진 별장 겸 인천 경무감이었던 김광신이 중구 내동 167번지에 ‘경기청’과 ‘영남청’을 설치했다. 경기청은 하역업, 영남청은 각각 두량업을 맡다가 1902년 ‘응신청(應信廳, 일명 모군청)’으로 통합됐다.

 

직업소개와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향토사학자 최성연(1914~2000) 선생은 그의 책 ‘개항과 양관역정’에 ‘막대하게 소요되던 노동력을 공급하고 구전을 받았으며, 노동자들의 합숙소를 겸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고 응신청의 역할을 썼다.

 

1910년 강제병합과 함께 응신청은 해체됐고, 이후 인천항 하역은 해방 때까지 두 개의 일본인 회사가 거의 독점하고 ‘조(組)’라는 한국인 노동자 집합형태의 조직이 화주와 직접 거래하는 형식으로 맡아 하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조는 노동조합 비슷한 형태이면서 오늘날의 하역회사 역할의 일부까지도 했다.

 

해방 이후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미군 물자는 인천항에 최고의 호황을 안겼다. 곡물과 식료품, 목재, 석탄, 석유, 시멘트, 밀가루 등이 매일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때 인천항 하역노동자 수가 1만 명을 웃돌고, 한 달에 뿌려지는 노임만도 당시 돈으로 무려 1억 원을 넘어 월급날이면 항만 일대가 온통 흥청거리기도 했다.

 

당연히 관련 산업들도 활기를 띠었다. 이러한 가운데 하역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나 지속되는 과도한 호황은 업체의 난립을 초래했고, 갈등과 반목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인천상공회의소가 항만하역협회를 만들어 질서를 잡아보려 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성과 소멸, 통폐합을 되풀이하던 하역업계는 196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적극적인 대외무역정책에 힘입어 물량이 늘어나면서 다시 한번 호황기를 맞는다.

 

현재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 하역회사는 우련통운과 선광, 영진공사다. 이들은 흔히 ‘하역3사’로 불린다. 우련은 1945년 청구양행으로 설립된 뒤 1958년 우련통운으로, 1948년 창업한 선광은 1961년 법인으로 각각 바뀌었다. 영진은 이들보다 10여 년 늦게 탄생했다. 모두 60~70여 년의 업력을 자랑하는, 항만뿐 아니라 인천경제의 산증인이자 인천시민의 자부심이다.

 

이들 가운데 막내격인 영진공사는 1961년 4월 15일 지금은 작고한 이기성·기상씨 형제분이 세웠다. 앞서도 언급했듯 당시는 하역업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영진은 업계에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 본격적인 외항시대를 열었고 1977년 바레인에 진출, 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과의 국교 수립 이전인 1991년 한중카페리 하역에 참여했는가 하면 2005년에는 국제복합운송주선업종의 자회사를 설립해 러시아와 몽골에까지 영업망을 확대했다. 또 중국 칭다오에 국제물류단지를 조성, 운영하는 등 종합물류회사로 착실히 자리매김해왔다.

 

특히 2016년 타계한 이기상 회장은 반 세기 동안 인천항을 지켜온 주역이자 인천의 어른으로, 그 단아했던 모습과 함께 여전히 많은 시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평소 “바다산업과 항만 발전 없이는 인천의 미래도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고인이 경제와 사회, 체육, 지방의회 등 다방면에 걸쳐 남긴 족적은 많은 후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올해로 창사 60년을 맞은 영진공사에 요즘 지역사회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경영권 다툼 조짐 때문이다. 최근 보도는 사모펀드 운용사 에이비즈파트너스가 영진의 2대 주주로 올라섰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강우 부회장 측 지분을 확보한 이 회사는 적극적인 경영권 개입의사를 밝혔고, 최근 영진이 실시한 유상증자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무효소송 등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이 갑작스런 것은 아니다. 이기상 회장 재임 말기부터 영진의 ‘후일’을 걱정하는 말이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나돈 바 있고, 이 회장 작고 뒤 사촌지간인 이강신 회장과 이강우 부회장 간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관련 각종 ‘설’과 ‘루머’들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기도 했다.

 

즉 결국 터질 게 터진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에이비즈파트너스가 “2대 주주의 권리를 활용해 구매 등 여러 분야에서 정상적이고 투명한 프로세스를 안착시키겠다”고 분명히 밝힌데다 사모투자펀드의 속성을 감안할 때 경영권을 둘러싼 양 측의 힘겨루기는 거칠고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어떤 결과로 귀착되는 과정에 무슨 일들이 생길 지, 많은 시민들이 우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혜를 모아 순기능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회사와 인천항과 인천시민의 자부심 모두를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 이인수·인천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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