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불온한 영화를 위하여 / 오동진 지음 / 썰물과밀물 / 440쪽 / 1만6200원 영화는 감독이 어떤 의도로 제작을 하든 관람하는 개인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또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누구는 영화를 단순한 유희 따위로 취급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기도 한다. 심지어 한편의 영화로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영화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관객의 몫이며 감독은 자신의 의도를 관객에게 강요할 수 없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신간 '불온한 영화를 위하여'는 제목만 보면 나쁜 영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책일거라 판단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구별하는 책이 아니다. '불온한 영화를 위하여'는 오랜 시간 영화 평론가로서 글을 써 온 오동진 평론가가 영화 속 감독이 숨겨놓은 숨은 그림을 찾아 현시대에 비춰 발견한 그의 남다른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작가는 지난 2년간 봤던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비틀어진 현대 사회의 민낯과 봉건적 사고에 갇힌 사람들의 고정관념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자본주의적 번영과 풍요 속에 살면서도 오히려 결핍과 빈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는 오랜 시간 기자와 평론가로서 남다른 시각으로 영화 속 숨겨진 언어를 찾아 여러 매체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해 왔다. 예를 들어 영화 ‘다음 소희’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집으며 시대는 변했지만 여전히 다른 형태로 사람을 소외시키는 21세기형 노동 소외에 대해 논한다. 해외 영화 ‘패닉 런’을 얘기하면서는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가 테러의 현장으로 돌변해 안전지대가 없는 ‘위험사회’에 대해 경고한다. 또 영화 ‘카터’는 영화 자체보다 거대 자본 넷플릭스가 종 다양성을 해쳐 영화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평론가인 그에게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단순히 보는 차원을 넘어 탐독의 대상이 됐다. 이 책은 그가 지난 2년간 본 영화를 평론한 수많은 글 중 일부를 담고 있다. 평론가로서 4권의 영화 평론서와 영화 여행 에세이 1권을 낸 그는 자신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영화라는 전선에서 힘겹게 싸워온 동지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에게 영화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자식과 같은 존재란 뜻일 것이다. 그는 자기 글의 기초를 끊임없이 ‘시대정신’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것이 없이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는 평론가 오동진. 이 책의 제목이 굳이 ‘불온한 영화를 위하여’가 된 이유도 바로 ‘오동진의 시대정신’이 이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
‘계시록’은 넷플릭스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연상호의 신작 영화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연상호가 왜 이렇게 ‘정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상력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냈을까,가 하나이고(원작 웹툰은 연상호와 최규석의 공동저작이다. 아마도 연상호가 스토리를, 최규석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하나는 도대체 멕시코의 대표적인 감독 알폰소 쿠아론(‘그래비티’, ‘로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 수상했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영화의 기획에 참여했을까 라는 점이다. 뒤의 것은 특히 연상호가 인터뷰를 통해 직접 밝히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는 내용이다.(공식 인터뷰는 24일 있을 예정으로 이 글은 그 전에 작성된 것이다.) 영화 ‘계시록’은 연상호의 유명 드라마인 ‘지옥’ 시리즈나 ‘방법’같은 작품과는 다른 선상에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지옥의 사자가 나오고 ‘방법’에서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 살인을 저지른다. 극단의 상상력의 캐릭터를 앞세운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이번 ‘계시록’은 그보다는 현실 세계에 좀더 발을 붙이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중들에게 다소 외면받았던, 연상호의 저주받은 걸작에 해당하는, ‘염력’이란 영화에 더 가깝게 서 있는 작품이다. ‘염력’은 이른바 용산사태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 같은 내용이었다. 무자비한 철거 전쟁에서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다면 차라리 염력을 쓰는 남자가 있었어야 한다는, 연상호 특유의 사회적 상상력과 인간적 고민이 개입된 작품이었다. 이번 영화 ‘계시록’도 같은 선상에 있다. 폭력성이 내면화 될 대로 내면화 돼 있어서 어떻게 손 쓸 재간이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연상호는 그 나름대로의 치유책, 치료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사회의식을 한층 더 개입시키고 발전시킨 작품이다. 지옥의 사자나 좀비 같은 캐릭터의 도발성을 없앴지만 사회의식 면에서는 자신이 더욱 도발적인 면을 지니게 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시록은 요한 묵시록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의 마지막 권이며 총 22장 22절로 돼있다. 사도 요한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규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믿음을 저버리면 7년 환난 등이 도래할 것이라는, 다소 무섭고 위협적인 내용으로 돼있다. 흔히들 성경의 종말론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교파, 특히 이단들은 이를 예수 재림의 근거로 삼으며 기행과 비행을 일삼는 ‘말씀’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화 ‘계시록’은 제목만으로도 한국 교회’들’의 비이성적 상황을 설정으로 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요 인물은 세 명이다. 경기도 무산이라는 곳(가상의 공간이다.)에서 개척교회를 일구고 있는 목사 성민찬(류준열)이 있다. 여기에다, 여자나 여아를 유괴납치해 학대를 일삼는 이상성격의 범죄자 권양래(신민재)가 성민찬과 얽힌다. 형사 이연희(신현빈)는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 이연주(한지현)를 권양래에게 잃었다. 이연주는, 권양래에게서 간신히 탈출했지만 법원이 그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외눈박이 귀신’에게서 정신을 지배받고 있다는 정신과 의사(김도영)의 법정 진술에 따라 가벼운 형을 언도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언니 이연희 경위는 복수심에 강력반에 지원을 한다. 그녀는 권양래의 뒤를 좇고, 캐고 있는 중이다.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벌어진다. 권양래는 범죄 욕구가 다시 도진다. 그는 중학생인 신아영(김보민)의 뒤를 좇아 오다가 교회까지 오게 되고 목사 성민찬의 눈에 띄게 된다. 성민찬은 그가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성민찬의 아내는 목사 부인임에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성민찬도 그걸 알고 있다. 성민찬은 무산시에 들어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직을 노리고 있어서 아내의 간음 행위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동창 모임이 있다며 불륜남을 만나러 나가고 그날 저녁 아이가 사라진다. 성민찬은 그것이 권양래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추적하다가 천일산 여우고개라는 길목에서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 영화의 드라마는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성민찬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경사 이연희는 권양래를 체포해 없어진 중학생 아이 아영의 행방을 찾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환각 속에 나타나는 죽은 동생 연주의 명령대로 가차없이 그를 죽이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 둘과 맞닥뜨리게 되는 권양래는 스스럼없이 둘 다를 향해 자신보다 더 미친 인간이라고 소리지른다. 권양래가 외눈박이 괴물에 시달리는 것과 목사 성민찬이 모든 것을 하늘의 계시라고 부르짖는 것, 형사 이연희가 환각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은 모두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다.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성격의 이상질환이다. 그 모든 것은 개개인 스스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핑계나 해법을 위해 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잘못된 확신이며 유괴범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목사가 하느님을 내세워 혹세무민 하려는 것, 형사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같은 소행이다. 연상호의 영화 ‘계시록’이 보여주려는 주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연상호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갖가지 이상 징후에 시달리고 있고 그 원인은 개개인 모두 스스로의 환각과 광적인 확신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가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스토리가 다소 극단적으로 포장돼 있지만 연상호가 내리는 진단의 요체는 꽤나 명징한 셈이다. 연상호의 기독교 비판은 일관적이다. 그건 ‘지옥’같은 드라마에서도 두텁게 제기됐던 부분이다. 연상호는 기독교가 사람들을 광적으로 만들고, 잘못된 확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타락의 최극단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순전히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 신도들을 모으고 결국 대형화의 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여전하다. 이번 ‘계시록’ 또한 그 같은 자신의 기독교관을 여지 없이, 과감하게 개진하고 있다. 교회는 위선적이고 타락했다. 연상호가 그려내는 공간 또한 늘, 한국사회만큼 불안하고 불길하기 그지 없다는 것 역시 특징 중 하나이다. 비가 자주 내리고 음습한 산길의 구부러진 길이 종종 부감 쇼트로 보여진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그것이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시점 쇼트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폐건물, 남루한 골목길, 영세민의 집안 풍경 등 연상호가 그리는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비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영화 ‘계시록’이 묵시록이자 종말론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인 양 지금의 우리사회가 매우 어두운 지경과 그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려 애쓴다. 무섭고 끔찍하며 잔혹한 이미지와 서사를 즐겨 사용함으로써 호러 장르 감독의 카테고리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는 연상호는 이번 ‘계시록’에서만큼은 그다지 무섭지 않게 그려낸다. 물리적 폭력이 즐비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안의 내면은, 과할 만큼 불길하다.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극단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그런 생각이나 이념, 종교에 사로잡히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상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번 ‘계시록’은 그 어떤 작품보다 한국사회에 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의미성 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 때문에 영화가 다소 재미가 없어졌거나 연상호 특유의 감각이 떨어졌다거나, 기이한 ‘글로벌 표준율’같은 작품이 됐다거나 하는 지적은 있을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지옥’의 연상호보다 이번 ‘계시록’의 연상호를 더 지지하게 된다. 넷플릭스에 지난 3월21일 공개됐다. 아직 글로벌 순위에서는 그리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다. 호불호가 크게 엇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세상에서 위험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연대와 포용의 적이다. 영화 ’콘클라베’에 나오는 이 대사는 지금의 우리사회에 있어 진실로 귀담아들어야 할 경구이다. 이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그릇된’ 확신이라는 말이 된다. 한국의 선관위를 중국과 북한의 해커들이 조종하고 있다는 음모론, 대한민국에 현재 반국가세력, 종북 빨갱이들이 판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등이 그것이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지난 서부지법 난동 사태에서 확인한 바 있다. 폭동을 일으킨 주범 젊은이들에게 정신교육으로 ‘콘클라베’를 감상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대(大)감독 스탠리 큐브릭(1928~1998)은 자신의 1971년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청년 알렉스(말콤 맥도웰)에게 루도비코라는 갱생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사지를 의자에 묶어 놓고 눈을 감지 못하도록 눈꺼풀에 장치를 해놓은 채 역사 영화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일종의 세뇌이다. 한국에서 요즘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극우 파시스트들을 보면 이렇게라도 강제적으로 의식을 개조하고 싶게 만든다. 극단은 극단을 낳는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은 상상도 해선 안 된다. 하루빨리 사회가 정상화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 지금의 한국이 1918년에서 1933년까지 꽃피웠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를 닮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일이다.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는 늙고 무능한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수상이 됐고 그가 죽자마자 총통 자리를 거머쥔다. 히틀러의 선동 정치는 극단적 민족주의, 반마르크스주의, 반유대주의에 기초했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 중심의 민족주의, 반국가세력을 일소해야 한다는 新반공주의, 반유대주의에 버금가는 반중주의에 모아진다. 히틀러는 뮌헨의 한 비어 홀에서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실패한 후 잠시 투옥됐다가 석방됐으며 이후엔 쿠테타 대신 군중 선동정치를 강화하고 나치당을 전국에 확대했다. 동시에 당 내부의 명령체계를 강제하면서 독재자의 위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윤석열도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히틀러의 우중을 이용한 선동정치는 그에게 총선에서 1130만 표라는 공고한 위상을 점하게 했다. 히틀러는 군사력이 아니라 우민들의 표로 집권한 것이다. 그건 윤석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한국 상황을 바이마르 시대의 몰락과 지나치게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역사를 통틀어 독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했던 공화국으로 그 이상이 실현되기는커녕 역사의 최암흑기를 여는 데 일조했다. 바이마르 시대에 나왔던 예술품, 예술가들은 아직까지도 칭송 일변도이다. 건축학교 바우하우스를 만든 발터 그로피우스가 이때 사람이며 연극이론가 베르톨트 브레이트, 작가 토마스, 만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막스 라인하르트 등이 모두 이 시대에 활동했던 아티스트들이다. 마치 지금의 한국에서 한강 작가와 박찬욱, 홍상수, 봉준호 같은 영화감독 그리고 로제와 BTS, 블랙핑크 같은 세계적 가수들처럼. 역사는 종종 반복된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잘 들여다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바로 그게 부족하다. 그 점이 걱정이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조 샐다나)에 빛나는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 젠더에 대한 얘기이다. 이런 소재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낯설고 기괴한 이야기일 수 있다. 게다가 배경은 멕시코이다. 이국적이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국내에서는 어떨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두 가지 점에서 그 ‘전이(trans)’의 욕망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성 전환을 넘어서 트랜스 휴먼, 곧 인간 변이까지를 꿈꾼다는 점이다. 주인공 델 몬테(칼라 소피아 가스콘 1인2역)는 멕시코에서 가장 잔혹한 마약 카르텔의 두목이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 해도 사람들은 심장이 떨려 혼비백산할 정도이다. 그는 애초에 얼굴이 알려져 있지도 않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를 부른다. 리타는 악덕 로펌에서 일하며 먹고 살기 위해 정의에 눈감고 돈이 되는 사건만을 좇아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적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는 참이다. 얼마 전에도 아내를 때려서 살해한 한 부호 남자의 변호를 맡았으며 증인을 검시관을 매수해 사건을 뒤집기까지 했다. 그런 리타를 델 몬테 부하들이 두겁을 뒤집어 씌워 납치한다. 리타는 그간 델 몬테의 돈 세탁 같은 ‘잡일’을 도왔으나 이번만큼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다. 리타는 곧 델 몬테의 완벽한 신분 세탁, 곧 여성으로 성 전환을 한 이후에 발생할 모든 법적 사회적 문제를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당연히 막대한 돈을 받는다. 그녀는 다니던 로펌을 때려 치우고 델 몬테가 스위스에서 수술 후 오랜 치료를 받는 동안 자신 역시 런던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으려 한다. 인간이 성을 바꾸면 본질도 바뀌게 되는가. 외형이 바뀌면 성정이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자신 안에 갖고 있던 여성성이 수술까지 결심하게 한 것일까. 그 앞 뒤 전후의 요인은 과연 어떤 것이 정답인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들을 가차 없이 잔혹하게 살해해 온 델 몬테가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여성성이 있음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또 언제부턴가 그 모든 ‘악마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라이벌 세력이나 경찰의 눈을 피하는, 도피와 은둔을 목적으로 성전환 수술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특히 남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제거하는 수술까지 감행하지는 못한다. 남자에게 있어 ‘거세 공포증’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델 몬테는 에밀리아 페레즈(카를로 소피아 가스콘)로 거듭난 후 작정한 듯 자신을 완벽하게 변이시키는 데 성공한다. 델 몬테는 이제 돈이 많은, 풍만하고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한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가 주력하는 또 다른 전이의 욕망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것이다. 서사가 지닌 흐름만으로 짐작하기에 이 영화의 장르는 갱스터 무비이다. 물론 델 몬테가 나오는 장면은 그렇다. 그러나 또 한번 놀랍게도 영화는 뮤지컬이다. 노래 장면으로 전편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주요 장면 모두가 출연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으로 주인공 에밀리아 페레즈가 자신이 몰래 버린(수술을 하느라) 아내 제시(셀레나 고메즈)와 두 아이들을 되찾아 가정을 복원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가족영화이기도 하다. 페레즈는 중간에 자신이 ‘묻어 버린(살해를 지시한)’ 라이벌 갱단 조직원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육체 관계까지 맺는다. 둘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영화는 러브 스토리로까지 나아 간다. 갱스터 영화에서 뮤지컬 영화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다소 무리하다 싶을 만큼 이야기의 중심을 향해 횡단과 종단을 오간다. 영화를 연출한 프랑스의 유명감독 자크 오디아르(‘러스트 앤 본’ “예언자’ ‘파리, 13구역’ 등)의 목표는 모든 장르를 뒤섞어, 인공적으로 완전히 다른 장르를 만든 후(마치 성전환 수술을 하듯) 매우 새로운 느낌의 영화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모든 뮤지컬 영화가 그렇듯이 ‘에밀리아 페레즈’도 놀라우리 만큼 인공적이다. 당연히 작위적이다. 사람이 대화를 하다 말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춤을 춘다. 전통적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색해 할 만 하다. 그런 장면들을 이어 가다 보니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촬영과 조명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장면 하나하나가 뮤지컬 무대에서 잘 연습된, 배우들의 군무를 보는 느낌을 준다. 배우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마치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보는 느낌마저 준다. 그렇다면 자크 오디아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화적 전환을 넘어 변이까지도 이루어 냈는가. 일부는 그렇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왜 이 영화가 뮤지컬적인 요소까지 결합했는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오디아르의 영화적 실험이 꽤나 놀랍고 신선하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오디아르는 적어도, 영화가 계속 새로운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그 진보성을 입증해 내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숀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가 너무 강세였고, 결국 주연상은 26살의 신예 마이키 매드슨에게 돌아갔다.) 사실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충분히 주연상을 탈만 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가스콘은 이 영화에 나오기 전 카를로스 가스콘에서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으로, 그러니까 남성에서 여성이 됐다. 한번 여성이 된 사람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도 자신에게 잔재처럼 남아 있는 남성성을 제거하려 애쓴다. 그러나 가스콘은 이번 영화에 나오면서 턱 수염과 얼굴 근육의 특수 분장을 통해 다시 델 몬테라는 남자로 변신한다. 사전 정보가 충분치 않다면 이 둘을 같은 여자, 혹은 같은 남자였던 사람으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다. 충분히 주연상 감이었지만 SNS에 올린 인종 및 민족 차별적 발언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사람들은 가스콘이 성소수자인 만큼 그녀의 차별 의식에 반기를 들었고 그게 그녀로 하여금 수상권에서 멀어지게 했다. 자크 오디아르가 이루려 했던 영화의 전이, 세상의 전이를 불가능하게 한 요소는 한 개인의 그릇된 판단에서 나왔다. 아이러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인공적이고 그래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지만 재미있고 격렬하며 섹시한 영화이다. 감독상을 수상한 숀 베이커의 말처럼 ‘극장에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영화’이며 TV 수상기가 아무리 크게 나온다 한들 이건 극장에서 봐야 할, 전통적 극장주의의 작품이다. 조연상을 받은 조 샐다나의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는 드라마 연기에서 노래와 춤 연기까지 영화를 온통 휘젓고 다닌다. 배우란 이런 것이다라는 점을 보여 준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고매한 성취를 보여 준다. 적어도 이제 우리에게 트랜스 젠더의 존재는 더 이상 부자연스럽지 않게 느끼게 한다. 그게 정말 어디인가.
감독 김대현이 만들고 송귀철 주연(아역 송정빈)의 영화 ‘정돌이’는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이다. 정돌이는 고려대 정경대 건물, 정경관에서 10대 시절을 노숙하며 보냈던 송귀철씨의 별칭이었다. 정경대 아이라는 것이다. 그는 14살 때 집을 나왔는데 그건 어머니가 그에게 500원을 쥐어 주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어린 나이에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이 아이는 집을 나와 청량리를 배회하다가 행정학과 3학년에 다니던 서정만을 만나게 되고 그의 손에 이끌려 고려대 안으로 들어 오게 된다. 서정만은 시위 주동자로 몰려 도피 생활중이었다. 그는 청량리 만화방을 전전하던 중이었다. 정돌이가 정돌이가 된 것은 이 만남이 계기가 됐다. 정돌이는 87년 형 누나들에게 농악을 배워 1992년 필봉농악을 배우기 위해 전라도의 한 지역으로 옮기기까지 5년간 고대 캠퍼스 안에서 풍찬노숙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정돌이를 놓고 정경대와 사범대가 양육권 다툼이 벌어진다는 농담이 오갔을 만큼 이 아이는 고대 운동권의 마스코트가 됐다. 한때 정돌이였던 송귀철은 현재 ‘사물놀이 미르’ 대표이다. 영화 ‘정돌이’는 저항과 연대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영화는 정돌이라는 극적인 인물의 생애를 담는 척 사실은 84년 학번을 중심으로 한창의 고대운동권이 형성된 1987년 전후의 학생민주화 시위의 역사를 추적한다. 광주에서 저지른 전두환 학살 사건이 어떻게 광주민중항쟁으로 승화되고 서울대 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한국의 사회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자기희생을 감행해 나갔는지가 펼쳐진다. 다 아는 얘기지만 새삼 새롭다. 그 사이사이 전개됐던 소위 5.3인천 사태, 건대 사태, 전두환의 호헌 철폐를 위해 벌어졌던 6.10 항쟁 등 실로 뜨거웠던 역사의 기록들을 이어 나간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이른바 386 세대들조차 "우리에게 과연 저런 일들이 있었는가"라는 기시감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한때나마 사회민주화를 위한 가열차고 영웅의 시대가 있었는가를 다소 참담하고 자괴스런 느낌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정돌이, 송귀철 씨가 현재의 삶을 이루게 된 데는 정경관에 머물고 숙식을 하면서 그 건너편 학생회관에 있었던 탈사랑우리회, 고대 농악대와 접촉하게 되면서이다. 그는 여기서 장구를 배웠고 지금은 장구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송귀철이란 사람의 인생유전은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영화 ‘정돌이’는 민주화 투쟁과 정돌이의 성장 과정을 오가며 당시의 시대가 만들었던 역사적 정당성, 그 진심을 알리려 애쓴다. 정돌이는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솟아올랐던 전국 시위에 형 누나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한 인간의 정치의식이란 것이 사실은 (거대한 철학 이론에서가 아니라) 얼마나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산증인 같은 사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 ‘정돌이’는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건 어쩌면 고대 운동권 학생들만의 얘기일 수 있고, 때문에 너무 특수한 얘기라는 취약성을 지니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봐서는 고려대가 아닌 다른 전국 대학의 운동권 출신들이 이 영화에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으며 그 차원을 넘어서서 1980년대의 한국 역사를 고려대라는 캠퍼스에만 가둬 놓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대현의 연출은 그 같은 약점을 잘 간파했던 듯이 보인다. 특수가 보편을 만들고 보편이 특수를 만든다는 변증 이론이 영화 곳곳에서 전개된다. 정돌이란 인물에서 당시 학생운동가들에 대한 인터뷰가 빈번하게 교차편집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돌이, 곧 송귀철은 자신의 기억으로 80년대를 증언하고 서정만, 김영남, 이윤경, 손병휘, 안태용, 양창욱, 노충관, 임혜숙, 이준영, 강신 등등 다양한 인터뷰어들은 각자 자신이 경험했던 당시 시대에 대한 ‘사회적’ 진술을 이어 나간다. 이들의 증언은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지점으로까지 확대된다. 정돌이는 사회의식화가 된 인물로 성장했으며(스스로도 중간에는 자신이 투사가 됐었다고 말한다) 운동권 학생들은 어느덧 늙고 평범한 중년들로 사회에 녹아들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보편에서 특수로, 그럼으로써 영화는 그 시대에 대한 총체성을 이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연출의 고뇌는 충분히 평가할 가치가 높다. 미국의 1960년~1970년대도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학생운동가 톰 헤이든은 격렬한 청춘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제도권 변호사로 안착했으며 제리 루빈이나 에비 호프먼 같은 사회주의적 운동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삶도 이후에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변질됐다. 할리우드는 그 얘기들을 숱한 극영화로 만들어 왔다. 아론 소킨의 ‘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7’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고대 학생 운동권의 이야기, 나아가 한국의 학생운동가들의 이야기,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화 투쟁의 이야기는 풍부한 드라마, 극영화로 선뜻 만들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사실과 진실의 규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도 많으며 여전히 그에 대한 반동적이고 반민주적 행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정돌이’는 시의적절한 시기에 개봉이 됐다. 소수이긴 하지만 비교적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계엄령 소동 이후 서부지법을 침탈한 난동세력의 젊은이들 모습을 보면서 1980년대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때를 진실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언제든 환영받고, 공유되며 그럼으로써 새롭고 역사적인 ‘의식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정돌이’는 정돌이란 인물을 찾아서 긴 여정을 탐색하다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되짚어 가고, 지금과 같은 왜곡의 시대에 그때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프로퍼간다(선전선동)' 영화인 듯 보이지만 흔한 프로퍼간다 작품들과는 달리 인간미와 함께, 시대에 대한 진정성이 녹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영화 ‘정돌이’에는 고인이 된 인물들에 대한 기억과 회고가 많이 이어진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故 김두황의 경우 강제징집, 곧 강제로 군에 입대한 후 사망을 했고 군에서는 자살로 처리했지만 수많은 의혹이 규명되지 않아 여전히 의문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영화 ‘정돌이’는 수많은 죽음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할애하고 있다. 미국의 노동운동가이자 기자였던 존 리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쥬를 썼고 1920년 내전에 휩싸인 혼란의 소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얘기를 다룬 워렌 비티의 영화 ‘레드’는 오프닝에서 8,90대의 늙은 노인들, 부부들을 인터뷰 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실제로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존 리드와 함께 미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 “우리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나? 그런 날들이 있었다고들 말들은 해? 우린 이제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영화 ‘정돌이’를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 영화 ‘레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에게 80년대가 있었던가.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희생됐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 그 시절이 몽땅 부정되고 있는 듯한 지금의 시대에 영화 ‘정돌이’는 우회적으로 그 정치적 망각을 질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의 2,30대 젊은이들이 봐야 할 절실한 작품이지만 그것도 한편의 생각일 뿐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결코 안녕치 않은 것은 그때문이다. 지난 2월12일에 개봉됐으며 전국의 작은 극장을 순회하며 상영중이다.
어줍잖게 영화를 제작하겠다며 나다닐 때 만든 영화가 김새론 주연의 ‘바비’이다. 한국에서 가장 별종 영화감독인 이상우(‘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 ‘나는 쓰레기다’ 등 일명 쓰레기 3부작이 그의 주요 작품이다)가 만들었고 김새론은 여기서 친동생 김아론과 각각 순영, 순자 역할로 나온다. 순영은 거리에서 핸드폰 고리 품팔이로 살아 가는데 철없는 여동생 순자는 고사하고 지적 장애인인 아버지를 돌보느라 어린 삶이 고단하기 짝이 없다. 악마 같은 작은 아빠, 곧 삼촌은 돈을 받고 순영을, 바비 인형같이 생긴 미국 소녀에게 줄 심장이식 수술을 시키러 내보내려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영은 미국 가면 바비 인형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꼬드김에 그렇다면 자기보다 동생을 보내 달라 부탁한다. 비극이다. 2012년 작품이고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김새론이 11살 때였다. 김새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4살이다. 영화 ‘아저씨’로 급부상했었다. 8살의 아역 스타였다. 대체로 아역 스타들은 성장통을 겪는다. 그들 중 일부에게서는 술과 애정 스캔들이 터지기도 한다. 갑작스럽게 스타가 된 경우 대체로 그 부담감을 견디지 못한다. 언제 급전직하 인기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김새론이 그랬다. 그럼에도 ‘도희야’같은 영화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러다 2022년에 음주 사고를 냈다. 주변 시설을 들이받았다.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사고 후 차를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뺑소니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지난 3년간 김새론의 연기 인생은 바닥을 쳤다. 거의 모든 방송의 출연이 중지됐다. 출연한 드라마의 상당 부분도 통편집됐다. 무엇보다 악플과 지나친 사생활 노출에 시달려야 했다. 음주운전자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결국 그 모든 상황이 젊은 여배우를 자살로 내 몬 형국이 됐다. 버닝썬 사건이나 서부지법 난동사건 같은, 천인공노할 사건의 가담자들은 두고두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 재범을 저지를 가능성 여부를 신중하게 관찰하고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연예인들의 일탈에 대해서는 다소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잘 만든 영화를 망하게 한다든지(<보통의 가족>) 연예인 가족의 문제로 영화에 대한 비호감을 확산시킨다든지(<대가족>) 조강지처를 버린 배우라며 인신공격을 해댄다든지 가정이 있는 중견 감독과 비관습적 삶을 살아 가는 여배우인 탓에 매번 악플에 시달리게 한다든지 등등은 아무리 봐도 과도한 측면이 있다. 다시는 이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격리해야 할 범죄’가 있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줘야 할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 둘을 구분해야 한다. 악플과 조회수를 위해 한 인간을 괴롭히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우리사회가 이제 그 정도의 간별력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상계엄이라는 초헌법적 범죄를 저지른 자, 사회 최고의 권위를 지켜줘야 할 법원에 들어가 폭동을 일으킨 자, 예수의 이름으로 혹세무민을 하며 치부와 탈세를 일삼는 일부 기독교 목사들에 비해 김새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범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실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얼마 전 타계한 전설의 감독 데이빗 린치(LA 산불이 원인이었다)의, 역시 전설적인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3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더라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사람들의 지력도 높아져서 영화의 내용 중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비현실인지를 구분할 수는 있을 정도가 된다. 영화가 얘기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실제로 벌어졌고 어떤 것이 벌어지지 않은 일인가.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이 정말 필요하냐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곧 멀홀랜드 도로는 할리우드 블로바드(대로) 혹은 선셋 블로바드 같은 LA의 주요 거점에서 휴양지인 산타 모니카로 넘어 가는 능선 도로 길이다. 비교적 위험한 산길 도로이고 그 아래 가파른 비탈에는 영어로 할리우드 알파벳 입간판이 크게 설치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으며 그곳에서 LA 도시 전경과 그 너머의 태평양 바다를 볼 수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전망대에서 보는 LA의 야경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필름 누아르(film noir)나 미스터리 영화에서 많이 쓰인다. 추적 씬, 비밀스러운 만남, 돈 거래, 정부와의 밀회 등등이 다 이곳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찍힌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이야기, 서사의 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일단 캐나다 온타리오 딥 리버에서 온 배우 지망생 베티(나오미 왓츠)가 LA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베티는 고모이자 할리우드 배우인 루스의 비벌리 힐스 집에 머물 예정이다. 당연히 베티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녀는 중간에 누군가에게 끌려가 대형 세트장에서 진행되는 오디션 현장을 구경하게 된다. 거기서 나오는 노래가 린다 스콧이 부르는 ‘내가 모든 별들에게 얘기했지(I’ve told every star)’일 정도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비 스타가 되거나 연기파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티는 고모 집으로 온 첫 날부터 이상한 일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이 리타라고 하는 여자(로라 엘레나 해링)가 샤워를 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리타라고 하는 이름도 여자가 벽에 걸려 있는 리타 헤이워드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문득 생각한 것이어서 진짜는 아니다.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한다는 리타의 지갑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 있다. 돈에는 피가 묻어 있다. 그녀는 차 사고가 났다고 한다. 다음 날 베티는 리타를 데리고 패스트 푸드 점인 윙키스(Wimkie’s)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리타는 웨이트리스의 이름표를 보다가 자신의 본명이 다이안 셀윈이라는 걸 기억해 낸다. 두 여자는 전화번호부에서 다이안 셀윈의 주소를 알아내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지만 놀랍게도 부패되고 있는 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리타인지 다이안인지, 미스터리 여인은 시체를 본 후 머리를 자른다. 그녀는 가발을 쓰고 금발 행세를 한다. 베티는 그런 그녀와 섹스를 한다. 베티와 자던 리타는 잠꼬대를 하는데, 계속 ‘실렌시오’ ‘노 아이 반다’라고 중얼거린다. ‘노 아이 반다’는 ‘밴드는 없다’라는 뜻이다. 이야기의 또 한 축은 아담 캐셔라고 부르는 영화 속 영화감독(저스틴 셔룩스)이 겪는 일이다. 그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갱단인 카스틸리아네 형제에게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담 캐셔는 또 제작자와 매니저로부터 캐스팅 압력을 받고 있는데 본인이 그다지 마땅지 않게 여기는 여배우 카멜라 로즈를 기용해야 할 참이다. 그는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후 집으로 간다. 집에는 아내가 수영장 관리를 하는 남자와 동침을 하고 있다. 아담은 아내의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집을 나온다. 한편 베티는 할리우드의 한 제작사에 들러 오디션을 보고 만족해서 나오지만 다른 여배우에게 이끌려 한 촬영 현장에 가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아담 캐셔 감독이 촬영하는 곳이다. 거기서 베티는 카멜라 로즈라는 여배우를 보게 된다. 총 러닝 타임 140여 분, 그러니까 2시간 20여 분 중 2시간째에 이르면 모든 인물이 뒤죽박죽이 된다. 베티는 어느 덧 다이안으로 불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베티가 정작 다이안이라 불렀던 미스터리 여인은 카밀라가 돼 있다. 베티는 리타가 됐다가 다이안으로 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누구인가. 이것은 한명의 얘기인가 두명의 얘기인가. 이쯤되면 영화의 처음을 떠올려야 한다.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 영화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지르박을 추며 신나게 노는 장면을 보여 준다. 장면은 상당히 키치적이다. 유치한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 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컷으로 바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는 타이틀이 뜨고 곧 이 도로를 달려 가는 자동차를 보여 준다. 자동차 안에는 리타 혹은 다이안, 나중에는 카밀라라 불렸던 여인이 타고 있다. 여자가 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운전석의 남자가 돌아 보며 총을 겨눈다. 남자가 뒷 좌석 문을 열고 총을 쏘려는 순간 좀 전에 지르박을 추던 아이들이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과속으로 달리다 여자가 타고 있는 차와 충돌한다. 차는 거의 반파가 되는데 차에서 간신히 기어 나온 여자는 혼이 나간 모습으로 산 아래로 내려 와 어떤 집에 숨어 들어 가는데 그게 베티의 집, 베티 고모의 집이다. 이야기가 도무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모든 것을 정리해 준다. 물론 한번에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지만 누가 무슨 짓을 벌였고 누가 현재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게 해 준다. 이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 죽어가는 찰라의 순간에 떠 오른 파노라마의 기억이자 환상이다. 영화는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 실렌시오 클럽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 실렌시오는 리타=다이안이 베티와 자면서 잠꼬대로 중얼거린 말이다. 두 여자는 실렌시오 클럽에서 마술쇼와 스탠딩 코미디를 본다. 무대 진행자는 계속 떠든다. 노 아이 반다, 노 아이 반다. 밴드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녹음된 것입니다. 저는 불지 않는 트럼본 소리를 좋아 합니다. 그러면 트럼본 주자가 나와 녹음된 음악에 맞춰 립씽크로 연주를 한다. 유명 여가수 레베가 델 리오가 나와 졸란도(Llorando), 곧 크라잉(Crying)을 부르다 졸도를 하기도 한다. 실렌시오 클럽은 일종의 이 영화 자체를 암시하는 메타포이다. 모든 것은 녹음돼 있다. 모든 것은 연출된 것이다. 모든 것은 다 환상이다 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 데이빗 린치의 초현실주의적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의 스토리 텔링이 지니는 무한한 확장성, 그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 준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고 거짓을 진짜처럼 꾸밀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때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과 다름 아님을 보여 준다. 안젤라 바달라멘티의 음악은, 그의 음악이 린치 영화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 영화와 영화음악의 조합이 갖는 최고치를 보여 준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린치의 죽음을 추모하며 현재 국내에서 특별 상영중이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쓰려는 영화 ‘쇼잉 업’은 지난 1월 8일에 개봉해 2주를 못 버티고 전국에서 단 7,949명을 모은 채 종영됐다. 모두 1월 말 개봉을 위해 전쟁을 벌인 국내 영화들 때문이다. ‘검은 수녀들’ ‘히트맨2’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전국 스크린을 장악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정곡을 찌를 말이 없어서 하는 얘긴데, 다들 쓰레기들이다. 이런 독설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돈 벌려고 만든 영화들이니 만큼 저열한 평가를 받은 들 그리 신경 쓸 것까지는 없겠다. 자 어쨌든 그러하니, 이 영화 ‘쇼잉 업’은 이제 볼 수가 없다.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가 됐다. 한국의 극장가 현실은 영화를 읽게’만’ 만든다. 근데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영화 ‘쇼잉 업’에 대한 스포일러를 잔뜩 뿌려 놓을 것이다. 잘 안다. 스포일러에 과민한 사람일수록 영화를 오히려 더 안보는 사람이라는 걸. 이 글 ‘쇼잉 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OTT나 케이블TV에서 영화의 제목을 봤을 때는 이미 그 내용을 다 잊어 버렸을 것이기 때이기 때문이다. ‘쇼잉 업’을 두고 많은 기사들, 리뷰들은, 한 공방에서 조각가인 주인공이 일상을 보내는 얘기 정도로 정리한다. 잘못된 얘기이다. 이 영화에는 많은 에피소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찾고, 어떻게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 자신과 동일화 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영화 ‘쇼잉 업’은 그런 영화이다. 주인공은 리지(미셸 윌리엄스) 혼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리지와 리치이다. 리치는 리지가 키우는 고양이이다. 이 리치가 어느 날 비둘기를 해치려 했고 죽어 가던 비둘기를 옆집 사는 친구 조(홍 차우)가 구해낸다. 조는 주인공 리지에게 붕대를 감아 준 비둘기를 맡기며 아예 돌봐 달라고 한다. 친구 조는 당장 내일이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리지는 조의 쉐어 하우스에 월세를 내고 살고 있다. 조는 핸디우먼이다. 뭐든 잘 고친다. 리지는 조에게 매일같이 샤워기를 고쳐 달라고 한다. 더운 물이 안나오기 때문이다. 리지는 며칠 째 샤워를 하지 못했다. 리지는 조소가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을 작은 형상으로 조각하는 일을 한다. 그녀의 전시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리지는 조각하는 사람의 모티프를 자신이 일하는 교수 연구실 앞 마당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서 얻는다. 그들이 추는 춤의 주제는 ‘생각하는 몸’이다. 리지가 일하는 연구실의 교수는 실은 그녀의 엄마 진(마리안 플러킷)이다. 그녀의 남편이자 리지의 아버지 빌(주드 허쉬)은 한때 도예가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늙은 히피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리지의 오빠 션(존 마가로)은 천재적인 영감을 가진 작가였지만 지금은 그냥 미친 은둔자이다. 리지는 아빠 빌과 오빠 션의 현재를 걱정하며 엄마인 진에게 종종 의논을 하지만 엄마는 늘 그냥저냥한다. 너는 그냥 여기 있어. 엄마가 션에게 갔다 올께, 하고는 그녀를 끼지 못하게 한다. 리지는 곧 있을 전시에 온통 신경이 바짝 서 있고, 연구실에서 해야 할 잡일도 해야 하는데(그중 하나가 말린 헤이맨이라는 유리공예가의 전시 팜플렛을 디자인하는 일인데 이 여류 작가는 최근 유명 미학잡지인 ‘스컬프’지 표지에 나왔다.) 온수 샤워기 꼭지를 고치는 일로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조와 거의 싸우기 일보 직전이 된다. 날개를 다친 비둘기도 그녀의 걱정 맨 앞 줄에 놓여 있다. 켈리 라이카트라는 이름의, 결코 같이 한 이불 덮고 같이 살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여자 감독의 작품 ‘쇼잉 업’은 밖에서는 트럼프 같은 ‘정신 나간’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라는 변방의 나라에서는 계엄령이 터지든 나는 그림이나 그리고, 조각이나 하며, 유리공예나 하겠다는 사람의 얘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얘기를 거꾸로 하면 이렇다. 트럼프 같은 ‘미친’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 정치적 혼란기에 빠지든 말든 일상은 일상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인생은 인생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정치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들 광장에서 시위만으로 날을 지새울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는 농사를 짓고, 누구는 음식점을 해서 대중들에게 쉴 곳을 만들어 줘야 하며, 누구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 입에서 ‘와우’ 혹은 ‘원더풀’ 소리가 나오게 해야 한다. 누구는 그런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 2시간 가까이 세상의 다른 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영화 ‘쇼잉 업’은 그만큼 중요한 영화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예술가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만큼 영화는 내추럴 그 자체이다. 인공조명이 거의 없고 배우들도 분장을 하지 않는 거의 맨 얼굴이다.(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의상도 저런 스타일이라면 제작비가 들 리가 없겠다 싶을 정도이다. 이런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켈리 라이카트는 영화 속에 나오는 많은 미술작가들 만큼 ‘또라이’이다. 근데 그런 류의 사람들만이 이런 독창적인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 아마도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대체로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도무지 이 영화에 스토리라는 게 있기는 해?” 미친 천재 여성 켈리 라이카트 감독만큼 이렇게 돈도 안될 것 같은 영화에 제작비를 대고 투자배급비를 댄 ‘누군가’들도 대단한 인물들이다. 세상은, 적어도 영화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망하지 않고 간신히 버텨가고 있는 셈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세상을 불과 물로 망하게 하려고 할 때 너희들 중 열명의 의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걸 현실로 바꾸면 많은 예술가들이 세상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하는 주체들일 것이다. 영화 ‘쇼잉 업’을 보면 바로 그 점이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 20분은 주인공 리지의 전시회 장면이다. 영화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같이 모여서 나오는 장면이다. 리지의 작품들은 영화임에도, 진짜 좋다. 전시를 보러 온 아버지 빌이 작품을 보는 눈빛에서 그게 드러난다. 빌은 영화를 통해 전시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빌의 입에서는 줄곧 ‘예~(Ye)’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정말 작품이 좋다. 좋은 작품들은 작가들의 마음 속 폭풍우가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영화 끝에서야 알게 된다. 리지가 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친구 조와 말다툼을 벌이고 아빠 빌, 오빠 션 때문에 마음 졸이고, 고양이 리치한테 화를 내고, 비둘기에게 온통 신경을 쓴 끝에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저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세상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 역시 저 만큼의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 ‘쇼잉업’의 끝에 무릎을 치며 통각(痛覺)하게 되는 건 바로 그 부분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 전에 오프닝 씬만 30초 이상 느릿느릿하게 나오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매우 늦고 더디다. 그 호흡을 답답해 하지 말라. 이 영화는 그 느림에서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영화 ‘쇼잉 업’을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영화 속 비둘기도 잘 염두에 두기 바란다. 끝에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캐릭터이다.
한국의 정치상황에 가려서 그렇지 프랑스의 시국도 엄청나게 시끄러운 모양이다. 지난 해 마크 롱이 낙점한 중도 우파 성향의 미셸 바르니에 총리를 트로츠키 주의자 출신의 극좌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대표가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과 담합해 불신임안을 성사시켜 몰아 낸 것이다. 이들은 마크 롱 대통령의 퇴진까지 몰아 붙였지만 마크 롱은 다시 중도 우파인 프랑수아 바이루를 임명해 고비를 넘겼다. 나치즘을 옹호하는 마린 르 팽의 국민연합에 왜 사회주의자인 멜랑숑이 협조하는지, 이쯤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상황이다. 정치는 늘, ‘앞단의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만들어’ 전체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프랑스 경제난이 대중들의 불만을 고조 시키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모두 이민자 탓, 자국의 노동권을 훼손시킨 탓이라는 식의 마린 르 팽의 주장은 ‘앞 단을 흐리게 하는’ 선동일 뿐이다. 프랑스 경제난의 본질은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국 우선주의로 강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새 대통령 트럼프가 보란 듯이 그걸 실현하려 하고 있다. 이민자 억제, 계층 계급에 대한 차별적 경제 정책, 공공 복지의 약화, 부자 감세로 인한 자본의 양극화는 절대적으로 심화될 것이다. 독일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심지어 캐나다에서도 정국 현황이 심상치가 않다. 광기의 극우 정당들이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한국의 법원에서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 사태가 재현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21년 1월, 당시 조 바이든 새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트럼프 극렬 지지자들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미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 경찰 1명이 죽었고 폭도 4명도 죽었다. 700명이 체포됐다. 전 세계 사람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트럼프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목소리를 얻는 현상에 대해 수심이 가득한 표정들이 됐다. 정확히 4년 후인 현재 한국의 한 지방법원에서 벌어진 일을 두고 세계 민주공화주의자들은 똑 같은 심경이 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험하구나, 세계가 다시 파시즘화가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라가 왜 이 모양이 됐을까. 왜 극우 시위대들은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기, 심지어 일장기까지 들고 나오는 것일까.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은 1933년이고 1939년에 폴란드를 침공해 세계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5년 독일이 패망하기 까지 세계 인구 50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의 펠트헤른할렌의 비어홀(맥주집)에서 쿠테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체포된다. 구금된 히틀러를 놓고 그의 광신도들인 극우 자경단 페메(vëme)는 살인, 방화, 폭력, 난동이 서슴지 않았다. 꼭 지금의 우리 꼴이다. 이게 다 거짓말 같은가.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다큐멘터리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나 6부작 ‘히틀러와 나치 : 심판대에 선 악마’에 다 나와 있는 얘기이다.
24년 전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만든 영화 ‘밀레니엄 맘보’를 다시 보는 것은 진실로 ‘천국보다 낯선’ 일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현재 치매 투병을 위해 은퇴를 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전설이 됐다. ‘밀레니엄 맘보’는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세기인 뉴 밀레니엄 시기의 기이한 희망, 일상의 불안, 흔들리는 세대에 대한 얘기이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환호했다. 다들 허우 샤오시엔의 걸작이 나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을까. 영화도 시대가 변하면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다르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이 영화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라곤 비키라는 젊은 여자(서기), 그의 오래된 연인 하오하오(단균호) 그리고 새로운 남자 잭(고첩)이 맺어 가는 얽히고설킨 관계뿐이다. 얽히고설킬 것도 없다. 하오하오는 비키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하고 잭은 잭대로 더 이상할 만큼, 남자에게 시달리는 여자에게 늘 친절하게 잘 대해 준다. 잭은 비키의 은신처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하오하오란 남자는 룸펜이다.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훔쳐서 유흥비로 흥청망청 살아가는 대책 없는 젊은이이다. 시계는 당시의 대만 돈으로 8만 달러(260만원)이다. 비키는 하오하오가 가진 50만 대만 달러(2천2백만원)를 다 쓰면 바로 그를 떠날 거라고 매번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힘들 때는 잭에게 왔다가 다시 하오하오에게 끌려가곤 한다.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이런 관계의 반복을 보여 준다. 어쩌면 당시의 삶, 24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도 뭐 대단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거대 담론에 앞장서고 정치와 경제 역사를 얘기하는 척, 24년 전 대만의 젊은이들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부유(浮游)하고 흔들리는 삶을 지속하고 있을지 모른다. 비키와 하오하오는 늘 같이 텍 사운드 클럽(테크노 클럽)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고 약을 하며 지루한 섹스를 교환한다. 일상은 대단할 게 없고 그때의 젊은이나 지금의 젊은 층이나 모두들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어쩌면 젊은 세대가 지니는 역설의, 기이한 특권일 수 있다. 그들은 방황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기약 없는 방황을 통해, 그 통과의례를 거쳐 뉴 밀레니엄, 곧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런 그들의 고독과 고통, 혼란을 지켜보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젊은이들은 역사적 서사를 만들 나이가 아니다. 개인적인 서사를 꾸려 가기에도 부족한 세대이다. 그러나 새로운 100년은 분명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주인공이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가 하려는 얘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다르지만 같은 영화가 영국 마이클 윈터바텀의 ‘나인 송스’(2011)이다. 극중 남녀의 실제 섹스 장면이 들어 있어 일부에게서는 포르노그래피로 오인받고 있지만 이 영화 역시 극도의 방황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남녀가 하는 일이라곤 술을 먹고 약을 같이 하면서 섹스를 하고 록 콘서트에 가서 실컷 몸을 흔들다 돌아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또 약을 하고 술을 하며 섹스를 한다. 반복의 일상이다. 이들이 이러는 것은 그것을 너무나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1년이나 2011년이나 2025년 현재나, 젊은이들은 늘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기성세대는 일정 부분 목표를 찾았고, 쟁취했으며, 나름 누리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 상실감과 소외감이 전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어잡기 마련이다. ‘밀레니엄 맘보’나 ‘나인 송스’나 다 같은 맥락을 지닌 작품이다. 극 후반 비키는 잭의 집에 찾아와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흐느낀다. 그건 매우 관념적인 사치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잭은 그런 비키를 말없이 받아 준다. 잭은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어머니 집은 홋카이도이며 외할머니는 유바리에서 선술집과 여관을 운영한다. 비키는 잭을 따라 유바리에서 눈을 구경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런 잭이 홀연히 사라진다. 잭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무슨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는 일본 야쿠자 조직의 일원으로 보인다. 그녀는 잭을 찾아 도쿄 신주쿠의 한 여관으로 가지만 그를 만나지 못한다. 비키는 잭이 남긴 핸드폰만을 가지고 일본을 떠돈다. 그녀의 독백이 이어진다. 거리에는 노동자들과 학생, 주부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비키는 마치 그들 중 하나인 척 행동한다. 젊음의 치기를 벗고 기성세대로 편입된 잭을 통해 비키는 드디어 그들 중 한 명으로 변신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긴 터널을 지나 왔으며 잭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아채게 된 것처럼 자신이 이제 기성의 세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이제 그 문턱에 도달해 있음을 깨닫는다. 비키가 잭의 코트에서 나는 애프터 셰이브와 담배 냄새를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비키는 지긋지긋했던 하오하오와의 섹스도 추억한다. 그녀는 그를 눈사람으로 기억한다. 눈사람은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그와의 섹스가 서글펐다고 말한다. 비키는 이제 더 이상 하오하오를 생각하며 화를 내지 않는다. 사라지기 전 잭은 그녀에게 일본으로 혼자서 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비키는 그게 꼭 잭, 자신에게 오라는 얘기인 것을 알게 된다. 그 둘이 만나게 될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기성의 세대는 젊은이들이 꼭 자신의 세계로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성의 질서와 새로운 가치가 꼭 합치되리라는 법은 없다. 현재는 과거에서 배우고 과거는 현재를 통해 그 존재감을 구현해 낼 것이다. 그럴 때가 있고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가 예전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기억의 회로 하나를 더 열고, 켜는 것뿐이다. 이 영화가 나왔던 2001년보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진화하고 진보했는가. 우리의 일상은 보다 행복해졌는가. 그때 고민했던 20대들은 지금 50대가 가까워졌고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바꿔 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세월의 흔적과 더께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약간 서글퍼진다. 우리 모두는 눈사람일 뿐이다. 해가 뜨면 녹아서 사라지는 눈사람. 영화 ‘밀레니엄 맘보’는 그런 상징의 눈사람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영화이다. 이 ‘밀레니엄 맘보’가 비상계엄과 쿠데타와 탄핵의 고통의 길을 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어떤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어떤 해법과 혜안을 주게 될까. 젊고 새로운 관객들의 반응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이 20일 정도 남은 시점에서 미국의 상당 수 국민들도 향후 4년이 참 길 것이라는 자괴감을 가질 것이다. 우리도 2년 반 전쯤, 5년은 너무 길다라는 생각을 가졌었고 그 우려가 지금 현실로 다가서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의 재등장을 걱정하는 미국 내 지식인의 목소리는 다양한 대중문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 『원더풀 랜드』와 영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가 그것이다. 지난 해 연말에 개봉됐던 알리 아바시 감독의 ‘어프렌티스’란 영화도 트럼프 시대의 재개가 새삼 두렵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중 앞의 두 작품, 『원더풀 랜드』와 ‘시빌 워 : 분열의 시대’는 둘 다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깊은 증오의 정치가 미국이라는 큰 나라를 두 쪽으로 쩍 갈라 놓게 한 것을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 원더풀 랜드에서는 미국이 ‘연방 공화국’과 ‘공화국 연맹’으로 갈라지는데 그 영토의 분포도가 딱, 대선 때의 민주당 지지 주와 공화당 우세 지역이다. 거기에 독일 베를린 처럼 중립지대가 하나 있다. 그건 미니애폴리스이지만 왜 작가가 미니애폴리스로 잡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스윙 보트 지역이 아닐까 싶다. 분열과 분단은 언제, 어느 나라, 어느 시대가 됐든 결코 바람직 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 오는 트럼프 재집권 시기에는 이 같은 분단 상황이 미국에서 실현될 지도 모른다는 상상 아닌 상상이 나오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는 분단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예 정부군과 이에 저항하는 서부군의 내전으로 비화된 상태의 얘기를 다룬다. 정부군을 대표하는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하야를 거부한다. 서부군은 이제 곧 백악관을 함락 시킬 태세이다. 알렉스 가랜드라는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비록 허구지만 이제 정치 협상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듯 (트럼프를 연상케 하는)대통령을 처단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미국의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국민의 뜻을 저버리면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국내에서는 흥행이 완전히 참패했지만 ‘어프렌티스’는 트럼프라는 인간의 정치관과 인생관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 지를 고발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어프렌티스는 견습생이라는 뜻이다. 사실은 트럼프가 2004년부터 2015년까지 NBC TV에서 진행했던 TV쇼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정치적 견습생이 나라를 대표할 때 자칫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를 얘기하고 있다. 이 대중문화의 작품들이 비단 미국만의 얘기일까. 한남동에서 버티고 있는 내란범죄의 대통령과 그의 소수 극렬 지지자들의 얘기는 아닐까. 미국의 영화와 소설이 반면교사가 되는 요즘이다.
킹스맨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알고 보니 크리스마스이브에 LA공항에서 보안검색 요원으로 일하다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영화 ‘킹스맨’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테런 에저트의 최신작으로 넷플릭스 공개작인 ‘캐리 온’의 얘기이다. 제목인 캐리 온은 일종의 비행 용어로 수하물이라는 뜻이다. 이번 주 이 영화 ‘캐리 온’을 소개하는 이유는 순전히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이고 세상도 어지러운 바, 위기를 이겨 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그게 꼭 왜 남자여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를 그려 나간, 추적 스릴러 한 편쯤이 괜찮지 않아서일까 하는 판단 때문이다. ‘캐리 온’은 연말에 집 안에서 즐길 만한 팝콘 용 액션 영화로 적당한 작품이다. 주인공 이선 코펙(테런 에저트)은 막 임신한 아내 노라(소피아 카슨)와 함께 여느 날처럼 LA 공항으로 새벽 여명 길에 출근을 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수십만 명의 여행객, 비행기 이용객들이 몰리는 날이다. 지각하면 안 되지만 오늘도 몇 분 늦었다. 노라도 공항 직원이다. 최근에 매니저급으로 승진했다. 아내는 자신의 남자 이선이 공항 보안 요원 일에 그다지 큰 열의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원래 경찰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찰 시험에 다시 응모하라고 말한다. 이선은 한번 떨어진 적이 있다. 어쨌든 이선은 아내의 그런 마음에 부응하고자 출근 후 상관에게 오늘만큼은 좀 더 책임 있는 일을 시켜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검색대 모니터 체크 요원으로 앉게 된다. 공항 검색 요원들은 나름 내부적으로 등급과 체계가 있는 모양으로 사람들의 몸을 직접 점검, 수색하는 일보다 검색대 모니터를 체크하고 수상한 수하물을 잡아 내는 업무가 보다 높은 자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직책을 맡아야 승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선은 중요 업무 첫날부터 된통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보내온 스마트 이어 폰을 귀에 꽂은 순간 아내인 노라를 저격하겠다며 아내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특정 남자의 수하물을 열어 보게 하지 말고 검색대를 그냥 통과시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게 된다. 수하물의 정체는 ‘노비촉’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제 신경화학물질이다. 닿기만 해도 치사율 백 퍼센트의 가장 악질적인 생화학 가스이다. 이선에게 ‘오더’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항 안 여행객(제이슨 베이트먼)으로 위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범인은 공항 밖 누군가, 혹은 어떤 조직으로부터 백업을 받고 있고 그들은 모든 CCTV를 해킹해서 이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중이다. 이 수하물이 비행기에 탑재되는 순간 뉴욕행(나중에는 그게 워싱턴 DC행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비행기 승객 250명은 바로 죽은 목숨이 된다. 이 범죄조직이 노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선은 살인 가스 수하물도 막고 자신의 아내의 목숨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적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이번 영화 ‘캐리 온’을 만든 자우메 코예트세라(자움 콜렛 세라) 감독은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으로 ‘논스톱’과 ‘언더 워터’ 등 폐쇄 공간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액션, 좁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오가는 추격전을 그리는데 능한 연출력을 보이는 감독이다. ‘논스톱’은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로 비행기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탄 테러범과의 색출과 사투의 얘기를 그린다. ‘언더 워터’는 작은 암초에 고립된 채 식인 상어와 싸우는 한 의대생 여성의 이야기이다.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나왔던 영화다. 이번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항은 코예트세라가 그려 왔던 폐쇄 공간 중 가장 큰 것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의 장기가 작은 공간에서의 추격전인 만큼 이번 영화에서는 수하물들이 옮겨지는 공항 뒤편 수하물 컨베이어벨트에서의 액션 장면에서 그 같은 자신의 특기를 잘 살려 내고 있다. 감각적인 액션 연출은 그 밖에도 이런저런 장면에서 돋보인다. LA 경찰인 엘레나(다니엘레 데드 와일러)가 앨콧이라는 이름의 국토 안보부 수사관이라는 남자와 110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겠다며 격렬하게 치고받는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살짝 혀를 내두르게 만들 만큼 잘 찍어 냈다. 앞뒤로 차가 받히고, 옆에서 들이받고, 하는 장면을 리얼 백 퍼센트의 느낌으로 찍어 냈다. 이 영화의 백미이다. 영화 ‘케리 온’의 핵심 내용은 극중 그레이스 터너라는 하원 의원이 발의한 민주주의 방어법(Defence for Threatened Democracies ACT), 곧 DTD 법안이다. 반국가 세력의 위협을 막기 위해 각종 군사시설, 무기,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인데 막대한 예산 문제로 인해 의회에서 통과가 저지돼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산복합체, 무기 판매상들은 이 법안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영화는 이들이 법안 통과를 관철시키기 위해 테러 행위를 유발, 국가 위기 상황을 연출하려는 목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 정작 터너 의원이 자신의 갓난 아이와 함께 해당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들은 누구일까. 혹시 터너의 반대 세력일까. 영화는 미국에서조차 반국가 세력이 진짜 존재하는가. 그건 혹시 내부의 적이거나 누군가의 과도한 망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존재가 아닌가,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것은 아닌가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고백한다.. 할리우드의 다소 사소한, 엔터테인먼트용 액션 스릴러 영화에서조차 지금 한국의 상황이 떠올려진다. 주인공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내는지, 할리우드 영화는 이 ‘역공작의 역공작’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반면교사를 통해 가르쳐 준다. 지금 우리의 위기와 그 해법도 어쩌면 이 영화 ‘캐리 온’에 담겨 있을 수 있다. 과연 누가 나라와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자이고 세력인가. 이번 영화에서 답을 구해 보시기를 바란다. 주인공 이선을 앞세워 비행기에 살인 가스 수하물을 실으려 했던 범인 역으로 제이슨 베이트먼이 나오는 것이 이색적이다. 제이슨 베이트먼은 인기 미드 ‘오자크’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주로 코미디 영화에서 ‘착하고 댄디한 얼굴의 웃긴 남자’ 역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윌 스미스 주연의 ‘핸 콕’에서 슈퍼우먼 샤를리즈 테론의 어진 남편 역으로 나왔었다. 이번 영화 ‘캐리 온’에서는 평소 이미지를 180도 바꿔서 나오는 셈이다. 주연인 테런 에저트만큼 비중이 높은 배우이다. 영화 ‘캐리 온’은 사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2003년 영화 ‘폰 부스’의 설정과 많은 부분 비슷한 감이 있다. ‘폰 부스’도 공중전화박스에 갇혀 누군가가 전화로 내리는 오더를 실행할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화박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캐리 온’의 주인공 역시 처음에는 검색 모니터와 검색대에서 발이 묶인다. 하늘 아래 새로운 영화는 없다. 과거 영화가 현재 영화를 가르쳐 준다. 과거가 현재를 살린다. 그건 영화 쪽에서도 진리이다.
영화는 망했다. 최소한 극장용 영화는 망했다. 쿠테타가 일어나는 사회에서, 내란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그것이 비록 조기에 진압됐다 하더라도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차대한 사회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에서, 그리고 매일처럼 헤드라인으로 누구누구가 공조본(공동조사본부)에 소환되고 구속됐다는 기사가 뜨는 사회에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없다. 많을 수가 없다. 고로 한국의 영화는 망했다. 극장도 망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나는 내년 3월말까지 영화의 흥행은 기대하기가 난망인 상황이다. 어떻게 키운 영화산업인가. 1년에 2억명 정도가 극장을 가고 국민 1인 연평균 관람회수가 4~5회인 나라가 아니었던가. 이런 시장을 쿠테타 시도로 한방에 날려 버렸다. 12월 4일에 개봉했던 영화 ‘대가족’은 3일 밤의 내란 소요 사태로 피폭을 당하면서 17일 현재 20만 여명에 그치고 있다. 손익분기점은 260만명이다. 92억원을 들인 영화이다. 투자배급사인 롯데, 영화를 만든 양우석 감독 모두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다. 송강호 주연의 ‘1승’ 역시 30만에 채 미치지 못하고 있다. BEP는 180만명이다. 턱도 안된다. 그나나 곽경택 감독이 만든 ‘소방관’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관객 2백만에 육박하고 있다. ‘소방관’의 손익분기점은 260만명이다. 손해를 볼 것 같지는 않지만 후반 마케팅 비용 등을 생각하면 좀 더 관객을 모아야 할 판이다. 결론적으로 12월을 맞아 연말 흥행용으로 내세운 세 편의 한국영화가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이 기이한 지도자가 벌인 난장판 쿠테타 때문이다. 한국은 아카데미를 비롯해 칸과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모두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주연상 등을 탄 나라다. 박찬욱과 봉준호가 있는 나라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 한강을 소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발매하자마자 그래미 음원 순위 톱5 안에 진입한 ‘아파트’의 로제의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그런 나라에서 쿠테타를 일으켜 로제가 세계무대에서 공연할 때도 창피하게 만들었다. 한강으로 하여금 노벨상을 수상할 때도 검은 옷을 입고 우울하게 만든 나라이다. 정치가 문화와 대중예술을 망쳐도 이렇게 망칠 수가 있는가. 게다가 정치 일정을 보면 내년 5월이나 6월까지(탄핵 소추안이 인용되고 두 달 안에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전제 하에) 한국의 대중들은 TV뉴스 앞에 꽉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모든 일이 그나마 잘 풀린다는 것을 예상해서이다. 대중예술인들 모두 코로나19에 이어 또 다시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내수 진작을 위해서라도 영화 연극 공연 등에는 양적 완화를 통한 지원자금을 풀 필요가 있어 보인다. 25일에 개봉할 ‘하얼빈’이 극장이 처한 상황의 국면 전환과 더 나아가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 모종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기대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인 상황이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그린 얘기이다. 지금의 정부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한다고 했을 때 항일 의식을 담은 공포영화 ‘파묘’에 1200만의 관객이 몰려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한 적이 있다. 대중들은 애국적 민족주의를 종종 드러내곤 한다. ‘하얼빈’이 진짜 애국을 생각하게 만들지 모른다. 걱정이 구만리이다.
개봉 전, 이미 ‘올 한 해 가장 미친 영화’라는 입소문과 마케팅 문구가 나올 만큼 화제를 모았던 ‘서브스턴스’는 의도적으로 매우 역겨운 장면들을 다수 배치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는 고어(gore 유혈이 낭자) 한 작품이다. 극 후반부에 가면 화면 자체가 피바다이다. 마치 그 옛날 브라이언 드 팔마가 만든 영화 ‘캐리’(1978)에서처럼 극중 방청객들에게 엄청난 피를 뿌려 댄다. 모두들 피범벅이 된다. 스크린 밖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자신들이 마치 ‘바케쓰’로 피를 뒤집어쓰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주인공은 괴물로 변하고 보기에도 끔찍한 설정의 장면들을 이어 간다. 어떤 관객들은 이런 등등의 장면들로 구토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영화 ‘서브스턴스’는 매우 호오가 엇갈릴 만한 작품이다. 프랑스의 신예급 감독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프랑스가 여전히 영화적 상상력에서 가장 많이 앞서 나가는 ‘아방가르드’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코랄리 파르자는 전작으로 ‘리벤지’를 만들었다. 자신을 윤간한 남자 셋을 차례로 죽이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물리적 복수를 꿈꾸는 다분히 강성 페미니즘을 보여 준 작품이다. 이번 영화 ‘서브스턴스’도 다분히 여성적 시선을 지니고 있다. 여성 자신들이 지닌 욕망의 문제를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야기는 외모와 젊음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한때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을 만큼) 인물이지만 이제 나이를 먹고 현업에서 밀려날 처지이다. 그녀는 모닝 쇼 피트니스 방송을 하고 있지만 방송국 책임자인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그녀를 해고하고 젊은 여성을 뽑으려고 한다. 분노로 치를 떨던 어느 날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의 남자 간호사에게서 서브스턴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이 물질, 혹은 약을 주입하면 급격한 세포 분열을 일으켜 또 다른 몸이 분리돼 나오되 젊고 신선한 육체가 생긴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젊은 여성으로 분리되고 그 여성이 대신 방송국에서 ‘수’라는 이름으로(마가렛 퀄리) 피트니스 모닝 쇼를 맡게 된다. 이 서브스턴스의 ‘발칙한’ 효과는 단서 조항, 철칙이 하나 있다. 자아는 하나이며 분리 효과는 일주일 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약물을 투입해 가며 일주일은 ‘수’로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수’ 역시 일주일 후에는 엘리자베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간격에는 예외가 없다. 분리된 육체는 서로 일주일 씩만 사용이 가능하다. 그건 마치 신데렐라가 정해진 시간에는 호박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여성들이 지닌 외모 강박증, 혹은 노화에 대한 공포증을 신데렐라 동화에 결합시키되 그것을 공포와 서스펜스의 분위기로 바꾼 셈이다. 또 다른 나 이자 젊은 여자인 ‘수’는 바깥세상이 만들어 주는 유혹(점점 유명해지면서 일이 많아지는 것, 예컨대 보그지 커버 촬영 같은 것, 그리고 남자와의 섹스 등등)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일주일의 시한을 지키지 않게 된다. 그 결과는 또 다른 나인 엘리자베스의 육신이 급격하게 노화된다는 것이며 점점 괴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대로 ‘젊어진 나’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 변이 과정’의 ‘종료’를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이 여인 둘, 결국 이 여인 한 명의 욕망은 파국을 맞는다. 작금의 프랑스 영화는 ‘트랜스 휴먼’이란 지향점을 향해 ‘냅다’ 달리는 분위기이다. 21세기 프랑스 영화인들은 이제 트랜스’젠더’ 정도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트랜스 ‘휴먼’, 그러니까 사람이 기계와 결합한다든지(쥘리아 뒤쿠르노의 2021년 영화 ‘티탄’) 이번처럼 내가 또 다른 나와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얘기를 꿈꾼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자아의 복제를 꿈꾼다는 얘기이다. 영화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실험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변화를 상상력의 기초에서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미(美)에 대한 비틀린 욕망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그 이면에 깔린 광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광기가 어떻게 인간을 좀먹게 하는가를 점층법적으로 보여 준다. 그 과정을 의도적으로 매우 거칠고 역겹게 보여 준다. 광기라고 하는 것은 한번 빠지면 제어할 수 없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이 생리적이거나 본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꽤나 사회적인 측면이 있음을 고찰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밀어내는 건, 그녀가 젊어지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에 앞서 젊은 몸매와 미모만을 요구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속물주의 때문이다. 올해 칸 영화제 각본상을 탔지만 시나리오보다 프로덕션 디자인, (특수)분장과 촬영, 연기 부문에 더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엘리자베스의 하우스 공간, 그녀가 일하는 방송국의 복도 등등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매우 드라이하면서도 극히 인공적인 느낌으로 짜여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몸이 분리되는 욕실은 사면이 흰 색인, 마치 산부인과 분만실의 강한 조명 아래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괴물로 변한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끔찍하며 극 후반 15분은 차라리 저 부분은 편집으로 드러냈으면 어땠을까 할 만큼 처참하고 폭력적이다. 데미 무어는 할리우드 여배우 중 가장 많은 외과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어쩌면 데미 무어 자신의 얘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감하게 이 작품을 선택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투혼의 연기를 펼쳤다. 여우주연상 감이다. 젊은 엘리자베스, 수를 연기한 마거릿 퀄리는 앤디 맥도웰의 딸이다. 데미 무어, 마거릿 퀄리 모두 올 누드의 파격적인 연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올 한 해 최고 걸작의 영화는 아니지만 올 한 해 최고의 도발적인 영화이다. 그건 맞는 얘기이다.
제목의 느낌이 심상치 않은 영화 ‘미망’의 단어 미망은 한자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다 달라지는 개념이다.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는 뜻이고 미망(未妄)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미망(彌望)은 잘 안 쓰는 말이긴 한데 '멀리 넓게 본다'는 뜻이다. 영화 ‘미망’은 이 세 가지 뜻을 각각의 한 단락으로 구성해 이야기를 꾸몄으며 맨 마지막 단어는 장기하의 엔딩 타이틀곡 ‘그때 그 노래’가 나오는 부분에도 반복해 쓰이면서. 단어 미망(彌望)이야말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추구하는 내용과 방향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영화 ‘미망’의 서사는 첫 번째가 ‘迷妄’이고 그다음이 ‘未妄’인데 이 앞 두 얘기는 다소 인트로(introduction)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만큼 다소 습작의 느낌, 아마추어 느낌이 난다. 하지만 사실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진짜 에피소드는 3부에 해당하고(러닝타임 90분에서 45분이 할애된다.) 영화 제목에 해당하는 ‘彌望’이며 이 옴니버스 형 영화를 만든 감독 김태양의 본심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시간은 12시에서 다시 12시로 늘 쳇바퀴 돌 듯이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같은 점이라도 위의 원을 조금씩 크게 그리면 같은 꼭짓점이더라도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건 1부 ‘迷妄’에서 주인공 남자(하성국)가 여자(이명하)에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하는 얘기인데 1부의 그 어리숙한 대사를 3부에서 같은 인물들의 변한 모습들을 통해 실제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 ‘점층의 서술’이 돋보인다. 반면에 그 얘기는 또 반대로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있어야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변증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그 두 측면, 인생의 변수와 상수를 늘 ‘멀리 넓게 봐야 한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바로 한자어 미망(彌望)을 타이틀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 ‘미망’이다. 영원한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때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리얼한 느낌으로 다가서는데 3부에 걸쳐 만나고 헤어졌다가 남이 돼서 다시 만나는 두 남녀의 얘기는 안 그런 척 우리가 늘 주변에서, 스스로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뻔한 방식으로 처음에 만나서, 서로를 탐색하고, 그렇게 다 알고 나면 시들해지고 그러다 싸우지도 않은 채 실망해서 헤어지고, 또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만나게 되면 서로에게 좋은 점들을 기억하고 대화하는 관계를 회복하는 식이다. 다들 ‘12시에서 12시로 돌아온 사이들’이지만 그래도 ‘멀리 넓게 바라보는’ 관계로 성숙해진 것이다. 주인공들이 주로 가는 곳은 서울 종로 1가와 종로 3가 그리고 광화문이다. 1,2부에서 종로 3가에 있는 서울극장은 여자 주인공이 영화 모더레이터를 하는 곳으로 나온다. 이 실재했던 극장이 지금은 폐관되고 철거된 것처럼 영화도 3부에서는 그 점에 대해 얘기한다. 주인공들과 이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의 배우와 감독들은 영화 속 시간과 실제의 시간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으며 그래서 영화 안팎 모두 다른 시간 대의 다른 사람들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과 있음을 드러낸다. ‘12시에서 다른 12시로 돌아 오고’ ‘늘 같은 장소에 있는 것도 있는’ 존재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극중 인물들이 반복해서 하는 얘기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라는 것이다. 그건 장군이 실제로 왼손잡이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왼손을 쓰는 걸 금기시했기 때문에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얘기한다. 남자는 1부에서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여자(정수지)에게도 이순신 동상 얘기를 하며 여자는 2부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것 같은 팀장이라는 남자(박봉준)와 이순신 장군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 의도된 반복은 ‘12시가 같은 12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전체의 서사는 비교적 단순하고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것을 시간대가 달라지면서 끊어진 이야기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연결돼 있다. 연상연하 커플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1부에서 남자는 시종일관 존대어를 쓰며, 3부에서도 여자는 선배 혹은 누나 대우를 받는다.)는 2부에서는 이미 헤어진 것으로 보이고 여자는 아이가 있는 미혼남과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참이어서 다소 불안해한다. 3부에서 주인공 남자와 여자는 택시 기사인 후배(백승진)와 주인공 여자의 친구이자 주인공 남자의 선배의 삼우제(삼오제라고도 함. 발인 후 3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를 위해 한 사찰에 모인다. 여자는 2부의 애 딸린 팀장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깊이 사귀고 있으며 남자는 견습 화가가 돼서 그룹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주인공 여자와 남자는 1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 광화문으로 와서 광화문 김치찌개 집이 있는 뒷골목 카페 소우(실제로 있는 식당과 카페이다.)에서 얘기를 나누다 헤어진다. 이 모든 것(같은 공간을 다니는 반복 행위)은 어쩌면 저예산 공법을 숨기기 위한 필요 전략인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촬영과 조명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을 보면 그게 꼭 돈=제작비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감독 김태양의 의도였으며 공간의 반복과 중복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미학임을 보여 준다. 주인공들은 같은 카페를 배경으로 프레임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어 사라지다가 또 그다음엔 좌측에서 나와 우측으로 나간다. 같은 골목에 들어와서 담배를 피우며 그게 왜 꼭 같은 골목인지는 설명하지는 않더라도 문득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끔 연출하고 있다. 결국 둘 모두 그곳을 잊지 못하는 것이며 거기서 무언가를 기억하고 과거의 관계를 떠올리지만 그게 꼭 처연하거나 가슴이 시리거나 할 것까지는 아니다. 버스 안, 작은 카페 안은 자연조명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인공조명을 사용하는데 그 채색의 콘트라스트가 이 영화의 제작이 결코 만만한 세공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세련되고 깔끔하며, 도시적이면서도 젊고 쿨(cool) 한 정서를 지니고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화 ‘미망’은 마치 홍상수가 일상의 언어를 통해 통찰의 인생관을 피력하려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등장인물들의 비루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 사람을 공박하려는 느낌 같은 것을 주지는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종종 사람을 비참한 진실에 마주하게 만든다. ‘미망’은 그러한 작품이 아니다. 세대가 바뀌었고, 세대의 언어가 바뀌었음을 확연하게 보여 준다. 젊은 세대의 감각은 공격적이라기 보다 수세적이며 나서고 떠들기보다는 관망하면서 스스로의 언어를 내면화하는 쪽이다. 영화 ‘미망’이 사람들의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조용한 통찰’이 주는 울림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잊으려 해도 잊지를 못해(未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다(迷妄). 삶과 세상, 관계를 멀리 넓게 바라보느냐(彌望) 여부는 결국 자신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문제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가. 영화 ‘미망’은 그것을 넌지시 묻고 있는 작품이다. 또 한편의 수작이 발견됐다. 한국 영화의 상업영화는 죽었다. 오직 독립영화만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미망’이 그런 작품이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자신의 저서를 마르크스 주의 비판을 위해 썼다. 그가 이 책을 썼던 때는 1945년이다. 나치의 잔혹함을 경험했고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를 목격했다. 칼 포퍼의 이론은 소위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 선전 도구로 이용하곤 한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그럴 듯 하게, ‘좀 있어 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은 칼 포퍼를 아는 척 한다. 특히 개신교 이론가들이 포퍼의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대립 개념을 내세우곤 한다. 아이러니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론을 내세우는 집단들, 정당들, 교회들이 오히려 닫힌 사회의 행태를 더욱 적극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른 정당의 대표와 정치인들을 무리한 법조항을 내세워 활동을 규제하려 하는 것은 닫힌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동성애, 이슬람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개신교들의 집회는 그걸 지켜 보는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든다. 나치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동성애자 역시 상당수 태워 죽였다. 그 역사를 애써 외면하려 하는가. 한 사회가 열린 사회인지 닫힌 사회인지를 바로 알 수 있는 길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 특히 지도급 인사들이 문화와 예술을 대하는 태도이다. 한국 사람들 중 일부는 기이하게도 해외에서 높은 성과를 올린 작가, 예술가들을 폄훼하는 경향을 보인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청소년 유해도서로 규정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폐기시킨다. 모두 3부로 이루어진 '채식주의자'의 2부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처제가 관계를 맺는 에피소드 때문인 모양이다. 다소 극우주의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각각 5.18과 4.3의 역사를 다룬 내용이어서 ‘좌파 빨갱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웃고 인사하는 사람의 속내에 5.18과 4.3에 대해, 끔찍하게 다른 생각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 해진다. 5.18은 북한 간첩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4.3 역시 남로당 계열 공산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5.18과 4.3 때 얼마나 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녕 교육의 잘못인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에 대해서도 댓글에 욕설에 가까운 비난 글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 역시 한국사회가 칼 포퍼식 열린 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노라’는 뉴욕의 한 창녀가 러시아 갑부 자식인 애송이 청년 때문에 겪게 되는 적나라한 이야기이다. 칼 포퍼 이론의 핵심은 ‘비판을 허용하는 열린사회란, 서로 상충하는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엇갈리는 목표들이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는 다원적인 사회를 말한다’에 있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과연 칼 포퍼가 얘기하는 열린 사회인가. 반공주의자들, 일부 기독교 목사들이 신봉하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론이 바로 그들에 의해 닫힌 사회론이 되고 있다. 이건 거의 개그 수준의 사회이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도 제발 제대로 읽고 얘기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행여나이다. 과연 그럴까이다.
미국 캐나다 산 영화 ‘롱 레그스’는 요령부득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를 잠깐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영화가 시작된 지 57분이나 지나서이다. 주인공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상관인 카터(블레어 언더우드)가 요약을 해 준다. 둘은 FBI 요원이고 리 하커는 신참이다. 마치 과거 조너던 드미 감독이 만든 ‘양들의 침묵’(1991)에서 팀장인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와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의 관계와 같다. ‘양들의 침묵’에서 둘은 버펄로 빌이라는 연쇄 살인범의 뒤를 쫓는다. 이번 영화 ‘롱 레그스’에서 리 하커는 카터와 함께 가족들만 골라 연쇄적으로 죽이고 다니는 일명 롱 레그스라는 이름의 살인범을 추적한다. ‘롱 레그스’는 기본적으로 ‘양들의 침묵’의 저예산 버전이고 여성 수사관의 캐릭터를 상당 부분 가져오되, 다소 비틀어서 가져온 작품이다. 그만큼 서로 같은 척, 사실은 상당 부분 다른 모습과 느낌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롱 레그스’는 그런 의미에서 ‘양들의 침묵’보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유전’(2018)을 더 닮아 있다. 일종의 사탄 숭배(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 사탄(학) 영화이다. 이런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이 나오고 익숙하지 않은 계시록의 성경 구절이 나오기 마련이며, 색깔과 소리로 오컬트(심령)의 느낌을 만들어 내곤 하는데 이게 사실상 상당히 서구적이고 기독교적이어서 작품을 내재적(內在的)으로 파악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건 마치 우리의 무당 굿, 빙의(憑依)에 대한 이야기, 풍수지리, 사주 역술의 갖가지 문양 등등을 뒤섞어 놓으면 서구 기독교인들이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팀장 카터는 신참인 리 하퍼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척척 풀어 오는 걸 약간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렇게 정리한다. “자, 자, 그러니까 1974년 1월 13일에 일가족을 죽인 롱 레그스란 인간이 20년 만에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살인극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이지? 그런 거라는 거지?” 영화는 오컬트의 환상과 미스터리, 실제 벌어졌음직한 살인극의 이야기를 오버랩 시키면서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 속에 롱 레그스는 실재하는 인물로 나온다. 이 역할은 놀랍게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았으며 그는 요즘 비교적 개성이 강한 작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연기 투혼을 다시 불사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2022년작 ‘피그’는 발군의 작품이었다. 케이지는 이후 24년까지 2년간 ‘올드웨이 : 분노의 추적자’ ‘렌필드’ 등 무려 10편의 독립영화에 출연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행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영화에서 케이지는 얼굴과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서인지 전혀 그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실제 사탄이 있다면 저런 스타일, 마치 하드 록커의 흉내를 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모습으로 나온다. 영화는 오프닝과 클로징 앞뒤로 록밴드 T-rex의 ‘집스터(Jeepster)’와 ‘겟 잇 온(Get it on)’을 사운드트랙 음악으로 사용한다. 일부의 사람에게 로큰롤은 악마의 음악으로 들렸다. 살인범 롱 레그스가 극 중에서 출현하는 방법은 마치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뛰어난 드라큘라 영화 ‘렛 미 인’(2015)을 닮아 있다. 악마는 누군가 초대하지 않으면, 곧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상대에게 들어갈 수가 없다. 사탄에게는 늘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드라큘라든 악마든 연쇄살인자든 그 불행과 비극은 우리 자신들이 초래한 것이라는 얘기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내 안에 있거나 우리 사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탄론의 정치사회학이다. 첫 살인극이 벌어진 1975년과 다시 연쇄 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1995년은 미국으로선 특기할 만한 시대이다. 70년대는 베트남의 공산화와 닉슨의 하야, 강경 보수주의자 레이건의 등장을 앞두고 큰 혼란을 겪었으며 1995년은 빌 클린튼이 등장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자본주의의 극단적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됐던 시기였다. 미국이란 나라와 공간은 이제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고립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분위기가 영화 ‘롱 레그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FBI 팀은 의도적으로 단출해 보인다. 팀이나 기동타격대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보이지 않고 요원들은 거의 혼자서 탐문과 수사를 하며 다닌다. 리 하커는 철저히 혼자이며 그녀가 다니는 곳도 거의 집 한 채만 있는 농장의 외딴곳이거나 버려진 곳이다. 리 하커의 엄마 루스(알리시아 위트)도 혼자 살아가는 기독교 광신도이다. 엄마 루스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딸 리 하커에게 “너 요즘 기도 는 하니?”라고 묻고 딸이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하자 한참을 낄낄댄다. 그리고 “기도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엄마 루스는 리 하커가 좇는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키를 쥐고 있음이 나중에 드러난다. 1975년에서 1995년까지의 미국이나,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미국이나 문제가 되는 건 정치나 사회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종교에도 큰 이슈가 자리하고 있음을 영화 ‘롱 레그스’는 느끼게 해준다. 광신도들이 암약했고 사회 한구석에 버젓이 자리해 왔음을 보여 준다. 이들로부터 툭하면 튀어나오는 성경 구절과 그에 대한 강박이 사회를 이상하게 몰아 간 측면이 있다. 사회의 이상성과 종교의 강박증이 만나면 인간의 정신은 마비되고 왜곡된다. 살인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클린튼 정부 때 텍사스 주 웨이코에 있던 다윗파가 FBI에게 체포, 충돌하는 과정에서 집단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시대의 어둠은 마치 사탄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듯 퍼지는 법이다. 고립무원의 공간에서 ‘롱 레그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악마에게 지배당한다. 사탄은 (내부의) 동조자가 없으며 사람을 해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을 해하고 죽인다. 결국 사탄이 되는 건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탄화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인간인 셈이다. 오컬트 영화가 줄곧 만들어지고 있고 일부에서 나마 마니아 계층들에 의해 비교적 마니악(maniac)하게 향유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세상사가 이상하게 변형돼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긴,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 남성들이 민주당의 낙태권 주장에 반기를 들어 자신들 같은 이민자들이나 유색인 하층 노동자를 탄압하는 트럼프에게 오히려 많이들 표를 찍었다는 그 종교적 특이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 또한 사탄에 동조하는 현상일 수 있다. ‘롱 레그스’는 그런 정치적 은유를 담고 있는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오스굿 퍼킨스는 그 옛날 안소니 퍼킨스의 아들이다. 영화 ‘사이코’에서 식칼 살인마로 나왔던 배우이다.
구룡성채의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다. 九龍寨城. 채는 울타리 채 자이다. 구룡에 있는 울타리로 쌓은 성이란 뜻이다. 현대에 이르러 좀 더 알기 쉽게 구룡성채, 九龍城砦로 바뀌었다. 구룡반도에 있는 일명 마굴(魔窟), 최악의 슬럼가였다. 1993년에 철거돼 지금은 공원으로 돼있다. 국가의 법, 사회의 공권력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치외법권 지역이었으며 갱단 조직인 삼합회가 운영했던 곳이다. 그 얘기를 다룬 것이 바로 ‘구룡성채 : 무법지대’이다.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삼합회와 또 다른 특정 세력인 범죄 조직과 그 우두머리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그린 내용처럼 꾸며져 있다. 실제로 홍콩 영화 특유의 과도한 권법 액션과 잔혹한 폭력의 장면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 마케팅도 과거 1980년대 홍콩 누아르를 추억하거나 여전히 추앙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짜여 있다. 영화의 겉만 보면 좀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속 내용이 겉보다는 좀 더 깊다. 어마어마한 의미까지는 아니어도 홍콩인들이 지금의 홍콩, 더 나아가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지금의 중국 시진핑 정부가 홍콩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홍콩 사태, 곧 홍콩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서 처참하게 탄압된 지 만 5년이 지난 시점이다. 영화는 늘, 사회와 역사의 문제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구룡성채가 지독한 슬럼이 된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청 말기인 1898년 영국이 아편전쟁 이후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할 때 청의 허울뿐인 방어선의 하나가 이곳 구룡성채였다.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그곳을 탈출한 본토 난민들이 불법적으로 체류하며 자신들만의 국가 아닌 국가를 구축한 곳이다. 당연히 홍콩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었으며 이후에도 각종 난민들의 본거지가 됐고 그 와중에 범죄조직인 삼합회가 독자적으로 관할 운영하게 된 곳이다. 영화 ‘구룡성채 : 무법지대’는 이 지역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전설의 고수 3인의 얘기부터 시작된다. 극중 관계는 다소 복잡해서 오프닝 시퀀스의 자막 설명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과거의 주요 인물은 사이클론(고천락)과 레이, 찬 짐(곽부성)이다. 찬 짐은 레이 갱의 최고 살인 병기이다. 셋은 형제 관계를 맺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이클론은 다른 조직 ‘추’에 붙었고 곧 벌어진 피 터지는 싸움에서 사이클론은 추와 타이거라는 또 다른 일파와 손을 잡고 레이 파를 제거한 후 구룡성채를 접수한다. 이 과정에서 사이클론과 찬 짐은 (전설에 따르면) 7일의 낮과 밤을 싸운다. 그 전장(戰場)의 흔적은 현재까지 구룡성채의 성지로 남아 있다. 사이클론은 이후 추 밑에서 성채 치안위원장으로 사실상 구룡성채를 지배한다. 바깥에는 또 다른 삼합회 조직인 미스터 빅(홍금보)이 호시탐탐 구룡성채의 지배권을 노리는 중이다. 문제는 그다음 세대에서 다시 재현된다. 추는 자신의 일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한 찬 짐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자신 역시 찬 짐 일가의 대를 끊겠다고 결심해 왔다. 그런데 찬 짐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그가 바로 찬 록 쿤(임봉)이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베트남 난민이 돼 구룡성채로 들어온 인물이다. 찬 록 쿤이 찬 짐의 아들인지 처음엔 몰랐던 사이클론은 그의 보호자가 되고 자신의 심복인 신이(유준겸)를 붙여주기까지 한다. 찬 록 쿤과 신이, 사이클론의 또 다른 후계자 급인 AV(장문걸)와 타이거 조직의 1인자 십이소(호자동), 그렇게 4인은 형제 관계의 연을 맺기 시작한다. 갈등의 시작은 조직의 우두머리 급인 추 조직과 동조자 타이거 파 보스가 찬 록 쿤의 살해를 명령하고 이를 사이클론이 거부하면서 시작된다. 사이클론의 실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추는 바깥의 삼합회 조직 미스터 빅을 끌어들인다. 미스터 빅 수하에는 킹이라는 살인귀가 있다. 구룡성채는 곧 피바다가 되기 시작한다. 추 조직과 오랜 동지 관계를 맺어 왔던 사이클론은 찬 록 쿤을 죽이라는 지시를 거부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 “우리 세대의 문제를 애들한테 떠넘기지 말자.” 사이클론은 과거 찬 록 쿤의 아버지 찬 짐을 죽이면서 그에게 아들을 살려주고,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이클론이 레이를 배신한 것은 레이 때문이었지 찬 짐 때문은 아니었으며 그는 자신이 찬 짐을 죽이게 된 일을 이후 내내 뼈아프게 후회하며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 세대의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자는 말은 홍콩의 지난 역사를 생각할 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사이클론은 찬 록 쿤이 찬 짐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된 후 그에게 구룡성채를 떠나 멀리 도망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찬 록 쿤은 사이클론에게 돌아오려 한다. 그는 말한다.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이곳에서 살다가 죽고 싶어요.” 찬 록 쿤의 이 대사 역시 기묘한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중국 정부는 어쩌면 홍콩과의 오랜, 굴곡진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의 일은 우리에서 끝내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홍콩에서 낳고 자란 홍콩인들이 홍콩에서 살고 홍콩에서 죽기를 바랄 만큼 홍콩에 대한 애정이 높고 그것을 잘 알지만(사이클론), 강고한 국가주의 원칙에 따라 소개와 이주가 이루어져야 한다(추)고도 생각한다. 중국 정부는 그 가운데에서 과연 현명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구룡성채 : 무법지대’는 중국이 홍콩(인)의 문제를 바라보는 일단의 시각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 전의 홍콩을 구룡성채=슬럼=치외법권지대의 아수라 구렁텅이였을 뿐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구룡성채 같은 이미지의 홍콩이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말끔하게 정상화됐다는 것이다. 아마 그 점 역시 강고한 전체주의적 입장의 현 중국정부가 이 같은 누아르 영화의 부활을 용인한 이유일 수 있다. 구룡성채를 과거의 이미지 그대로 복원해 구현한 미니어처, CG, 세트의 공학이 놀라운 작품이다. 중국 영화의 기술력이 일취월장을 넘어서서 위협적인 수준이 됐음을 보여 준다. 극중 인물들이 구사하는 홍콩 무술 액션의 호쾌함, 그 속도감과 정밀함의 미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홍콩 액션의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홍콩의 씁쓸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픈 작품이기도 하다. 홍콩은 홍콩인에게. 이제 그런 말은 결코 들을 수 없는 메아리가 될 것이다.
얼마 전 열린 부산국제영화제가 역사극 ‘전, 란’을 개막작으로 내세운 것은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다소 의미심장한 이야기일 수 있다. ‘전, 란’은 조선 선조 때의 이야기로 일본의 침략, 곧 임진왜란 당시 내우외환의 혼란스런 정변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그러나 왜군(倭軍)과의 전쟁보다는 선조라는 지도자의 무능과 부도덕 그를 타파하려는 대동계의 반란, 그 조직을 만든 정여립의 사상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 정여립의 대동주의는 일종의 생시몽 식 사회주의로 흔히들 몽상적 사회주의로 불리운다. 생시몽 주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왔지만 정여립의 사상은 16세기 조선에서 나왔다 더 빠르다. 노비와 양반이 하나되는 세상,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정여립은 당연히 반역죄로 참수됐으며 영화 ‘전,란’의 오프닝 씬은 그의 목에 칼이 꽂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여립은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신전마을에서 목이 잘렸다. 영화 ‘전,란’의 원래 제목은 ‘전쟁과 반란’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너무 직설적이라 판단했을 것이고 그래서 줄인 것으로 짐작된다. 세상에 대한 반역, 임금에 대한 모반, 위정자들을 향한 혁명을 다소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제작은 블랙리스트 감독 출신이자 세계적 명성의 박찬욱이 했으며 연출은 김상만 감독이 맡은 작품이다. 넷플릭스가 200억을 투자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노비 천영(강동원)과 종려(무가 집안의 장자)이다. 둘은 신분 차이에도 우정을 나눈다. 둘은 대동계의 ‘이즘(ism)’대로 노비와 양반의 귀천을 없앨 만큼 친하게 지내지만 결국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치열하게 대립하며 피바다의 싸움을 벌이다 결국 죽음의 화해를 이룬다. 둘은 이 와중에 왜병 잔당과의 싸움을 벌여야 하는 반면 임금 선조의 폭정을 견뎌 내기도 해야 한다.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워낙 중층적으로 벌어지기 마련이라 폭정과 싸우는 게 먼저인지, 외환을 없애는 것이 먼저인지 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영화 ‘전,란’이 보여주는 시의성이 조선조가 아니라 기묘하게도 지금의 우리 현실과 같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단순한 기시감이 아닐 터이다. 영화, 특히 영화제는 시대를 읽어 내거나 앞서 가는 코드를 간직하고 있을 때가 많다. 국내에서 가장 이름값이 높고 무엇보다 세계적 명성이 자자한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작으로 ‘전,란’을 선택한 것은 이 영화를 통해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관객들이 그것을 어떻게 읽었을까, 그 결과는 아마도 2~3년 후에 나타날 것이다. 영화가 주는 사회적 메시지는 그것이 사회 안으로 스며들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영화 속 선조가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탐욕을 부리는 장면, 모든 공간이 주는 형식이 권력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식의 아전인수 격 논리를 펴는 장면은 지금의 정부가 청와대를 버리고 수백 억원을 들여 용산과 한남동으로 이전한 모양새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늘 과거를 통해 현재를 얘기한다. 미래가 곧 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 ‘전,란’은 꽤나 정치적이다. 오로지 정치인들 만이 안보고 있을 뿐이다.
중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타쿠미 아사(하야세 이코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가 됐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는다. 성격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인 이모 코다이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아이에게 화난 목소리로 대야는 한자로 관(盥)이라고 쓴다며 관은 절구 구(臼)에 물 수(水), 접시 명(皿) 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마키오는 죽은 언니 미노리(나카무라 유코)와 의절한 채 살아왔다. 그녀는 청소년 소설 작가인 듯이 보이고 작품이 웹툰 등으로 만들어지는 등 성공한 작가여서인지 자립해 살아가고 있다. 자립해서 독자적으로 산다는 건 독립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깥 세계는 차단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기적인 고독일 수 있다. 당연히 이모 마키오와 조카 아사의 동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타 나츠키 감독의 ‘위국일기’는 야마시타 토모코의 순정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왜 일본의 이야기 문화가 단행본 만화나 웹툰이 기반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일본 사회의 특징 같은 것이 돼버린 지 오래이다. 일본의 단행본 만화책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1년에 7천억엔, 7조 규모다. 우리의 영화 시장 사이즈는 2조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구 대비 작은 시장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따라서 일본과 한국이 영상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위국일기’라는 영화의 제작은 그렇게 개별적인 세계(만화책은 혼자서 보는 것이니까)를 탐닉하는 일본인 특유의 전통에서 탄생한 서사(敍事)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위국(違國)이란 말은 국가가 망가졌다는 의미이다. 작게는 가정이 무너졌고 더 작게는 개인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 위국(衛國)을 위해서는 어긋난 국가, 곧 위국(違國)을 버려야 하거나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위국(衛國)을 위해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 익숙하지 않은 애매하고 모순돼 보이는 상황에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은 불편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자신의 언니와 완전히 틀어진 채 불화의 삶을 살아온 주인공 마키오는 조카 아사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 마키오 이모가 조카 아사는 짜증이 난다. 자신을 짜증 내 하는 아사를 두고 마키오는 성가셔 한다. 성가시고 짜증 나는 두 명의 관계는 대체로 좁혀질 수가 없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모와 조카의 동반 성장기를 그린다. 마키오는 충동적 육아를 통해 조금씩, 평생을 멀리해 왔던 언니의 마음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아사는 이모와의 삶, 타인과의 비자발적이면서도 강제된 일상을 통해 부모의 죽음, 그 상실의 상처를 조금씩 극복해 나간다. 두 사람 모두 개인의 관계를 통해 전체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회복해 간다.(마키오는 극 후반에 자신과 자신의 언니를 구별해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악수를 청한다.) 세상에는 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의 불행은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로 대체돼야 한다는 점에 있다. 대체 불가능하지만 뭔가로 대체해야 할 때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고 형성해야 하는 관계이다. 사랑 역시 저절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공부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키오는 아사를 통해 아사는 또 마키오를 통해 사랑과 배려를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며 그렇게 서서히 가족이 되어 간다. 위국은 결국 위인(違人)이어야 하며 개인을 구하지 못하는 사회는 국가를 구할 수 없으며 가족을 위해 싸우는 자들만이 국가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영화 ‘위국일기’라는 순정만화의 스토리가 궁극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모두 11권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순정만화를 2시간 안쪽의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다소 지루한 맛을 띠게 됐다. 원작의 캐릭터가 지닌 에피소드를 모두 다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압축의 미학을 표현해 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민이었겠으나 연출 역량이 거기에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듯이 보인다. 이럴 때는 두 가지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려 11부작 드라마로 만들든지 과감하게 캐릭터를 걷어 내든 아니면 합쳐 내든 해서 이야기를 두세 명의 캐릭터로 집중시키든지 해야 했을 것이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중간 지대에서 눈치를 보는 식이다. 일본 영화가 갖는 총체적인 문제, 곧 스토리를 어떻게 빌드 업하고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자기만의 매뉴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점이 더 좋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일본 영화는 밋밋하다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일본 화의 대체적 평가의 분기점은 이런 데에서 나온다. 영화 ‘위국일기’는 패전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국가적 유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청소년기의 방황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 사회의 순정만화 같은 영화이다. 그래도 이 작품을 비교적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11권의 『위국일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겠다. 아마도 이 영화의 국내 수입은, 청소년들이나 젊은 관객들에게 퍼져 있는 만화 원작의 인기를 고려한 탓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의 인기가 영화의 흥행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만화를 좋아하는 팬층은 영화가 원작의 풍부함을 잘 살려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키오와 죽은 언니 미노리의 성격 차이는 확연하다. 미노리는 늘 깔끔하고 정돈을 잘하고 사는 스타일이다. 요리와 살림을 잘하고 딸을 키우는데 정성을 다했다. 동생인 마키오는 도무지 정리 정돈이란 걸 할 줄 모르고 사는, 오로지 나 살기에 바쁜(소설쓰기에만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요리는 전혀 하지 못한다. 조카 아사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려면 유일한 단짝 친구인 다이고 나나(카호)를 초대해야 할 정도이다. 위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개인부터 구해야 한다. 개인을 구할 줄 알아야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개인의 가치가 국가나 전체의 가치보다 뒤처지는 사회는 열린 사회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극 중에서 부모가 죽은 아이 아사처럼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의 재 부활을 막는 것이다. 원작이든 영화든 아사의 부모를 ‘죽인 후’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든, 일본과 준하는 사회이든, 부모(국가)가 죽어야 새로운 세대(미래의 나라)가 산다. 일종의 살부살모(殺父殺母)의 의식, 이데올로기이다. 영화 ‘위국일기’가 단순한 순정만화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