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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위국(違國)은 위인(違人)에서부터. 국가주의 일본의 자아 성장기

160 위국일기-세타 나츠키

 

중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타쿠미 아사(하야세 이코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가 됐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는다.

 

성격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인 이모 코다이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아이에게 화난 목소리로 대야는 한자로 관(盥)이라고 쓴다며 관은 절구 구(臼)에 물 수(水), 접시 명(皿) 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마키오는 죽은 언니 미노리(나카무라 유코)와 의절한 채 살아왔다. 그녀는 청소년 소설 작가인 듯이 보이고 작품이 웹툰 등으로 만들어지는 등 성공한 작가여서인지 자립해 살아가고 있다.

 

자립해서 독자적으로 산다는 건 독립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깥 세계는 차단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기적인 고독일 수 있다. 당연히 이모 마키오와 조카 아사의 동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타 나츠키 감독의 ‘위국일기’는 야마시타 토모코의 순정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왜 일본의 이야기 문화가 단행본 만화나 웹툰이 기반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일본 사회의 특징 같은 것이 돼버린 지 오래이다.

 

일본의 단행본 만화책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1년에 7천억엔, 7조 규모다. 우리의 영화 시장 사이즈는 2조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구 대비 작은 시장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따라서 일본과 한국이 영상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위국일기’라는 영화의 제작은 그렇게 개별적인 세계(만화책은 혼자서 보는 것이니까)를 탐닉하는 일본인 특유의 전통에서 탄생한 서사(敍事)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위국(違國)이란 말은 국가가 망가졌다는 의미이다. 작게는 가정이 무너졌고 더 작게는 개인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 위국(衛國)을 위해서는 어긋난 국가, 곧 위국(違國)을 버려야 하거나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위국(衛國)을 위해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 익숙하지 않은 애매하고 모순돼 보이는 상황에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은 불편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자신의 언니와 완전히 틀어진 채 불화의 삶을 살아온 주인공 마키오는 조카 아사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 마키오 이모가 조카 아사는 짜증이 난다. 자신을 짜증 내 하는 아사를 두고 마키오는 성가셔 한다. 성가시고 짜증 나는 두 명의 관계는 대체로 좁혀질 수가 없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모와 조카의 동반 성장기를 그린다. 마키오는 충동적 육아를 통해 조금씩, 평생을 멀리해 왔던 언니의 마음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아사는 이모와의 삶, 타인과의 비자발적이면서도 강제된 일상을 통해 부모의 죽음, 그 상실의 상처를 조금씩 극복해 나간다.

 

두 사람 모두 개인의 관계를 통해 전체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회복해 간다.(마키오는 극 후반에 자신과 자신의 언니를 구별해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악수를 청한다.) 세상에는 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의 불행은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로 대체돼야 한다는 점에 있다.

 

대체 불가능하지만 뭔가로 대체해야 할 때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고 형성해야 하는 관계이다. 사랑 역시 저절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공부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키오는 아사를 통해 아사는 또 마키오를 통해 사랑과 배려를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며 그렇게 서서히 가족이 되어 간다. 위국은 결국 위인(違人)이어야 하며 개인을 구하지 못하는 사회는 국가를 구할 수 없으며 가족을 위해 싸우는 자들만이 국가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영화 ‘위국일기’라는 순정만화의 스토리가 궁극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모두 11권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순정만화를 2시간 안쪽의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다소 지루한 맛을 띠게 됐다. 원작의 캐릭터가 지닌 에피소드를 모두 다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압축의 미학을 표현해 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민이었겠으나 연출 역량이 거기에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듯이 보인다.

 

이럴 때는 두 가지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려 11부작 드라마로 만들든지 과감하게 캐릭터를 걷어 내든 아니면 합쳐 내든 해서 이야기를 두세 명의 캐릭터로 집중시키든지 해야 했을 것이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중간 지대에서 눈치를 보는 식이다.

 

일본 영화가 갖는 총체적인 문제, 곧 스토리를 어떻게 빌드 업하고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자기만의 매뉴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점이 더 좋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일본 영화는 밋밋하다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일본 화의 대체적 평가의 분기점은 이런 데에서 나온다.

 

 

영화 ‘위국일기’는 패전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국가적 유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청소년기의 방황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 사회의 순정만화 같은 영화이다.

 

그래도 이 작품을 비교적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11권의 『위국일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겠다. 아마도 이 영화의 국내 수입은, 청소년들이나 젊은 관객들에게 퍼져 있는 만화 원작의 인기를 고려한 탓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의 인기가 영화의 흥행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만화를 좋아하는 팬층은 영화가 원작의 풍부함을 잘 살려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키오와 죽은 언니 미노리의 성격 차이는 확연하다. 미노리는 늘 깔끔하고 정돈을 잘하고 사는 스타일이다. 요리와 살림을 잘하고 딸을 키우는데 정성을 다했다.

 

동생인 마키오는 도무지 정리 정돈이란 걸 할 줄 모르고 사는, 오로지 나 살기에 바쁜(소설쓰기에만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요리는 전혀 하지 못한다. 조카 아사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려면 유일한 단짝 친구인 다이고 나나(카호)를 초대해야 할 정도이다.    

 

 

위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개인부터 구해야 한다. 개인을 구할 줄 알아야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개인의 가치가 국가나 전체의 가치보다 뒤처지는 사회는 열린 사회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극 중에서 부모가 죽은 아이 아사처럼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의 재 부활을 막는 것이다. 원작이든 영화든 아사의 부모를 ‘죽인 후’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든, 일본과 준하는 사회이든, 부모(국가)가 죽어야 새로운 세대(미래의 나라)가 산다. 일종의 살부살모(殺父殺母)의 의식, 이데올로기이다. 영화 ‘위국일기’가 단순한 순정만화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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