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부터 정신의 발달과 육체의 쇠퇴가 시작된다. 그건 바로 두 개의 원뿔체를 서로 반대로 세워놓은 것과 같은 것으로, 육체적 힘의 쇠퇴와 정신력의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화로운 성장은 자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속에서도 침묵과 고요속에서 이루어진다. 떠들썩한 것은 모두 파괴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야만적이다. 그러나 아직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진정한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정적과 침묵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뇌 속에서 허덕이며 가끔 고독해지면 쓸쓸해질 뿐이다. 인간은 오직 고독과 정적 속에서만 힘찬 생명력과 성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도 그것을 “네가 기도할 때는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말로 표현했다. 세계는 평화의 실현을 위해 이 침묵 속의 성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을 한 온갖 새로운 가르침이 수많은 목소리가 되어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의 진정한 정신적 성장이 방해를 받고 있다 우리는 더욱더 침묵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침묵의 목소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려줄 것이다. (류시 말로리) 정신적 생활을 하는…
시인 정지용의 고향 충북 옥천에는 서울의 주류언론을 압도하는 '옥천신문'이 있다. 옥천은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을 지낸 청암 송건호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12월 21일 옥천우체국에서 옥천FM공동체라디오 개국식이 열렸다. 옥천FM은 송건호기념사업회와 '옥천신문' 그리고 지역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쏘아 올린 새로운 풀뿌리 미디어다. 공동체라디오란 기초자치단체인 시·군·구를 방송 권역으로 하는 소출력(10W 이하) 비영리 방송이다. 전파 도달범위가 반경 5km 내외인 작은 미디어로 지역의 노인과 청소년, 장애인과 이주민 등 주류미디어에 잘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누구나 참여하여 ‘우리동네이야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국내 공동체라디오는 2004년 시범사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서울의 관악FM과 마포FM, 대구 성서FM과 광주FM 등 7개사가 운영되고 있다. 최초 허가 이후 전국 각지에 공동체라디오가 속속 등장하여 새로운 ‘지역공동체 미디어’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MB정권 등장이후 최근까지 공동체라디오는 변방의 ‘잊혀진 존재’였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7월 21일, 무려 17년 만에 전국의 20개 지역에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명절이 아니라 차라리 지옥의 명절이었다. 불이 꺼져있는 텅 빈 가게들..” 어느 해변 도시에서 발생한 지독한 전염병과 이에 대응하는 다양한 인간의 행태를 다룬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소설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1월 중순쯤에 이르러 시민들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갖게 된 때부터 실질적으로 페스트의 위력은 사라져 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사회도 곧 이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면서 이 글을 쓴다. 희망의 사전적 의미는 ‘앞 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단순한 바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목표를 염두에 두고 의지가 수반될 경우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힘이 된다. 희망을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개별 인간의 행동이 달라진다. 더 나아가 희망이 여러 사람들에게 퍼지면 그 집단, 나아가 사회 전체의 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희망이 큰 힘을 발휘해서 기대 이상의 상황으로 반전을 이끈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목도해왔다. 코로나19가 잇따른 변이종의 출현으로 기세등등하다. 코로나와의 무한정 적대적 대응에 의미가 없다는 판단
발등이 부었다. 통증은 속에 있고 붓기는 밖에 있다. 바깥을 보면서 속을 다독인다. 고장은 발등의 기다란 뼈와 중지발가락이 만나는 관절에서 났다. 손톱만한 관절 하나가 사람을 기울게 한다. 나눠져야 할 무게중심을 왼발 하나가 도맡는다. 발가락의 고장으로 하루가 절뚝거린다. 더딘 걸음을 잰걸음이 부축한다. 길은 멀고 겨울 해는 짧다. 쏟아지는 군중 속에서 ‘나’는 ‘우리’가 되고 만다. 출퇴근길 인파속에서, 난무하는 구호와 외침 속에서, ‘우리’와 무관한 ‘나’로 개별적이긴 힘들다. 모래사장에서 각기 다른 모래 한 톨의 개별을 가리는 것처럼 난해한 일은 없다. 산을 보며 나무를 헤아리기 어렵듯이 숲에 앉아 산을 그리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물며 역사에 묻힌 개별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개별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는다. 사건사고로 회자되기는 하지만, 개별의 역사는 보편의 역사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개별의 역사는 오늘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엄연하다. 매스컴마다 온갖 개별의 역사로 빼곡하고, 빼곡한 역사마다 찬성과 반대의 각기 다른 댓글이 꼬리를 문다. 무는 꼬리와 상관없이 기억하지 못할 역사들이다. 묘한 일이 아닐 수 없
올 한 해가 일주일여 남았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았지만 ‘위드 코로나’가 다시 방역강화로 전환되면서 어느때보다 엄중한 상황이다. 하루에 7000명 안팎의 신규 확진, 1000명대의 위중증 환자, 수십명 이상의 사망자 발생에 밤 9시가 넘으면 거리는 적막이 흐른다. 누적 확진자가 60만명에 이르러 우리나라 총인구(5175만명)를 감안할 때 100명 가운데 한사람 이상(중복 감염 포함)이 코로나에 감염됐다. 생명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경제적‧정서적 고립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다. 예전같은 연말이면 이웃을 살피는 각종 미담과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가 잠시나마 삶에 지치고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 2년째인 올해는 그마저도 눈과 귀에 잘 와닿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세상을 보려는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자세가 웅크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어두운 곳을 찾아 보듬어야 할 사회지도층의 일그러진 모습과 그들의 세계관은 국민들을 더 절망속에 밀어 넣고 있다. 대선 후보와 가족리스크가 연일 뉴스 전면을 장식하고 그것도 모자라 측근들과 정부 고위 인사들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그 대열에 경쟁적으로 합류한다
우리 선조들은 해방이 되던 날 과연 감격에 겨워 마음 놓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내걸려야 할 곳에 대신 새로운 점령국 미국의 성조기가 오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직감하고 불길한 생각을 하게 됐을 것 같다. 이 땅에서 일본인들이 물러간다는 것이 한반도 상황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을 터이다. 이후 이 땅의 현실은 민족의 소망과는 점차 멀어져 갔다. 아직 광복은 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범국 일본이 패전을 했을 뿐 조선은 미, 소에 의해 분할되어 자주독립국가로의 길도 더 험난해졌다. 조국은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되돌아오지 못할 단절과 분열의 길로 들어섰고 급기야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조국은 해방된 지 불과 몇 년도 못돼 허리가 잘리고 재분단되는 비극적 운명에 빠져든 것이다. 반면 친일 반민족 세력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미군정 눈에 나 정치적 위기에 몰린 순간 이들은 환호했다. 일제 조선인 고등계 순사들은 이제는 미군정의 당당한 후원을 받아 이 땅을 영원한 반공 분단국가로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군 수뇌부도 독립군 출신은 한직으로 밀려난 반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터키의 옛 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노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를 통해 알려졌다. 심신이 지쳐있던 하루키는 내면의 북소리에 펜을 던지고 유랑길에 올랐고 3년간의 유럽여행 후 그 책을 썼다. 북소리를 번역기로 돌리면 ‘ 힘들고 외롭고 지친 당신, 변화가 필요하다. 떠나라!’ 정도가 아닐는지. 내게는 노래가 먼 북소리다. 헝가리 가수 마르타 세베스첸(Marta Sebestyen)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세베스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슬람교의 아잔 소리가 떠올랐다. 신도들에게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울리는 아잔은 인간만사, 희노애락에 오욕을 품어주면서 초탈로 이끈다. 폐부를 긁으면서 종내 세상 끝에 선 것처럼 쓸쓸하게 만드는 그 소리. 아잔소리같은 마르타 세베스첸의 목소리는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통해 처음 만났다. 1996년도 나왔으니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옛날 영화’겠지만 지금 봐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에 이름도 국적도 잃은 채 죽어가던 화상환자가 있었다. ‘영국
진정한 예지는 인생에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아는 것이다. 학식과 예지는 좀처럼 양립하지 않는다. 학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은 쓸모없고 의심스러운 것이다. 진정한 현자는 그렇게 많은 것은 모르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필요한 것이며, 또 그가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확실한 것이다. 진정한 예지에 의해 주어진 행복은, 다른 모든 지식에 비해, 마치 사막에서 한 잔의 물과 같이 한 자루의 황금보다 귀하다. 이 시대는 장차 올 생명의 역사에 대한 준비의 시대이다. 혼돈한 가운데서 질서가 나오고, 영원한 암흑과 침묵이 깨어서 광명과 음악이 나오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이 하늘과 이 땅이 되어 나오기 전에 얼마나 많은 천체의 출몰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원소의 모이고 헤어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거룩한 이 극의 무대가 될 지구가 그 얼굴을 나타낸 후에도 생물이 생존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몇억 년의 세월이 지났고, 마지막에 연출자 저 자신이 등장하기까지에는 또다시 몇 억년이 흘렀는지를 알 수 없다. 이 시대는 도리어 그 때문에 오는 역사의 의미의 위대를 미리 표하는 시대다. 정직작업에 많은
우리 인간만이 이 세상에 정의를 이룰 수 있다. 자연의 모든 힘도 우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의식적 존재의 집합체인 인류가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할 자가 없다. (히지츠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들은 생존경쟁을 위해 온 힘을 다 쏟고 있어서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단순히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회개혁자의 과제가 매우 어렵고 그 진로가 험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위대한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맨 처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상류계층의 조소와 일반서민의 저주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이며, 사람들에게 박해받고 고통받으며, 수난의 옷을 입고 가시관을 써야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헨리 조지) 이 세상의 삶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에 대한 우리의 참여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그러한 사소한 노력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향한 모든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아도, 적당히 넘기지 말고 진지하게 고삐를 잡아당겨라.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