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교통부가 GTX-D노선을 김포(장기)~부천종합운동장 구간만 반영하겠다고 발표하자 김포, 부천 등 경기도 서북부와 인천 지역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경기도와 인천시가 건의한 노선보다 대폭 축소된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김포~부천~강남~하남’(68km)노선을, 인천시는 청라와 검단 두 노선이 서울로 이어지는 Y자 형태의 노선을 4차 국가철도망 계획에 반영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지난 22일 열린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안(2021~2030) 수립연구 공정회`에서 김포~부천 구간만 연결하겠다는 반쪽짜리 계획만 발표한 것이다. 물론 정부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통지옥에 시달리는 이 지역민들의 고통은 더 크다. 김포시의 경우 인구 50만의 도시지만 김포 골드라인이라고 하는 2칸짜리 경전철 노선 하나 밖에 없다. 직장인들이 거의 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지역 특성상 출·퇴근시간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혼잡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열차를 못타고 지각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얼마 전 김포시는 김포 골드라인의 혼잡도가 280%라고 밝혔다. 객차 한 대의 정원이 100명이라고 할 때 김포 골드라인에는 280명이 타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코르도바(Cordoba)와 톨레도(Toledo)는 고색창연한 도시다. 중세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이미 고전(古典)인데, 파리대학이 유럽 중세의 지적 탁월함을 이루기 전에는 바로 이 두 도시가 쌓아올린 학문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랍어로 쓰여진 그리스 철학과 과학은 훗날 르네상스의 젖줄이 된다. 12~13세기 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새삼 발견하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걸까? 8세기 이후 15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의 영역이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접한 지중해를 거쳐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은 한때 로마제국의 판도였으나 제국의 몰락으로 이슬람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도권은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기독교, 유대교를 핍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면서 배워나가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 코르도바와 톨레도의 잔해 하지만 이슬람을 축출한 15세기 스페인은 잔혹한 국가로 변모했다. 종교재판은 세비야를 중심으로 광기처럼 번져나갔는데 이 징벌로 적지 않은 이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산채로 불태워져 죽어갔다. 사상과 신념은 통제되었고 공존
인생의 목적을 정신적 완성에 두는 사람은 어떠한 외적 사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자다움은 오직 용맹함 속에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남자다움은 분노를 이기고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를 사랑하는 데 있다. (페르시아의 격언)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 옳은 것을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공자) 어떠한 불행도 그것에 대한 공포보다 무섭지 않다. (호케) 만일 무언가가 두렵거든 네 두려움의 원인이 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있음을 알라. 강자란 것은 제 살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떠나 저란 것이 없는데, 제 생각만 하기 때문에 생명의 부드러운 기운이 거기 가지 않습니다. 강하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의 벌인데 사랑의 진리를 무시한 마음은 그건 줄은 모르고 그것을 점점 더 잘난 것으로 알고 더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강자는 반드시 망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은 부드러운 씨ᄋᆞᆯ이 됩니다.
지구환경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기후 온난화 및 대기와 수질오염의 심각성이 이슈화되면서, 공동재(common goods), 공공재(Public goods)와 함께 커먼즈(commons)라는 용어가 주목받고 있다. 커먼즈는 일반적으로 ‘공동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이나 지식을 포함한 공동의 ‘유·무형 재화’에 대한 권리를 일컫다. 커먼즈의 기원은 1225년 수정된 영국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에서 출발한다. 당시 ‘산림헌장’에서 목초지와 숲에 대한 평민(commoners)들의 사용 권리를 명시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경쟁적 자본주의 체제는 합리적 이기주의를 빌미로 천연공동자원을 독점하였고 한정된 공유자원은 급감하고 파괴되었다. 1960년대 일부 사회 활동가와 과학자를 중심으로 천연자원 고갈과 인구증가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자연 공동재의 사회적·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68년 생물학자 개릿 하딘은 “어민이든 농민이든 자신의 개인적인 자원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커먼즈를 소비하기 때문에 커먼즈는 지속될 수 없다.”는 내용의 「공유지의 비극」을 발표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2008년 차명계좌를 통한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기소됐을 당시 1조원가량을 사회에 환원해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말했다. 고인의 유족은 지난 28일 상속세 12조원과 함께 의료공헌 1조원, 그리고 3조원대로 추정되는 이 회장의 미술품을 사회에 내놓기로 했다. 13년 만에 고인의 약속이 지켜졌다. 그동안 우리 지도층에게는 사회적 책임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재계는 정경유착을 비롯해 부동산투기, 임금착취 등 각종 부정적인 이미지로 투영돼 왔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 불법 승계와 국정농단 사건 등에 연루돼 수감 중인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번 삼성가의 결정을 이 부회장의 사면론과 연결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법에 따른 거액의 상속세 납부와 사회 기여를 천명한 것은 시대적 흐름으로 볼 때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지난 2월에는 자수성가형 창업주들이 잇따라 ‘통큰’ 기부로 우리 사회에 울림을 준 바 있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재산의 절반(5조원 추정)을 기부하기로 했고, 국내 최대 배달 앱 ‘배달의민족’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도 한국인 최초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
‘기레기’란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다. 당연히 기자들을 경멸하는 모욕적인 표현이다. 위키백과에서는 “허위 사실과 과장된 부풀린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이나 현상”을 지칭하는 말로 규정한다. 얼마 전 대법원은 ‘기레기’란 말을 들을만한 기사를 쓴 기자에게 ‘기레기’라고 하는 것은 모욕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기레기’라는 말은 2010년 무렵 MB정권이 언론을 장악한 이후 등장했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보도 이후다. 과거에도 사이비기자, 악덕기자, 어용기자와 같이 기자직을 비하하는 말은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기자라는 직업이 본래 그런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미 100년이 훌쩍 넘은 한국 언론의 역사는 한마디로 ‘영혼이 있는’ 기자가 반복적으로 추방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지사(선비) 언론인과 식민지시절 민족주의 계열 기자들은 일제가 축출했다. 해방 직후 남한을 접수한 미군정은 40여 곳의 좌익계열의 언론사와 수많은 ‘반미’ 언론인을 ‘대학살’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진보계열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를 처형했고, 10월 유신
인간이 만약 사후에도 자신의 생명이 불멸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병은 오직 하나의 생활에서 다른 생활로 옮겨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병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가올 새로운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우리는 보통 신에게 봉사하고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려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예수가 신과 인류에 최대의 봉사를 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자기를 죽이려 한 사람들을 용서한 그 순간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그것이 가능하다. 잘못된 의술은 환자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만 목적으로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피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뿌리치게 한다. 이는 그들로부터 도덕적인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접근을 그의 눈에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자신 속의 결코 나약해지지도 죽지도 않고 항상 성장을 멈추지 않는 신의 자녀로서의 본질을 의식하게 하는…
무심히 따라 불렀던 노래의 본뜻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라 쿠카라차가 대표적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데다 방송을 많이 타서 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후략) 라 쿠카라차(La cucaracha)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뜻. 원뜻을 붙여 보면 ‘바퀴벌레 바퀴벌레 아름다운 그 얼굴’ 이렇게 부른 셈이니 황당하고 우습다. 그러나 ‘바퀴벌레’가 가사 속에 들어간 사연을 알고 나면 웃음은 쏙 들어간다. 사연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격동의 과거사를 가진 멕시코를 알아야 이해된다. 마야문명과 아즈텍, 찬란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멕시코는 1521년, 스페인에 정복 당하면서 300년간 식민통치 받는 굴욕을 겪는다. (라 쿠카라차는 원래 스페인 민요로 스페인 상륙과 함께 전래되었다.) 1821년, 독립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져 영토를 대거 빼앗기고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는가 하면 외국자본, 대지주와 결탁한 부패한 정부에 의해 노동자, 농민의 삶이 파탄지
예전에 있었던 학폭사건으로 연예계나 체육계가 뜨겁다. 지금도 초·중·고의 어두운 곳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학폭을 당한 아이나 부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한다. 내 친구의 경우는 아들이 따돌림을 당해 학교를 찾아가니 선생님이 비협조적이었고 교육위원에다 진정서를 보내보라고 했단다. 문제는 상대 학부모를 찾아가도 자기 자식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자식 편만을 든다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들은 말로는 피해 학생이 병원에 입원해서 가해자 아버지가 입원한 학생을 찾아갔더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한다. 그 아버지는 공부도 잘했던 자신의 딸이지만 마주하면 그 애가 생각나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고 하였다. 학폭은 정말 잔인하고 무섭다. 언젠가는 놀이터에 있는 아이까지 납치해 죽이게 한 사건도 있었다. 어른인 나도 브레이크 없이 날뛰는 망아지 같은 아이를 타이를 수 있을까 의문이다.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들까 옛날같이 선생님을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선생님도 체벌이 금지됨은 물론 부모들의 간섭으로 학생을 정성껏 지도하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려고만 할 것이다. 훈육은 부모도 한몫이 되어야 할 것인데 자식의 기를 꺾을 수 없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