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선 조기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영화 ‘무명’이 알 만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았던 이유는 1930·40년대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때가 지금보다 훨씬 멋있었다. 시대도 그랬고, 예술도 그랬다. 패션은 더더욱. 무엇보다 사람들이 멋있었다. 저항할 줄 알았고, 그 와중에 즐길 줄 알았으며, 반드시 사랑들을 했다. 그것도 모두 치열하게. 지금 시대에는 사라진 단어, ‘혁명’과 ‘사랑’이 이 시대에는 존재했다. 영화 ‘무명’이 다루는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무명’은 1941년 상하이에서 암약한 제5열(상대 진영 내부나 후방에서 암약하는 스파이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잡한 것은 제5열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는 것이며 혹은 제5열 안에 또 다른 제5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간첩 혹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이렇게 되면 내가 누구이고 너는 또 누구이며 우리 모두는 무엇이고 그리하여 다들 무엇을 위해 싸우고 죽이고 헤어지고 하는지 언젠가부터는 그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무명’은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그 아우라가 이 영화 ‘무명’의
아마도 4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30대 꽃다운 나이에, 누가 쐈는지도 모를 총에 맞아 턱을 잃고, 평생을 영양실조와 소화불량, 관절염에 시달려야 했던 한 어르신의 사연을 듣게 된 건. 게다가 흉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늘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싼 채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60여 년의 고된 삶을 마감한, 그래서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진 고(故) 진아영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단순히 ‘가슴이 아팠다’라는 표현으론 설명해낼 수 없는 심정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먹먹함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 배경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었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바로 ‘제주4.3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기억의 목소리/허은실 글/고현주 사진/문학동네/252쪽/1만7500원 올해로 73주년을 맞은 ‘제주4.3’과 때를 같이해 출간된 ‘기억의 목소리’는 당시 제주 곳곳에서 말없이 현장을 지켜본, 사물에 스민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책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증언이 고현주 작가의 유품 사진에 더해져 ‘기억의 시침’을 ‘과거 그날’로 돌려놓고 있는 것이다. 쌀 포대로 안감을 댄 저고리, 사후 영혼결혼식을 치른 젊은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