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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이 FTA를 넘는 길

윤한택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 실장

머슴에 관한 이런 우화가 있었다.
구한말 서양 열강이 조선의 이권과 주권을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을 때의 일이다. 선진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일부 지식인들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중 이러한 위기가 우리 백성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들은 바로 이 땅의 무지랭이 머슴들을 모아놓고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그들은 꽤 유식하게 되었지만 봇물 터진 시대의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드디어 그들은 기역자를 닮은 낫을 열강의 목에 바로 들이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요즈음 FTA를 둘러싸고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세계화의 교두보 마련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장밋빛 그림을 내놓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먹는 제 2의 을사늑약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있다. 이 땅의 무지랭이 머슴들은 그 가운데서 또 다시 볼모로 잡혀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오늘의 지식인들도 그 시절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계몽의 빛을 던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낯선 식민지’에 빠져 허덕이고 있음을 자각하라고 말한다. FTA가 ‘가변자본에 대한 총자본의 글로벌 네트워킹’을 내용으로 하는 초국적자본의 전면공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진단이 끝났으니 그 다음에 이어지는 처방전은 이미 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초국적자본의 사냥터인 만국에서는 가변자본의 담당자인 노동자에 의한 전세계적 단결이 필요할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자본의 일차적 활동 범위인 국민국가 차원에서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세계화의 전일적 진행으로 잠시 무대에서 사라졌던 ‘민족경제론’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만국노동자연합과 자립적 민족경제와 더불어 지방화시대의 새로운 재생산단위인 지역에서의 처방전은 무엇일까? 일단의 문화경제학자들은 ‘문화와 산업의 수평적 네트워킹’으로서의 ‘창조도시’를 제안한다.
왜 문화인가? 노동해방이든 민족해방이든 이제 상대방을 거꾸러뜨리는 정치경제적 ‘계급투쟁’이 더 이상 ‘아님’을 모두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장투쟁이든 만인소든 청원이든 가두투쟁이든 분신이든 소신공양이든 촛불집회든 이미 벌써 봉기, 전복, 타도가 아니고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자의 고백이며, 더불어 삶을 향한 호소라는 낯익은 얼굴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즉자적 행위는 생디칼리즘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무정부주의 양 극단을 끊임없이 부유하는 한계에 갇힐 우려가 있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객관적 추론을 통한 ‘다중의 활력’은 직관과 성찰을 돌아 나와 ‘장엄한 용서’로까지 승화되어야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선포한 부처조차 양 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끼고 있다. 추론을 생략한 직관은 신비주의로 빠져 아편 같은 자폐로 내몰릴 위험이 있으며, 직관과 단절된 추론은 패권주의로 흘러 족쇄 같은 억압을 초래할 우려가 있음을 경계한 것이라고나 할까? 추론 과정을 통한 문수의 지혜와 직관을 통과하는 보현의 자비를 거치고 난 다음이라야 진정한 자아비판(‘자비’)으로 걸러진 자발성을 내용으로 하는 ‘충(忠)’과 관용성을 내용으로 하는 ‘서(恕)’가 일상의 모습으로 세상에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지혜는 비판을 넘어서는 용서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관계의 최고의 표현이다.
밥으로 상징되는 경제와 꿈으로 상징되는 문화가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할 이유, 문화가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방자치시대의 머슴이 FTA를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해서 경제와 더불어 문화를 양 손에 쥐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슬 퍼렇던 기역자를 닮은 낫을 희망찬 푸른 하늘의 초승달로 내걸고 우리 모두 손잡고 저 광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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