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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탈 없는 자연의 ‘행복 세례’

윤 한 택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장>

지난 주말을 이용하여 전남 영암 월출산을 찾았다. 수원을 중심으로 생활한 지 10년째 접어드는 지금까지 그 우직함 때문에 아직도 넉넉하게 마음을 나누고 사는 ‘우공이산’회의 구성원들과 함께 하였다.
그들의 우직함은 대략 이러하다. 그 구성원은 대략 수원과 용인에 거주하는데, 그 두 지역에 이 지역 사람들이 두루 사랑하는 한남정맥의 주봉 광교산이 있다. 그런데 이 광교산의 자락은 수원시에 더 넓게 퍼져 있는 데 반하여 정상인 시루봉은 용인시에 속한다. 이들은 궁리 끝에 용인시에 속하는 그 정상 시루봉을 삽으로 떠서 수원시로 옮기고, 그 작업이 끝나는 순간부터 다시 용인시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 무리들과의 월출산 행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몇 년 전에는 도갑사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이번에는 그 반대편인 천황사에서 출발하여 도갑사로 이어지는 길을 더듬어갔다. 날은 가물고 바람은 잦아들어, 바람계곡에 바람 한 점 없고 바람폭포엔 물줄기마저 말라있었다. 사람들로 밟히는 천황봉을 뒤로 하고 구정봉에 오르자 저 멀리 눈부신 황금 억새밭이 오롯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달한 그 곳에서는 아연 감미로운 바람이 온 몸을 감싸고, 10월의 따가운 햇빛 아래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억새들의 물결이 온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 황금빛 억새들의 세례.
이 벅찬 세례 앞에서 문득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가장 잘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생각은 허공을 맴돌아 놀랍게도 나를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그건 세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의 ‘도그마 세례’
돌이켜 보면 나와 종교와의 관계는 질기기도 하다. 내 또래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국민학교 시절 나는 크리스마스 때 사탕 얻어먹으러 교회에 갔었다. 그 시절 가장 선진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던 빨강, 파랑, 노랑 각양각색의 전도지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용케 세례는 받지 않았다.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중, 고등학교 시절 나는 또다시 여학생을 만나러 교회에 갔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지긋지긋한 입시지옥을 통과하고 들어선 대학은 불온사상의 온상이었고, 나의 불온함은 곧 거기에 물들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또 다시 교회가 운명처럼 다가왔었다. 그러나 역시 그것만으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졌었다.
군대에 잡혀가고, 공장으로 내려가고,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한문공부를 시작하고, 마침내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도 교회는 나에게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목숨을 걸었던 공부의 성과인 학위논문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께름칙한 이유로 존경하던 교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밥그릇 챙기는 일도 무망해지던 때, 나의 발걸음은 다시 교회 문턱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문제의 세례는 또 다시 나를 피해갔다.
‘비수’ 숨은 돈·권력 세례
그 이후 절을 기웃거려보기도 하였고, ‘기’니 ‘공중부양’이니 ‘파동’이니 하는 외도에도 가끔 흔들리긴 하였지만, 대학원 시절 글자만을 배우겠다며 그렇게 건방지게 큰소리치던 유학 경전을 다시 ‘사상’으로 읽게 되면서 그런 세례의 공간은 이제 제법 멀리 가버린 것 같다.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 “걸맞지 않는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이다.”이런 말들이 가슴에 와 닿은 까닭이리라.
그러고 보니 세례에의 유혹은 또 한 곳인 세속에도 있었다. 돈 세례와 권력 세례가 그것인데, 돌아보면 운 좋게도 잠깐 껄떡거려본 적은 있지만 끝내 그 세례는 받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성령의 도그마와 황금의 파퓰리즘에 발을 딛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영원히 뿌리칠 수 없는 세례가 있다는 것을 기암괴석의 영암으로 가득 찬 이 월출산에서 황금햇빛 흠뻑 받은 10월의 억새밭 세례가 나에게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러고 보니 5월의 눈부신 진달래 사태도 세례 받고 싶은 대상에서 빼 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어깨동무 씨동무, 우리 더불어 숲의 나무들, 그 사랑스런 마음들의 세례는 아무리 흠뻑 뒤집어써도 마다하지 않을 일이 아니겠는가! 세례 받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우리 민초들의 더할 나위없는 축복받을 세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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