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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찢는 아이들

이 종 태 <(사)한국교육연구소 소장>

수능이 끝나면
폐지로 전락 교과서
지식을 소모품으로 만든
삐뚫어진 대입 허망…


예전에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보던 풍경 중의 하나는 교복 찢기였다. 일제시대부터 물려받은 군대식 검정 제복에 하얀 밀가루를 끼얹고 그것도 모자라 모자부터 옷까지 갈기갈기 찢어 여기저기 버리거나 누더기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다. 보는 어른들마다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리지만, 아마도 당사자나 동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체를 시위하듯 즐겼던 것 같다.
요즘 새로 나타난 풍경은 수능시험 후의 책 찢기인 것 같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나타난 사진을 보면 운동장 가득이 찢어진 책이 널려 있고 그 위를 학생들이 밟고 지나고 있다. 이것이 보편화된 현상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신문 기사에 보면 지난해에도 있었던 현상이고 또 한두 학교가 아니라 여러 학교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니 아마도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것을 보는 사람들의 의견은 처지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라면 대체로 그런 행동에 공감을 표할 것이고 다소 나이가 든 어른들이라면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것을 보도한 한 신문 기사는 동정어린 의견도 있지만 비판적인 의견이 더 많았음을 강조하였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왜 아이들은 한 세대가 지나도록 학교를 마칠 즈음이면 교복을 찢고 책을 찢는 일을 계속할까? 우선 짐작되는 것은 ‘지겨운 학교’에서 해방된다는 기분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졸업을 하면 3년간 그렇게도 벗고 싶었던 교복이 더 이상 필요 없으니(예전에는 사복 입고 극장에 가는 것이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일 중의 하나였으니까) 이제는 과감하게 벗어던져도 된다. 기왕이면 그 의식을 극적으로, 대중 앞에서 치르자!’ 아이들 처지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될 만하지 않은가?
수능시험 후에 책을 찢는 행위 역시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3년 아니, 6년 가까이 허구한 날 교과서와 참고서에 매달려 달달 외고 반복하여 풀었던 문제집들이 오죽이나 지겹고 보기 싫었을까? ‘이제 수능이 끝났으니 시험을 잘 치렀든 못 치렀든 더 이상 필요 없고 보기도 싫다, 가라, 없어져라!’ 책장을 북북 찢어 창밖으로 날리면서 아마도 쌓였던 울분과 스트레스도 함께 날리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그러다가 재수하게 되면 어쩔래?’ 하는 비아냥이 있을지라도.
그런데 교복을 찢는 일과 책을 찢는 일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둘 다 치기어린 일임에는 틀림없으면서도 전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교복을 벗고 성인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순서상의 자연스러움이 보이지만 후자는 그렇게 보기에 어딘지 모르게 고개가 갸웃해지기 때문이다. 지식이란 한 번 써먹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서 더 큰 지식을 만드는 일종의 지속적 생산재이자 원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머리 속에 다 집어넣었으니 종이로 된 책 따위야 필요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겠으나, 설마하니 그럴 리야 있겠나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수능시험 후에 책을 찢는 행위를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하나의 모반적인 상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것은 학생들의 행위가 고교 3년, 아니 초중고 12년 동안 배운 지식이 수능시험의 종료와 함께 더 이상 쓸모없는 폐지조각이 되어버렸음을 알리는 상징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가지고 있어봐야 생활하는 데에도, 돈을 버는 데에도, 심지어 대학에서 학문을 하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 그것이 바로 학생들이 수없이 많은 날들을 밤을 지새우고 막대한 돈과 정력을 들여 습득하고 암기한 그것이라면 얼마나 허무한 일일까? 학생들은 무의식중에 책을 찢고 버리는 행위 속에서 그 허탈함을 달래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상은 일선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분들에게는 용납되기 어려운 발칙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 수긍이 가는 것은 학생들이 버린 것이 참된 지식이 아니라 지겨운 시험문제, 문제풀이를 위한 요령, 반복해서 암기한 단편적인 정보일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참으로 대학이나 사회에서 더 이상 가지고 있어야 아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다음 의문이 난감하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은 왜 그리도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기울여 그런 쓸모없는 지식을 마음 졸이며 배워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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