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9일(토) 10시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 “나의 우리말 사랑”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아침 나에게 시금치 국을 끓여서 한 사발 내 놓는 우리 집사람이 “여보 지금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데, 어떻게 해서 커다란 신문사에 가서 얘기하는 제목이 기껏 ‘우리말 사랑’이겠느냐”며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 우리나라 경제의 자주적인 토대가 와르르 무너진다고 늘 말씀을 하시더니,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말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냐. 더군다나 당신은 일생동안 통일, 해방, 민주주의 뭐 이렇게 사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이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 도발적인 기운이 막 우리를 괴롭게 하는 판인데, 거 ‘우리말 사랑’이 뭐냐고”라며 밥상에 혼잣말로 웅얼대더라구요.
저도 시간에 쫓기다보니 시금치국을 마시면서 저 혼자 웅얼거렸습니다.
“‘우리말 사랑’이라는 말을 추상적으로 읽으면 너무나 편협한 견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거야. 우리말의 위기는 우리 겨레의 위기요, 나가서는 인류 문화의 위기라고 하는 엄청 큰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데, 그렇게 짧게 이해하면 되겠느냐.”며 웅얼댔지만, 아내는 내 웅얼거림의 뜻을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잘 가’라며 배웅을 하더군요.
아침 7시30분에 출발했는데 길이 막혀서 10시 넘어서 도착했다.
제 나이를 봐선 조금 피곤하겠지만 여러분이 주신 제목처럼 ‘나의 우리말 사랑’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말씀을 들어주실래요? 목도리도 풀고 두루마기도 벗고 말씀 시작해도 괜찮겠지요?
여러분 우리나라 옷에서 두루마기라고 하는 것은 예의를 지킬 때 입는 옷입니다. 방송을 보면 두루마기를 입고 말을 타는 장면도 있고, 막 떠드는 모습도 있는데, 두루마기는 예의를 차릴 때 입는 옷입니다. 단상에 올라설 때는 두루마기를 벗는 것이 진짜 예의입니다.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럼 주제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은 통일밖에 모르는 사람, 아니면 민족문화를 좋아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도 우리말 우리글을 좋아 하는 사람. 그렇게 저를 어떤 틀 속에 집어넣고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생각을 뿌리칠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통일밖에 모릅니다. 왜냐! 우리나라의 허리를 뚝 잘라낸 이들이 누구냐. 거기서 피해를 입는 사람은 누구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에서 통일문제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들은 기회주의자죠, 반역자지죠. 그래서 이런 걸 싫어해서 “저는 통일밖에 모른다” 그러고 삽니다.
또 이 땅에 살다보니 이 땅의 백성들의 목숨과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그 가운데 우리말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어서 백기완 할아버지는 공부한 것도 없고, 주제의식도 빈약하니깐 늘 우리말밖에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니, 그래도 저는 두렵지가 않습니다. 우리말을 올바로 알고 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3살 때입니다. 황해도에서 맨발로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축구선수가 되려면 중학교도 다니고 돈도 좀 있어야 했었지요.
당시에 우리아버지는 돈벌이가 하나도 없어서 중학교를 다닐 수 없었죠. 그러다보니 길거리에서 한숨과 눈물과 콧물까지 흘리면서 헤맬 수밖에요.
8.15해방직후 서울운동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그들을 따라 가봤다. 헤엄치는 곳인데, ‘수영장 수영장’ 하더라. 촌놈이 수영이란 단어도 모르고, 수영장도 모릅니다.
▲[신문사 기자들은 수영이란 말을 한자로 쓸 수 있을까요? 난 못써요.]
‘헤엄치는데’라고 말했거든요. ‘데’는 장소, 곳을 말합니다. 저는 헤엄치는 데로 알고 있는데, 수영장이라고 말하니, 어렸을 때부터 듣고 익혀온 말은 서울과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군다나 웬 학생이 높은 곳에서 뚝 뛰어내리는데 근사하더라고요.
“야, 저 새끼 저거 속꽂이 잘하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고향에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물속으로 쏙 들어가면 ‘속꽂이’라 했다.
그랬더니 옆에 앉은 14살 정도로 보이는 중학생 녀석이 “자식이 촌놈이로구나. 다이빙이지 속꽂이가 뭐냐” 라며 군밤을 주더라.
다이빙도 몰랐다. 그건 속꽂이 아니냐. 아니 이 새끼 촌놈이 말이 많다며 군밤을 맞았다. 서울아이에게 군밤을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죽어도 속꽂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재미없어요? 대학교 국문학과 교실인줄 알아? 그냥 서울 올라가고 말까요?]
시작했다는 말 역시 우리말이 아닌 한문표기입니다. “야 너 먼저 시작해”가 아니라 “너 먼저 차름해”. 예부터 학문을 배웠던 사람들이 시작이란 말을 썼단 말이지. 이런 말은 차름이 아닌 시작이라고 불리면서 사라졌다.
1953. 1월이었습니다. 그때 이 땅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서울에 가면 대우건물이라고 있습니다. 그 뒤에 폭격을 맞아 빈 공터가 있었다. 이곳에 눈이 하얗게 쌓이고 달빛이 비치니 잿더미 폐허가 멋있더라고요. 한 조각 그림같았지요.
그때 그곳에 제가 채알을 쳤지요.
▲[저 어릴 땐 채알치고 잔치했지 천막치고 잔치를 한 적은 없다. 천막하면 금방 귀에 와도 채알 이러면 잘 모른다. 우리가 우리말을 귀 기울이는 문화적 대반란의 시기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채알을 쳐놓고 전쟁에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들 10명을 모아놓고 채알학교를 했다. 이를 달동네 배움터라 했다. 등사기로 밀어서 달동네 배움터라는 종이 열장정도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몇 일후에 떡대 5~6명이 왔다. 서울 남대문 경찰서에 가서 나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배를 걷어찼다.
“너 이 자식아 달동네라 했겠다. 달동네가 뭐야. 하꼬방이라 해야지”
“아저씨 하꼬방은 왜말이잖아요”
“이 녀석 빨갱이로구나. 네 배경을 대라”이러면서 한 일주일을 때렸다. 그 안에서 꽁보리밥과 고추장을 먹었던 것을 게웠다.
게웠다는 토했다의 말과 같다.
기가 막힌 세상에 사고 거야.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내가 게운 것은 그 전쟁 통에 꽁보리밥에 고추장이야. 천장도 없는 그곳에서 붉은 색 음식물을 게웠다.
달동네가 뭐냐면서 빨갱이로 몰았다. 1주일간 맞았지만 뭐 나올게 없지요.
1주일 후에 나와 보니 아이들은 “선생님은 빨갱이”라며 사라졌다.
채알도 없어졌다. 열아홉인가 스물 때였다.
지금은 웬만해선 달동네라 합니다. 신경림 선생 등 다른 사람은 산동네라고도 하지만.
우리말을 쓰다가 또 다른 시련을 겪은 일이 있습니다.
1960말~1970. 서울 남산이라는 산, 거기에 굴을 뚫었다. 신문에서는 남산 제1터널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어느 신문사 문화부에 전화를 걸었어요. “여보시오. 기사에서 남산‘제1터널’이 아니라 ‘맞뚜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때요? 바닷가의 낙지구멍, 게구멍 등 맞뚜레라는 의미가 있다. 터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맞뚜레는 의미가 담겨있다. 좋은 말이니 맞뚜레로 쓰자”고 말을 했지요. 전화를 받은 기자는 “괜찮은데요?”라고 말한 후 며칠 후에 다시 연락을 해보라 했었지요. 며칠 후에 다시 연락해보라 해서 다시 연락했더니 이미 사장된 말이니, 못쓰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저는 그때나 지금도 인격이 초라합니다.
“그 말은 폐기 된지 오래돼서 사용하기가 힘들겠습니다.”
“야이 쌍놈의 새끼야. 맞뚜레라는 우리말이 폐기 된지 오래됐다구. 너 이 새끼 이름이 뭐야. 나와 때려죽일 테다.”
▲[“거보쇼. 맞뚜레는 좋은 말인데, 사용해주쇼”라고 말하는 것이 근사할 수 있겠지만, 이런 말투는 사기꾼의 말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 제일 높은 사람이 사는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
“난 시민인데, 남산에 굴을 뚫으면서 제1터널, 제2터널 하는데 우리말로 사용하면 안 되겠어요?”
“좋은 말이 뭐있어요?”
“인천, 평택, 군산, 남해가면 게구멍이 맞뚫리는 것이 맞뚜레라 불리오. 터널 하지 말고 맞뚜레로 합시다.”
“그 말 괜찮은데요. 며칠 후에 다시 해보겠어요?”
▲[여러분. 제가 진짜 기대에 부풀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조국 근대화 정신에 맞지 않아서 못 쓰겠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소리쳤지요.
“야이 쌍시옷 같은 새끼야. 요놈의 새끼. 미국말을 꿔다 쓰는 게 근대화냐. 너 죽어.”
“너 이 새끼 누군데 여기가 감히 어딘데 쌍놈의 새끼 너 누구야, 어디에 있어?”
“너 이 새끼 네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 비서관이 아니로구나. 나 무교동 오스카의 찻집에 앉아있다. 와라”
잠시 후 큰 목소리가 카페를 울렸지요.
“누가 백기완이야.”
권총 개머리판에 머리 뒤를 맞았다.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
나를 질질 끌고서, 근처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 때렸다. 자꾸 때리고, 까무러치면 찬물을 끼얹고, 몇 번 거듭하다가, 제가 물었습니다.
“야 너희는 왜 날 잡아다 때리냐”
“네가 까분다면서.”
“내가 뭘.”
“글쎄 네가 까분다던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때리라고 해서 그냥 때린 것이었다.
“알겠다. 그런데 할 말이 있다. 터널을 맞뚜레라고 바꾸자고 말한 것 때문에 맞는다. 그런데 이게 까분 거냐. 어.”
“젊은 남자 한명이 야. 거 말 된다. 그냥 내보내.”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날 때려죽여도 좋으니, 맞뚜레라는 말이 아주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게 해다오”라며 말을 하고 나왔다.
지금까지도 맞뚜레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는다. 없어지고 있다.
남원에 한 대학에 강의를 했다. 학생들 1천200명을 만나러 가는데 성춘향 터널이 나왔다. 울컥했다.
“야 이놈들아. 춘향이가 여인의 패박(상징-중국말)인데, 그런데 터널이 뭐냐. 강의 듣지 말고 시청, 군청 가서 간판 때라고 항의하란 말이야”
“네.”
“한 시간을 떠들다 서울로 갔는데, 한 2년 후에 목포에 또 전문대학에 강의로 갔을 때도 여전히 성춘향 터널이었다.”
아. 미치도록 울분이 올라왔다.
“이승만 정권, 미 제국주의 타도하자. 박정희 전두환 타도하자. 그 우두머리 미 제국주의 타도하자”며 일생을 살아왔는데도 ‘남원군청 타도하자’라는 울분이 솟구쳤다. 목포의 지성들아 이놈들아 ‘성춘향 터널’이 뭐냐. 그러고도 대학생들이냐. 뭐하고 있느냐.”
여러분 내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내 말대로 그 당시 맞뚜레라는 말을 썼다면 터널의 자리를 맞뚜레가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의 말이 남미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갔을 때도 여전히 ‘성춘향 터널’간판이 그대로였다.
내가 우리말을 사랑하는 과정은 이정도 설명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들어주실래요?
사장님 들어주실래요? 대학생 때 내 강의를 들었을 땐 주먹도 쥐어주고, 발도 굴렀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있구나.
“최고 경영자의 입장에서 떡 굽어보는 모습, 그러나 진리 문화 예술이라는 것은 깨우치자마자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이는 것이다. 사장님이 이를 들어주면 안 되겠어”]
세 가지만 부탁합시다. 우리말이 아닌 우리말이 너무 많이 사용되는데…….
첫째는 축구장에서 파이팅이라는 말을 하는데, Fighting은 싸우자는 말이다. 축구, 배구, 야구 좀 하는데 싸울 것 뭐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파이팅’이란 말을 사용하는 흔적이 없다. 대학의 유명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파이팅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아리아리’가 있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진도아리랑이 있다. 여러분도 다 알고 있는 ‘아리아리’.
‘아리아리’는 없는 길을 찾아가고 없는 길을 만들어가자는 뜻이다. 우리는 상대와의 경쟁에서 쓸데없는 학살용어는 버리고 ‘아리아리’해가자.
‘아리아리’해가자 이거야.
공차기세계큰잔치. ‘월드컵’이란 단어도 한동안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잔치이자 인류의 잔치이니 말을 바꿔보자고 했더니 방송에서 멋있다고 한두 번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없어졌다.
대학원도 나오고 박사명예도 있는 사람이 ‘파이팅’ 그냥 쓰는 말인데 사용해라고 했겠지 뭐.
여러분이 앞장서서 창피한 외래어를 바로잡자 이거야.
두 번째는 웰빙이야. WELL-BING. 건강하게 산다, 행복하게 살자하면 되는 거야. 외국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웰빙이라니.
웰빙은 튼튼하고 아름답게 살자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넉넉’이란 말로 사용할 수 있지. 이걸 꼭 웰빙 하냔 말이야. 이 말 좀 안 쓰게 ‘넉넉’이란 말 좀 쓰게 하자 이말 이지.
세 번째는 자동차 열쇠를 꼭 KEY라 한단 말이지. 군대에서 꼭 키라 했거든. 박정희 때 생긴 말이야. 우리들의 전통적인 문화의 삶에 열쇠라는 말이 없어지고 있잖아. 경기신문사부터 키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거야.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정론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론’이란 중국말을 꿔다 썼습니다.
예부터 우리는 그 올바른 말, 곧은 말이 없을 때에는 사람도 없어지고 문화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정론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정론. 곧은 글 우리 말. 곧은목지라 한다. 일을 너무 해서 목이 부러져 목이 딱 붙었다는 의미다. 목이 붙었으니 몸도 함께 움직인다. 목이 붙었으니 온몸이 함께 이동하는 사람을 곧은목지라 한거야.
곧은 복지는 눈이 4개야. 발끝에 두 개의 눈이 있다. 이는 발끝에 닿는 돌부리를 보고, 얼굴의 눈은 먼 산을 보자는 것이라. 곧은목지는 앞만 보고 가지 않을 수 없다. 태산중령이 가로막아도 거친 물살, 바다가 앞을 가로 막아도, 썩어 문들어진 놈들이 칼을 디밀어도 앞만 보고 가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현대는 경기신문을 빼놓고는 옳은 글 바른 말을 하는 곳이 없단 말이야. 경기신문은 곧은목지다라는 의미를 알고 있고 경기신문이 곧은목지가 되라는 말이다.
“백기완이가 세상을 모르는 구나. 신문사는 한 기업체야. 거리의 아우성이 담겨져 있는 곳이 아니라니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마음에 없는 소리도 세련된 소리라고 독자들을 속일 가능성이 있으니깐, 신문사 여러분이 곧은목지가 될 수 있게 노력해 달라는 말이다.]
두 번째로 무엇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저치에 대한 꿈이 사라진 것. 예부터 시집, 장가가는 말을 싫어했다.
시집가는 아가씨들은 애 낳고, 빨래하는 것이라 여겼다. 남의 종이지. 그래서 저치라는 말을 사용했다.
저치는 주저앉으면 엉덩이가 썩는다는 말로, 끝없는 대양을 향해 달려가선 꿈을 심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는 지구는 땅별이라 한다.
내가 어렸을 때도 “할마이, 배고프다야. 저 하늘의 별 좀 따 달라야.”
그럼 할머니가 “야 부심아, 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이유 아나. 자들도 배고파서 그런 거야. 제들도 우는 거야. 이담에 커서 별나라 가는 달구지 만들어서 떡을 한가득 갖고 가서 별들에게 나눠주도록 혀.”
희망, 내일은 우리말로 하제라고 하죠. 여러분. 희망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최소한도 10억을 갖고 있어야 늙어서도 살 수 있다는 거야. 10억 만들기란 계도 있어. 한 개인이 이 현대라고 하는 문명의 잘못을 개인이 돌파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좌절됐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의 잘못된 것을 뚫고 나가는 밖에 더 있느냐 말이야.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외국의 잡지를 보니 미국은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에게 사장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넌 이담에 커서 사장이 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경영해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시작된 사장교육에 초중학생이 200만 명이 신청하고 교육을 받았어.
어렸을 때부터 사람교육을 받아야지 사장교육을 받는 거. 사장이라고 해서 모범적인 사람을 배운다고 하니.
이것뿐만이 아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억만장자들이 보는 부자 학이 있다더라. 4일간의 교육을 받는데 670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루 1시간 교육인데 670만원이다. 이곳은 억만장자만 들어갈 수 있다. 1억불도 모자라 10억불정도 돼야 한다.
열사람이 10억을 가지면 100억, 천 사람이면 1천억, 만 사람이면 1조다.
인구는 사람머리라 할 수 있다. 남쪽의 사람머리가 1사람당 10억원씩 가지면 그 돈이 얼마요. 우리 국민의 총생산이 약400조 정도다. 국내총생산을 나눠도 부족하다.
너도 나도 부자의 관념을 심어주게 되면 무슨 사람이 되느냐. 뚱속(야욕)밖에 안 된다.
그래서 희망이 없는 것이다.
미국 아이에게 너 앞으로 뭐하고 싶냐 물으면 ‘자가용으로 별나라를 다니는 것’ ‘돛단배(요트)를 갖고 싶다’ ‘숲속에 집을 갖고 싶다’ 등이다.
이들에게는 이웃과 더불어 삶을 영유하는 꿈이 없다.
우리 노래에는 ‘애들아 나오라 달 따러가자, 순이 엄마 방에다 담아 드리자’ ‘순이넨 불을 못 켜서 순이 엄마 바느질을 못 한다더라’ ‘애들아 나오라 달 따러가자’가 있다.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불러오면서 잔뼈가 굵어졌는데 자가용도 아닌 별나라를 다니자한다.
미국 국방성에서 발표하기를 이 땅별 겉모습(표면)이 30년 동안 0.6도가 올랐고, 알프스는 눈이 녹아 썰매장이 없어졌다. 앞으로 2도가 더 오르면 남극과 북극의 얼음산이 몽땅 녹아내리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히말라야는 얼음두께가 1년에 15m씩 사라지고 있다. 주변의 7개강이 범람했다. 사람들이 농사도 못 짓는 현실이다.
2도만 더 오르면 300만년 전 바다의 높이만큼 높아져 생태계가 변해 혹성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나왔다.
한 개인의 뚱속 때문에 만들어졌다. 언론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을 해야 한다. 그 희망이 뭐냐. 인생을 보면 실패한 사람이 많다. 나는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 진짜야.
언젠가 누가 날보고 “선생님 일생은 어떠하였는지요?”라고 물었다.
“첫발도 없었고 마지막 디딜 발길도 없어진 사람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실패조차 거부하는 것 아닙니까?”
이때 어리석은 노인은 주르르 울기만 했습니다.
첫발도 마지막 발도 내딛지 못하는 사람. 가랑잎과 쭉정이 중에 쭉정이도 되지 못했다. 가랑잎은 바람에 휘날리며 바람에 바르르 동요하기도 하지만, 끝내 바스러져 사라지지만 쭉정이는 바람이 불어도 떨지도 않고,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버려지는 쭉정이. 그것이 나의 일생이다.
나 같은 사람은 다시 초청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인류가 외치는 공상. 한미자유무역협정, 환경오염 등 어느 것도 우리나라 목소리가 없다.
한미무역협정은 이미 미국의 한 속국이 됐다. 세계는 하나인데 뭐.
여러분. 나 같은 사람의 생각이 미국이 요구한대로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장사하는 사람 중에 손해 볼 수도 있고, 이익을 남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자주성은 완전히 물 건너간다. 통일을 해도 우리가 원하는 통일이 아니다.
이라크전쟁은 석유 때문에 일어난 것 다 알고 있음에도 또 다시 군인을 증파한다고 부시는 광분하고 노무현은 찬성하고 있다.
인류의 최종멸망은 결코 반역자나 인류문명을 망치는 사람의 손아귀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희망한다. 나는 노나메기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게 올바로 잘사는 의미를 말한다.
동해안의 바닷물은 따뜻해졌다. 물길이 변한다. 생태계가 바뀌고 있다. 지구를 살리는 힘은 노나메기 정서라 생각한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 전 세계적으로는 철학도 있고 사상도 있다.
마지막으로 짧은 시 하나 읊고 가겠는데, 들어주실래요?
1998년 6월. 연구소가 생긴지 30년이 넘었지만 문을 닫게 됐다. 전화 4대를 때려 부쉈다.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성격이 고약한 이유다. 연구소의 낡은 냉장고도 던지려 했더니 문이 열리더라. 그 안에 반 정도 남은 소주가 있었다. 던지려는데 얍삽한 생각이 들더라. 내용물은 마시고, 껍데기를 버리자. 따라 마시고 나니 너그러워지더라.
비가 많이 오더라.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밖에 나갔더니 봉투가 있더라. 3만원이 있더라. ‘선생님 힘내십시오’라고 쓰인 봉투였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날 인천에서 강의를 마친 후 지하철로 돌아오는데, 한 사람이 “유명인이 만원 지하철을 타네”라며 말을 건넸다.
‘즉각 반응’을 하려했는데 참았다.
이젠 나도 세련이 됐는지 “한국 사람들이니 여전히 지하철을 타죠”하니 “40년 전에 네가 매일 술 먹고 돈 안내고 손님 쫓아냈잖아. 그래서 망했다. 아냐. 내가 그 곱창집 주인이란 말이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와 함께 지하철에서 내려 곱창 집을 찾았다. 그러다 곱창 집을 찾지 못해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삼겹살집에서 먹고나오고 보니 봉투가 없더라. 어물어물했더니, 한 주인이 “늙은이들이 재수 없이 이게 뭐야.”라며 화를 냈다. 안에서 아주머니가 나와선 “선생님 점잖으신 듯한데, 담에 들러서 주세요”하더라. 해방 된 거다.
그 곱창집 주인은 밖으로 나와선 나에게 말했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잖아. 그때도 입만 갖고 다녔잖아. 돈 좀 갖고 다녀라.”
‘한발자욱만 더’
한 발자욱만 더
단 한 발자욱만 더
밀어내보고 죽어도 죽자.
한 발자욱이 안되면
단 한치, 단 한치 만이래도
밀어내다가 쓰러져도 쓰러지자.
아! 어이타 이놈의 세상은 밀어낼수록
캄캄한 수렁 여기서 주저앉는다는 건
패배보다 더 끔찍한 과거라
밤이사 칭칭 드세지만
한 발자욱만 더
한 발자욱만 더…
- 백기완
백기완 선생은 1933년 황해도 은율 구원산 밑에서 태어났다. 젊은 날엔 농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빈민운동을 해왔으며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웠다. 이후 1973년엔 유신독재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청헌 100만인 서명운동’을 해왔으며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로 제 이름을 바꿨다. 1987년, 1992년은 민중대통령 후보로 나왔고 2000년엔 한양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으며 계절마다 내는 책 ‘노나메기’ 발행을 하고 있다.
정리:한형용기자 je8day@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