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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 잊고 친구여 잘가라

‘노동자 시인 박영근’ 1주기 추모행사

 

인천민예총 유고시집 출간… “민중속으로” 외치며 노동운동 앞장
생전 모습 담은 사진슬라이드 상영·추억담 나무며 젊은 날 회상


“이 땅에 내려놓은 간절함 마저 잊고, 친구여 잘가라.”

작년 이맘때 인천에 살던 한 시인이 죽었다. 노동자시인으로 불리던 고 박영근.

그가 떠난 지 꼭 1년이 된 지난 10일, 그의 친구들과 동료, 선후배들이 인천 주안의 소극장인 컬쳐팩토리에 모여 그를 추억했다. 땅거미가 내리는 늦은 7시 주안역 부근의 휘황한 거리에, 그 거리가 과거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기억하는 중년의 예술가, 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나. 그들은 대부분 80년대 초·중반에 인천의 공단에 취업을 하거나 야학을 통해 노동자 문화운동, 노동조합결성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50을 전후한 나이의 그들은 안기부 대공분실과 공단의 쪽방, ‘쇠붙이로 녹이 슬던 젊음’과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열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70·80년대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를 외치며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던 몇몇 인사들은 세상이 좋아진 덕에 교수가 되거나 정치판에 뛰어들어 한자리 차지하거나 도지사까지 되었지만 박영근 시인 1주기 추모행사에 모인 이들은 병든 몸과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눈빛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현장으로 향했었기에 십 수 년이 지난 뒤에나 대학졸업장을 받고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추모행사는 박영근 시인 생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슬라이드 상영, 크로스오버 국악그룹 ‘소리지기’의 연주, 친구들의 추억담을 들려주는 자리가 이어졌다.

벗들은 시인의 유고시를 묶은 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의 시편을 낭송했다.

“그 언제부턴가/가을도 다 지나고/가슴속에 식은 채 묻혀있던/불덩어리 하나/다 피어나지도/저를 떨구지도 못한/꽃덩어리 하나/오늘은 허연 잿더미를 헤치고/말갛게 불티로 살아난다/이제 그만/저를 놓아주세요/찬 바람 속/몹시 앓다가/한 여드레쯤 지나면/문밖 골목에도/고즈넉이 흰 눈 내리겠다(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중 ‘늦은 작별’ 전문)

추모행사를 치르던 작은 극장에 가득 찼던 묵적지근한 슬픔은 어쩌면 그가 떠나고 없는 빈자리가 서러워서만이 아닌듯 했다. 그건 한 시절 목숨 바쳐 살았지만 떠난 자가 내내 힘겹게 끌고 가야했던 “어디 쯤에서 길은 다시 물음이 되는가”라는 질문 탓일 수도 있었고 또 남겨진 자들이 막막하게 끌어안아야 할 ‘못다한 사랑’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영근이는 술만 먹으면 시도 때도 없이 친구를 불러내 취하고 노래하고 끝내 울었다”고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생전의 시인을 기억했다. 술을 좋아했고 가난했고 친구를 많이도 괴롭혔고 뜨거운 가슴 탓에 힘겨웠던 모양이다.

친구들은 그의 유고시집을 그린 커다란 걸개그림을 앞에 놓고 생전에 술을 좋아하던 그와 소줏잔을 나눴다. 그리고 유고시집을 향해 술을 뿌렸다. 걸개그림에 뿌려진 술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지인들은 박영근의 시에 안치환이 노래를 붙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함께 불렀다.

그를 추억하기 위해 그 자리에 왔던 한 미술비평가는 박영근와 함께 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그 맑았던 시절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영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고 박영근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군 마포리에서 태어나 2006년 46세에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계했다. ‘반시(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구로3공단 제본회사, 곤로회사, 인천 보르네오가구 등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며 노동운동, 문화운동에 참여했다. ‘취업공고판 앞에서’ 외에 작품집으로 ‘대열’(1987), ‘김미순傳’(1993),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저 꽃이 불편하다’(2002) 등의 시집 5권과 산문집 ‘공장옥상에 올라’(1983), 시평론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2004),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2006)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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