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해를 가늠하는 3월도 다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남도로부터 꽃소식이 빠르게 올라 오련만 올해에는 유난히 겨울 끝이 길게 이어져 여전히 겨울과 봄을 오락가락 한다.
달력을 유심히 보니 양력은 3월 끝을 보이고 있으나 음력으로는 이제 겨우 2월 보름을 넘기고 있다. 양력과 음력이 딱 들어맞는 다고는 할 수 없으나 추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다보니 음력의 세월 가는 이치 속에 눈이 멎는다.
예전에 비해 추위 끝이 길다고 느낀 것은 우리가 늘 보아오던 양력상태의 달력에 익숙해져 작년의 3월과 재작년의 3월을 비교하며 다름을 알아차린 것이다.
젊은이들의 양력에 대한 이런 익숙함은 또 다른 문화에 익숙한 장년의 어른들은 음력의 달력을 보며 젊은이들이 알아채지 못한 문화코드로 그들만의 날씨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있다. 어수선한 나라 안팎의 소식만큼이나 날씨도 하 수상하다고.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순환 반복하고 있다. 그중 날씨만큼 순환의 미덕을 실천하는 하늘의 이치가 또 있을까 마는 계절마다 고유의 가치와 결과를 매번 일정한 주기로 보여주는 태양력과 태음력의 위력은 왜 고대로부터 왕조가 바뀔 때 마다 책력을 새롭게 일신하고자 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이야 달력이 흔해 표시된 대로 이해하고 따르고 하면 되지만 기준점과 푯대가 명확하지 않았을 때에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지혜이자 지식이며 권력이었을 것이다.
내 몸도 순환의 미덕을 발휘하는 가 보다. 봄의 문턱에 마음은 활개를 펴며 산과 들에 나가 있는데 몸은 아직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 인 경우, 미덕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뭔가 노력이 필요하다. 몸을 좀 더 움직여 봄에 맞는 알맞은 움직임이 필요한데 오락가락 날씨 탓을 하자면 겨우내 움추렸던 몸이 아직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 몸이 이러하니 저 만큼 앞서가던 마음도 이내 몸 속으로 되돌아오며 밖의 봄기운을 의심해 본다. 순간 순환의 구조가 역(逆)으로 바뀌며 악순환(惡循環)으로 넘어가는 찰나이다.
어수선한 날씨를 빌미로 이어지는 미묘한 마음의 갈등은, 생각이 꼬리를 물며 여기에 머무르자, 내 주변을 삼가며 행동과 말을 조심하고 옛 성인의 지혜를 빌려 온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남고 하늘을 거스르는 사람은 망하느니라.”(子曰 順天者存 逆天者亡) 공자께서 명심보감 천명편(天命篇)에서 말씀하신 내용인데 봄기운을 의심하는 순간 하늘을 거스르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 내안의 모순이 세상을 향한 눈을 뜨게 하는 접점이 된다.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회의 다양한 일들은 어느 순간 내안의 모순과, 내안의 역천자(逆天者)의 모습으로 거울 되어 돌아온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순간 나는 나와 세상을 거스르며, 하늘을 거스르며 나를 지탱시키는 다른 힘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간다.
세상을 탓하며, 이웃하는 이들을 탓하며, 급기야 사랑하던 이들 마저 내 건너편에 세우며 마주하는 순간 하나이던 나는 둘로, 셋으로, 넷으로 자꾸 분열 되어간다.
이내 내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의 파편들만 즐비하게 널려 있다. 나의 흔적들은 고유한 나를 잃게 하고 변질된 또다른 나를 만들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악순환의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참혹하다.
3월 말미 ‘하 수상한 날씨를 보며’, ‘하 수상한 세월을 들여다본다.’ 그래도 봄은 온다고 남도 바람 말없이 내게 전하고, 땅 끝 순천의 금전산자락 금둔사의 매화는 흐드러진 자태 향을 머금고, 내리는 하얀눈 온몸으로 맞으며, 꽃과 향내 잠시뒤로 미루었지만 내 가슴 깊이 파고드는 봄의 기운은 3월을 뒤로하고 순환의 미덕 4월로 이어간다.
봄은 갈무리하는 가을을 위해 수고로이 대지를 열고, 분열하는 나를 넘어 내안에 세상을 통합하고 순천자(順天者)의 길을 연다. 매해 새로운 봄이 오지만 올해와 같은 봄은 없다. 다만 매년의 봄을 통해 가을의 열매를 기대하듯 올해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용기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