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매우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언어는 시대를 선동하고, 사람을 분류하며, 상황을 규정짓는다. 즉 언어로 구체화되기 이전까지 그 어떠한 가치는 무정형의 모습으로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며, 그 존재에 대해 인식하지만, 구분짓거나 규정짓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면서, 이제 모습을 갖게 되고 선이 그어지며, 그 선의 틀 안에서는 실제나 진실보다는 언어라는 모습의 대상으로 규정되기 시작하게 된다.
예컨대 ‘왕따’라는 언어가 있기 이전에, 우리에게 한 친구를 따돌린다는 문화에 대해서, 가사 어느 학교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반화되지는 않으며, 그 존재에 대해서 규정짓거나 확대시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왕따’라는 언어가 존재하면서부터, 그 언어는 친구를 따돌리는 하나의 유행이 되고, 문화가 되며 힘이 되고 이제 왕따라는 언어가 틀을 형성하게 됐다. 어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친구를 따돌린 것인지 어떤지보다는 왕따라는 표현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로 관심은 바뀌어지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심각한 것까지 왕따라는 표현에 잠식되고 만다.
요즘 언론 등에서 심심찮게 좌파, 우파란 표현을 접하게 된다. 우리에게 좌파는 웬지 공산주의와 연결되고, 북한을 연상시킨다.
어떤 때에는 좌파라고 하면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 실제로 그런 의미로 언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 국민 모두는 국론의 분열을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언론에서 국론의 분열을 우려한다는 미명하에 좌파와 우파의 표현을 너무도 남발하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언어는 실제보다 형식의 틀에 사람들을 가둘 수 있고 때로는 맹목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인간에게 있어 불과도 같이 그 사용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좌파와 우파라고 할 때, 과연 좌파의 기준은 무엇이고, 우파의 기준은 무엇일까.
기존에 우리들은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기도 해왔다. 그와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진보와 안정에 더 가치를 두는 보수로 그냥 표현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또 분배는 좌파, 성장은 우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분배우선론, 성장우선론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굳이 좌파와 우파로 편을 가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예컨대 서민은 좌파이고, 중산층이면 우파인가, 또는 민주당은 좌파이고, 한나라당은 우파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좌파이고 어디까지 우파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좌파와 우파는 그 가리키고자 하는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언어는 틀을 형성하고 선을 긋게 만든다. 이는 사람들을 오히려 분열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물며 그 대상이 정확치 않은 언어로 선을 긋게 된다면, 이는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매도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진보세력인데도 우파로 분류될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보수세력인데도 좌파로 분류될 수 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가치는 다원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고, 다양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그러한 가치를 존중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반면 이러한 다원주의사회에서는 나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의 견해도 존중해 줘야 할 것이다.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생각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물론 사회현상을 하나의 묶음으로 규정짓고 이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저널리즘의 발로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북한과 민감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시기에, 굳이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좌파와 우파라는 기준으로 사회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줄을 긋고 선의 양쪽으로 사람을 편가르는 좌파와 우파식 분류태도를 경계한다. 아울러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함께 공존하면서도 보다 더 강한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성숙한 시민사회가 구현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