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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계적 석학 우장춘박사 51주기를 기리며

 

우장춘 박사는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두 개의 기본종을 이용해 이종배수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종의 합성’이 어떡해서 이뤄졌는가를 증명한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유전·육종학자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배추와 양배추를 기본종으로 해 이들 둘을 교배해서 이종배수체인 유채를 직접 만들어 내어 식물 진화의 한 부분을 밝힌 큰 과학자이다.

오는 10일은 세계적인 석학인 우 박사의 서거 51주기로 이를 기리기 위해 우 박사의 업적에 대해 회고를 해 보고자 한다. 우 박사는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위에서 언급한 배추과 작물의 종의 합성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다끼이 종묘회사에서 근무했으며 1950년 3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부인과 자식은 전부 일본에 남겨 뒀으며, 1959년 8월 10일 서거할 때까지 일본을 방문하지 못했다. 우 박사가 1930~40년대에 다끼이종묘회사에 근무하실 때 겹꽃 페튜니아를 육성해 시판할 수 있게 했다. 이때에는 전세계 많은 육종가들이 겹꽃 페튜니아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실패했는데 우 박사가 세계 최초로 겹꽃 페튜니아 종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개량했던 것이다.

이즈음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은 됐으나 일본인에 의해 채소품종 개발과 종자의 공급이 이뤄지다가 하루아침에 그 체계가 무너져 버려 농민들에게 채소 종자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뜻있는 몇몇 사람들이 세계적 유전·육종학자인 우 박사를 모셔오기 위해 1947년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위원회’를 설립해 귀국운동을 벌이게 됐다. 일본 측의 우 박사 귀국 방해 등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50년 3월 8일에 우 박사는 부산에 도착해 조국의 땅에 첫걸음을 내딛게 됐다.

귀국한 우 박사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중앙원예기술원장, 원예시험장장 등을 역임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최신의 전문 지식과 기술 및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최대한 이용해 불철주야 품종육성과 종자 생산지 선정, 인재양성 등에 몰두했다.

그 이후 우리나라의 채소품종 육성 기반과 기술이 일취월장하게 발전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은 우 박사의 공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 하지 못할 것이다.

우 박사의 업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무, 배추, 양배추 및 양파 등의 우량품종 육성과 품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료를 양성했는데 웅성불임성, 자가불화합성 등 지금도 일대잡종 품종 육성에 사용되고 있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충실하고 병에 걸리지 않은 건전한 종자를 다량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상 등 여러 가지 환경 조건이 좋은 특정한 지역이어야만 하는데 우 박사는 섬을 포함해 거의 우리나라 전역을 직접 돌아보시고 종자 생산지를 선정했다. 그 결과 1954년도에는 진도에서 무와 배추의 보급종을 생산할 수 있는 식물체의 원종 종자를 약 6천800L 생산했으며 드디어 1957년도에는 국내자급이 가능하게 됐다.

이외에도 우 박사가 우리나라 농업에 이바지 한 다른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우수한 육종가를 양성했으며 그들이 연구기관과 종자회사 등으로 진출해 많은 분야에서 연구와 품종개발을 동시 다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 박사는 육성한 주요 품종들의 육종 재료들을 종자회사에 분양했고 종자회사는 우 박사가 만들고 다듬어 놓은 우수한 육종가와 재료들을 이용해 다양한 품종을 육성하게 됐다.

우리나라 채소산업의 발전을 위해 이렇게 혼신을 다하신 우장춘 박사는 환국한지 겨우 9년 반이 흐른 1959년 8월 10일 타계했으며 따르는 많은 인파속에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에 안장됐다.

타계하시기 하루 전인 8월 9일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화포장을 수여했으며 그 자리에서 그는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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