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직업은 물리학자이지만 물리학 이외에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현대인으로서 과거 세계사에 이름을 떨치지 못한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때로 한국의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 이름을 떨친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몽고, 중국, 인도, 영국 등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은 나의 게으름 때문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역사가 무슨 필요가 있냐고 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명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라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1930년대 전세계를 휩쓴 세계대공황을 다룬 책을 읽으며 요즘 경제 상황과 너무 유사해 놀란 적이 있다.
개인, 기업 모두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투만 잡지 않으면 된다는 매우 위험한 모험적인 투자를 하는 것은 세계대공황 직전인 1920년대 말이나 현재나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끊임없이 크고 작은 경제공황이 반복되고 있지만 투자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 다시 반복하게 된다’란 미국의 철학자며 시인 조지 산타야나의 말처럼 현재와 소통이 없는 역사는 죽은 역사이며 역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단히 국민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역사의 중요성을 계몽하고 역사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국사와 세계사를 선택과목으로 바꾼 최근 발표된 수능시험 개편안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최근 호주 제2의 도시인 멜버른을 여행하면서 크게 느낀 점이 있다.
이 도시의 가장 좋은 위치에 ‘기억의 전당’(shrine of remembrance)이라는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전당은 서울 용산에 위치한 전쟁기념관과 유사하나 차이가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우선 전당 앞 광장의 크기와 경관에 감탄하게 된다.
광장의 넓이는 말할 것도 없고 2km 정도 떨어진 멜버른 고층건물들의 스카이라인이 전혀 막힘이 없이 고스란히 사진 속으로 들어와 사진 찍기 최적의 장소이다.
또 멜버른의 중심과 전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돼 시내 어디서나 특이한 구조의 전당을 볼 수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아내고, 버스, 전차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접근하기 쉽다.
전당 옥상으로 올라가면 멜버른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전당 바로 옆에는 거대한 야외 정원인 로열 보타닉 가든이 자리 잡고 있어 관광 코스로도 그만이다.
전당 기둥에는 KOREA 1950-1953, BORNEO 1962-1966 등으로 호주가 참전했던 나라들과 기간이 적혀 있고 별 모양을 한 담으로 이뤄진 입구에는 ‘잊지 않기 위해’(lest we forget)라는 문구가 크게 그려져 있다.
전당으로 들어서면 전몰자에 대한 애도와 감사의 마음이 절로 생길 만큼 엄숙하고 세심하게 디자인돼 있다.
전당 내부의 곳곳에서 많은 호주 청소년들이 학교 수업의 연장으로 이곳을 방문해 신사복으로 품위있게 차려입은 나이 든 재향군인들의 설명을 듣고 있는 것도 감명 깊었다.
우리도 독립기념관, 전쟁기념관, 국립현충원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교육의 장소로 얼마나 활용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호주처럼 이들 장소를 활용해 이념적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 청소년들에게 평범했지만 국가의 부름에 기꺼이 응했던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이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갖도록 교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필자의 작은 소망을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