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여름이 주인 행세를 하더니만 추석이 지나자 가을이 제자리를 차지한 듯하다. 그게 순리다.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다. 가을은 소리의 계절이다. 논밭에 벼 여무는 소리, 수수더미 영그는 소리, 풀벌레 소리 등이 한창이다. 이들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소리 못지않게 사람들이 책읽는 소리가 더욱 정겹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달빛과 꽃 색깔이 아무리 좋아도 가족들의 화목한 얼굴빛 만 못하고, 가야금과 거문고 켜는 소리, 바둑장기 두는 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자손들이 책읽는 소리만 못하다.’는 글귀가 있다. 그렇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의 바다를 항해해도 활자매체를 통한 책읽기만큼 좋은 게 없다. 영상시대에도 활자로 된 책읽기는 여전히 정겹다. 책의 숲에는 우리가 건져낼 수 있는 구슬이 너무나 많다. 여름내 무더위에 지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달려온 삶들이 아닌가.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가을이 왔지만 책읽기도 빠트릴 수 없는 일상이 돼야 한다.
예전의 독서는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서당에서 낭랑하게 목청을 돋우고 가락에 맞춰 책을 읽었다. 이젠 드라마에서나 보는 풍광이 돼버렸지만 나는 요즘도 서재에서 소리 내어 읽는 독서버릇을 이어가고 있다. 책읽는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스며들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외워진다.
중세 유럽에서도 책은 반드시 소리를 내서 읽었다고 한다. 눈으로만 읽는 묵독(默讀)은 그 비밀스러움 때문에 요사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신성한 경전을 읽을 때 문장의 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고 성스러운 단어를 읽어야 책장에 쓰인 ‘죽어 있던 낱말’들이 훨훨 날아올라 의미화 된다고 여긴 듯 하다. 소리 내어 읽는 독서법은 동서고금이 같았던가 보다.
요즈음 책읽는 소리가 뚝 그쳤다. 나홀로 지내는 인터넷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책읽기가 낯선 손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준비가 필요하고 신경이 쓰이는 버거운 대상이 된 것이다. 힘든 삶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소리 내어 읽어보자. 책읽는 소리가 정겨운 이 가을에 소리 내어 읽으면서 상쾌한 리듬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소리를 통해 기운을 얻을 수 있기에 그렇다.
글을 갓 깨우친 어린아이들의 떠듬떠듬 읽는 소리가 얼마나 가족들을 즐겁게 하는가. 팍팍한 세상을 건너가다가 만나는 짧은 순간들로 인해 우리네 삶이 새로운 원기로 충만해 진다. 어린자녀들의 책읽는 소리를 들을 때도 그러하다. 그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는 성독(聲讀)일 때 더욱 더 그렇다.
‘글을 읽는 것이 곧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이라고 가르쳤던 우리 민족이 아닌가. 어릴 적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해 동서고금의 무수한 책들을 큰소리로 읽는 훈련이 생활화될 수 있었던 게 우리 가족문화였다. 활자화 된 문자언어는 음성언어로 나타나야 그 빛을 발휘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오감(五感)외에 서로의 감각이 어울려서 느껴지는 공감적 심상이 떠오른다.
책읽기는 행복을 꿈꾸는 이들의 가장 확실한 행복티켓이다. 읽는 이들을 행복의 도가니에 몰아넣고 어떤 뭉클거리는 덩어리로 행복을 집어 보게 만든다. 읽는다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도리어 사물의 올바른 모습을 볼 수 없게 돼 있다.
매스미디어가 자기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장치돼 있기에 그렇다. 우리들이 책읽기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삶의 영원한 진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읽는 이를 현명하게 해 준다. 우리를 격려하며 성장 시켜준다.
책의 숲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 아무도 가지 않아 가시덤불로 막힌 길도 있다. 덤불을 헤치면 아름다운 꽃이 난만(爛漫)하게 피고 진다. 맛난 열매도 있다. 책의 숲에서 맛있는 열매를 만나 한 입 베어 물고 향기에 취하는 가을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