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바람이 몹시 불었다. 창문 틈으로 스미는 바람 소리가 마치 소방차가 지나가는 듯 요란스럽다. 설깬 잠을 일으켜 문단속을 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아직은 어둠이 걷히기 전이지만 배꽃이 활짝 피어 제법 훤한 느낌이 든다. 요란스럽게 가지를 흔드는 미루나무 사이로 보이는 배꽃이 마치 흰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배꽃이 필 때면 가슴이 시리도록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배꽃이 활짝 핀 길을 자전거 뒤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던 중학시절의 선생님이시다. 학교에서 한 시간은 족히 걸어 등하교를 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로 야간자율학습이 끝날 무렵이면 담임선생님께서는 반 친구들 대충 보내고 밤길이 무섭다며 시간이 될 때마다 자전거에 태워 집까지 동행해 주셨다. 집으로 가는 길엔 저수지가 있었고 가끔씩 익사자를 저수지 둑방에 꺼내놓고 연고자가 나타날 때까지 하루 이틀 정도 가마니로 덮어 방치해 놓곤 하기도 했다.
아침 등굣길에 그 모습을 보고 와서 하루 종일 불안하고 무서웠다. 혹시 하교 시간까지 시체가 치워지지 않았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컸다. 그날도 야간자율을 끝내고 선생님이 오길 기다렸지만 오늘 따라 선생님이 오질 않으셨다. 한참을 서성거리다 할 수 없이 교문을 나섰다. 잔뜩 겁을 먹고 십여 분 정도 걷다보니 선생님께서 급하게 달려와 집 앞까지 바라다 주면서 선생님이 사정이 생겨 못 올 뻔했는데, 안 왔으면 큰일 날뻔 했다며 등을 도닥여 주셨다.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은 선생님과 함께 행복했다.
아버지처럼 자상하고 가끔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치기도 했던 선생님.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좋아 수업시간 전 예습을 해서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선생님 과목은 성적이 좋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2년이 지난 배꽃 필 무렵 선생님께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황당한 일이어서 선생님 영정 앞에서 통곡을 하던 일이 엊그제처럼 선명히 떠오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동안 선생님을 뵙지 못했고 선생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병문안을 가려고 정해놓은 날 운명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건강해 보이셨고 전혀 내색을 안 하셔서 지병이 있는 줄 몰랐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나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선생님이 멀리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정이 많고 따듯한 분이셨다. 지금도 선생님이 보고 싶을 때면 수학여행에서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보기도 한다. 선생님이 생존해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맛있는 것, 좋은 것, 세상사는 이야기 함께 나누며 좋은 멘토가 되셨을 것 같은 선생님이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립고 보고 싶다.
며칠 전 어느 프로에서 보니 교사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일부학생과 일부 교사의 문제겠지만 교권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선생님, 그래서 서둘러 학교를 떠나고 싶다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교사를 폭행하기도 하고 언어폭력을 일삼기도 하며 오히려 학생이 교사를 따돌려서 전근을 가게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이고 놀라운 일인가.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겨볼 때다. 배꽃 피는 아침 선생님의 올곧은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안견문학상 대상(시)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
/한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