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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 김복련道 무형문화재 승무·살풀이 예능 보유자

 

“내춤은 긴 장삼을 날리면서 주변인들의 한을 풀어주고, 사람들의 나쁜 액을 소생시켜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난 춤을 춘다”

오랜 법도로 갈고 닦아야만 나오는 단단한 무쇠같은 흐름과 호흡, 예리한 버선발의 사뿐함, 큰 의식을 거행하는 듯한 절제의 멋 등 기쁨과 슬픔이 한데 배어 있는 전통춤.

가락이 울리면 곱디고운 오방색 복장을 하고 스승의 스승을 거쳐 수대부터 내려온 춤사위가 펼쳐진다.

소멸위기에 놓여있던 기예인들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전통무용을 체계적으로 계승발전 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주인공은 지난 2002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살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송악 김복련(65·사진)씨.

김씨는 어릴적 서예를 하시는 할아버지를 통해 우리 것을 하나 둘 접하면서 학창시절 한국무용을 배우면서 춤사위를 익히게 됐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후 결혼생활을 시작한 그녀에게 뜻하지 않는 원인 모를 병이 찾아와 15년이라는 장기간동안 병치례를 치러야 했다.

“약에 취해 비몽사몽으로 누워있는데 갑자기 어릴적 춤을 추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춤을 추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녀는 44세라는 무엇인가 시작하기에는 늦은시기였지만 춤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수소문 한 끝에 지난 1985년 옥당 정경파 선생과 운학 이동안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김씨의 왼쪽 몸뚱아리가 마비가 되는 등 원인도 모르게 아팠던 몸이 점차 회복됐고, 장구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으면 세상이 내 것 같고 부러울 것이 없던 그녀였다.

 


김씨는 이때부터 승무. 살풀이 등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하루꼬박 15시간 동안 연습을 한 덕분에 전통무를 빠른 속도로 습득할 수 있었다.

“1986년도에 팔달산 대승원에서 처음 춤 공양을 할 때였는데 친구들이 춤을 추고 있던 나를 보며 죽을 것 같은 친구가 소생했다며 다같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김씨는 1991년 승무. 살풀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이수자로 지정됐고, 1995년에는 정경파 선생의 추천으로 전수조교롤 지정돼 후학교육에 매진했다.

그러다 그녀는 지난 2000년 천식으로 병을 앓고 있던 정경파 선생이 예기치 못하게 세상을 떠난 뒤인 지난 2002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살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후 김씨는 전경파 선생과 이동안 선생에게 배운 춤 수업내용과, 기법 등을 모아 김복련식 승무.살풀이 춤 체계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옛 예인들은 즉흥적으로 흥이나면 춤을 추고 구음으로 입장단을 맞추는 등의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체계적인 무용 기법을 전수하는데에 한계를 느꼈던 것이 계기가 됐다.

김씨의 연습실 한 가운데서 혼신을 다해 춤사위를 펴고 있는 제자들 중 특별한 이력을 소유하고 있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살풀이 춤 전수조교 신현숙(44)씨. 그녀는 김씨의 맏딸로 승무 살풀이 춤의 계승보전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는 젊은 춤꾼이자 김씨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김씨는 “딸은 학창시절부터 가야금과 무용을 배워 오다 느닷없이 공대를 전공해 공부에 매진했다”며 “하지만 혼자서 전통무용 공연을 준비하려니 힘에 부쳐 딸에게 도움을 청해 가끔 일을 도와주던 것이 계기가 됐다” 김씨의 딸 신씨는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스물일곱이라는 무용하기에 늦은 나이에 무용과에 재입학해 춤을 전공했다.

이후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박사학위를 준비중에 있다.

김씨는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전문 예인들의 단체이면서 우리 민속춤의 산실로 평가되고 있는 ‘화성재인청’을 보존하기 위해 지난 2003년 (사)화성재인청보존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김씨는 “재인청 운영시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커 공연 한번 치루고 나면 생활에 어려움있지만 춤은 내 삶이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춤을 춘다”고 말했다.

김씨는 조선 시대 경기예인들의 본산인 화성재인청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각분야 경기도무형문화재의 공동 발전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 세계를 무대로 나설 계획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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