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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상업예술? 영화산업이 예술성보다 상업성에 치우쳐서 그렇지 맞는 말이다. 대규모 기업자본이 참여하면서는 영화 상영 구조가 기형적으로 더욱 변질됐다. CGV, 메가박스 등 대형 영화관들이 예술·실험·독립 영화 등 비상업영화보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영화 위주로 패턴을 바꾼 것이다. 영화적 실험과 다양성이 사라지고 블록버스터가 판치는 요인이다.

영화 마니아들에게는 불만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영화를 접할 권리와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겨난 모임이 ‘영사기(영화사랑세상읽기)’.

시조시인인 정수자(56·여) 영사기 회장을 영화 상영 장소가 있는 수원화성박물관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났다. 영화사랑에 푹 빠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수원은 인구 110만을 넘어선 전국 최대의 기초자치단체예요. 하지만 아직까지 예술영화전용관이 없어요. 우리들의 ‘영사기’는 독립영화, 예술영화, 비주얼영화 등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낮은 톤으로 취지를 설명하는 정수자 회장의 얼굴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영사기는 2011년 한 예술인 모임에 비롯됐다. 정 회장은 그곳에서 이달호 화성박물관 관장과 오점균 영화감독을 만났다.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들을 찾아 감상하는 등 영화 매력에 빠져있던 정 회장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영화 모임을 제안했다. 이후 이들의 소통에는 막힘이 없었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영화 상영 장소를 화성박물관으로 결정하자 모임 결성은 급물살을 탔다.

이름 짓기도 마찬가지다. 모임에서 이름을 놓고 고민하던 중 오 감독이 ‘영사기’라는 의견을 냈다. 지금은 영화 마니아들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관련 소품인 ‘영사기’의 이중적 의미로, ‘영화사랑세상읽기’의 줄임말이다. ‘영사기’는 그렇게 태동했다.

이들은 실험·독립 영화와 같이 영화관이나 TV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영화들을 보기 위해 뜻을 모았고, 1년여의 활동 끝에 현재 회원은 300여명으로 늘어났다.

2011년 5월, 첫 상영작이 결정됐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화제작이 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태국 영화 ‘엉클 분미’다. 이후 영사기 회원들이 본 영화는 미국의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인도의 ‘세 얼간이’, 프랑스의 ‘잠수종과 나비’ 등 모두 25편에 이른다.

이처럼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영화 외에도 쿠르드족(터키·이라크·이란 등에 거주하는 민족)을 내용으로 하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여성 할례의 비위생성 및 여성 차별을 고발한 ‘데저트 플라워’ 등 작품성이 높거나 문제의식을 다룬 영화들도 상영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닌 탓에 영화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영사기’는 주로 회원들이 가지고 있는 영화나 구입한 DVD를 이용한다.

‘영사기’의 매력은 또 있다. 회원들 간에 감상한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참여한 50~60명의 회원이 서로 자신의 시각에서 본 영화에 대해 토론하며 ‘자기 식의 영화 읽기’의 재미를 더한다. 여기에 오점균 영화감독이 즉석에서 하는 평론은 덤이다.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닥터 지바고’가 끝나고 화성박물관을 막 나서자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어 회원들이 다 함께 영화 속 음악을 부르며 즐거워했던 일, 이란의 어린이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보기 위해 일가족 3대가 함께 영사기 극장을 찾은 일 등 그의 기억 속에는 그때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동안 ‘영사기’ 운영이 녹록했던 것만은 아니다. 초창기만 해도 대관료 없이 박물관의 영상교육실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박물관 방침이 바뀌면서 대관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닥쳤다.

궁즉통(窮卽通)이라 했던가. 이후 회원들의 노력과 박물관의 배려로 영화 상영은 매달 셋째 주 금요일마다 진행되는 박물관의 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후원금과 지원금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영사기’로서는 무거운 짐을 하나 던 셈이다.

 

 

 

영화전용공간 마련에 대한 수원시의 전무한 지원과 영화 관객들의 관심 저하로 이어지자 커피 잔을 내려놓는 그의 표정이 무겁다.

“우리나라에는 부산, 서울, 대구, 인천 등 몇몇 지역에 영화전용관이 마련돼 있는데 인천의 ‘영화공간 주안’은 남구의 지원을 받아 독립영화를 상영할 뿐 아니라 시설도 수준급”이라고 부러움을 드러낸 그는 이어 “상업 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대형 극장들만 탓할 게 아니라 비상업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이 더 안타깝다”는 속내도 밝힌다.

정 회장의 영화사랑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시장 개방과 영상매체의 다변화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다양한 영화를 접하기 시작했던 그는 ‘영화를 위한 공간과 분위기를 마련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단다.

상업성과 대중성을 위해 영화 제작사나 작가 등으로부터 수정을 거치는 일반 영화와 달리 시장의 힘에 덜 좌지우지되는 영화, 다른 영화들에 비해 감독이 원하는 방향으로 제작되는 영화, 그것이 바로 정 회장이 생각하는 비상업영화의 매력이다.

그런 그에게 ‘영사기’는 더 많은 사람들과 지금 이곳에서 함께 즐기는 모임일 뿐만 아니라 오롯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우리가 가보지 못하고, 해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또 그 안에 담겨 있는 열정과 사랑 등이 제가 시를 짓는 일에 자극을 주기도 하죠.” 그의 영화 예찬론이다.



영화의 매력을 한참 이야기하던 정 회장은 “언젠가 시민들이 다함께 즐기는 조그만 영화제를 해보고 싶다”며 “수원시에서 예전 중앙극장으로 이용했던 공간을 활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영화 상영에 있어서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지원을 해줬으면 한다”고 영화전용관 마련을 위한 자신의 생각을 꺼낸다.

‘영사기’가 시의 지원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는 기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세 개의 상영관을 운영하고 싶다”면서 “두 개는 예술·독립 영화나 추억의 영화 등을 상영하는 일반 상영관, 나머지 한 개는 마땅히 갈 곳 없는 노년층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실버 상영관으로 운영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예술·실험·독립 영화 등을 통해 보다 더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정 회장의 생각처럼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뿐만 아니라 비상업영화에도 관심을 가져 좀 더 다양한 영화를 함께 즐기는 그런 환경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사진 │ 최영호 기자 yhpress@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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