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故 윤동주 시인의 ‘서시’ 초문이다. 몇십년 전에 쓰인 시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감탄사가 절로 나오면서도 동시에 많은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청렴이라고 함은 사전적 의미로는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이라는 것이지만, 사실 이 정도 문구로 청렴에 관하여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흔히들 ‘사랑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 이에 대한 대답도 제각각이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대답도 있고, 결혼이 사랑이라는 대답 등 많은 답변이 있지만 아무도 모범답안을 내놓지 못한다. 청렴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정의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다. 마치 마음의 정표와도 같은 것이다. 청렴은 근래에 등장한 신조어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근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관직이라는 것이 등장, 국가라는 관념이 잡히고 체계화되면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개념으로 유추할 뿐이다. 즉, 청렴이라 함은 관직이라는 것과 떼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좌의정 맹사성이 고향인 온양으로 어른들을 뵈러 내려온다는 소식이 양성 현감과 진위 현감의 귀에 들어갔다. 한양에서 온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천 장호원을 거쳐야 하는데 소식을 들은 두 고을 원은 점수를 따기 위해 맹사성이 내려오는 길을 마중하기로 하고 기다렸다. 두 현감은 하인을 잔뜩 풀어 길을 청소하고, 포졸을 시켜 그 길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 길을 지나간 것은, 화려한 정승의 행차가 아닌, 오직 소를 끄는 허름한 차림의 노인뿐이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재상인 그가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했던 수많은 일화 중 하나다. 이처럼 과거에도 지금만큼,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욱더 청렴이라는 단어에 관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실행해 왔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청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직자가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지켜야할 덕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흔히들 ‘뇌물’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절대왕정국가가 아닌 자유경제주의 국가인 만큼 가장 민감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본인 역시도 이러한 답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인이 생각하는 청렴이라 함은 공직자 위치에서 자신이 담당하는 일에 대하여 열과 성을 다하였고,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음을 청렴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역시도 결국 필자 단 한명의 생각일 뿐 어떠한 기준점이 될 수는 없으며 결국 청렴이란 자기 자신만의 기준점을 정해두고, 그 기준과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가장 가까운 의미의 청렴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청렴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공직자는 왜 항상 얽매어 있고,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생각건대, 청렴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상당히 무거운 단어로서, 공직의 시작과 끝이자 공직의 전부이며, 공직자의 심장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직자는 청렴에 얽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청렴 그 자체인 것으로, 바로 공직자의 또 다른 이름은, ‘청렴(淸廉)’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