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의 옛말은 ‘타락(駝酪)’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우유제품을 통틀어 타락이라 불렀다. 본래 타락은 돌궐어(突厥語)의 ‘토라크’에서 나온 말이다. 말린 우유라는 뜻이다. 이런 타락에 불린 쌀을 곱게 갈아 넣고 끓인 것이 조선시대 궁중의 대표 보양식 ‘타락죽(駝酪粥)’이다.
내의원은 타락죽을 만들기 위해 암소의 젖을 짜 말린 뒤 죽을 쑤어 왕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죽(粥)을 왕의 음식을 담당하는 소주방에서 쑤지 않고 내의원에서 맡은 것은 귀한 보양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엔 인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신하들이 우유로 만든 타락죽을 영양식으로 권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조의 경우도 겨울철이면 늘 우유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내의원에서는 70세 전후의 나이 많은 관료들을 초청, 음식을 대접하던 조선시대 기로소(耆老所)의 대표 메뉴로 타락죽을 권장할 정도로 원기회복 음식 중 으뜸으로 쳤다.
우유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4세기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귀했던 만큼 나라에서 관리했다. 먹는 사람들도 왕이나 귀족 등 특수계층에 한하였고, 식품으로 보다는 보양의 효과를 기대하는 치료식으로 이용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먹지 못했다. 고려시대엔 우유의 출납만을 담당하는 우유소(牛乳所)가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타락색(駝酪色)으로 바뀌었다. 서울 동대문 근처에 위치해 있던 낙산(酪山)목장이 그곳으로, 왕실에 우유보급을 책임졌다.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시중에 우유가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낙농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생산되는 우유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은, 65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낙농 선진국 독일을 방문한 지리에서 당시 뤼브케 대통령에게 했다는 ‘우리 국민도 우유 한번 마음껏 마셨으면 좋겠다’고 한 탄식에도 잘 배어있다.
최근 이런 우유와 말린 분유가 넘쳐나 재고만도 4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때문에 원유값 하락으로 낙농가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국내 소비 감소가 제일 큰 원인이라고 한다.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난다. /정준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