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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으로 그려낸 소설, 상상력을 일깨워준다

공항 표지판·화장실 안내판·이정표 등 2500여개 기호
누구도 똑같이 읽을 수 없어 … 독자만의 작품 재탄생
읽는 책도 아니요, 보는 책도 아니다, 해석하는 책이다

 

미스터 블랙은 길을 걷다 서점을 발견했고, 최고의 선물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서점에 들어가, 어느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 어떤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글자가 없는 흥미로운 소설이 나왔다.

문맹자도 읽을 수 있도록 세계 공통어를 염두에 두고 만든 ‘지서’는 본문 텍스트에 글자가 전혀 없다.

흔히 말하는 아이콘, 이모티콘, 로고, 안내표지, 그림문자, 픽토그램(pictogram), 그래픽 심벌 등 언어를 초월해서 직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된 기호들만 쓰였다.

저자가 7년간 직접 전 세계를 돌며 껌딱지부터 시작해 공항 표지판, 화장실 안내판, 이정표, 온라인 이모티콘, 국제표준화기구의 상징물 등 2천500여 개의 보편적인 기호들을 수집해 지었다.

인위적으로 창작한 기호는 하나도 없다. 의미하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해 사전에 교육을 받지 않고도 모든 사람이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호들은 단순하고도 의미가 명료하다.

단순한 기호로 지은 책답게 아무나 읽을 수 있지만 누구도 똑같이 읽을 수 없다. 해석의 방법이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 언어로 읽어야 이 책의 재미가 불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마다, 독서할 때마다 새로운 독자만의 작품이 재탄생된다.

설치미술가이자 서예가인 ‘쉬빙’은 차이나 아방가르드 1세대로 분류된다. 그는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작업을 하며 서예와 탁본에 기초한 대규모 설치작품으로 문화와 소통의 문제를 말한다. 그의 작품 주제는 언어를 통한 소통에 문제를 제기하고 문자와 그 뜻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있다.

그가 1991년에 발표한 ‘천서(天書, Book from the Sky)’에서 그는 영어 알파벳을 한자의 상형문자로 그려내 전혀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 문자가 해당 문화권에서만 보편적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21세기 문자예술의 신기원을 이룬 작품으로 꼽힌다.

책 형태로 소개되는 이번 작품은 천서의 반대 개념인 ‘지서(地書, Book from the ground : from point to point)’이다. 천서가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언어를 만든 것이었다면, 지서는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언어를 수집한 것이다.

쉬빙은 전 세계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는 기호들을 가지고 개인의 일상을 코드화한다.

책은 평범한 직장인 Mr. Black이 어느 날 오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묘사한 120쪽짜리 소설이다.

Mr. Black은 어떤(라코스테, 아디다스, 나이키) 신발을 신을지 고르고, 점심으로 뭘(맥도날드, 스테이크, 국수, 스시) 먹을지 정한다. 그는 직장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는 긴장한 이모티콘이 흘리는 땀방울의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 남자의 하루 24시간을 그리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존재하는 언어의 문학적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쉬빙의 ‘지서’는 단순화한 기호와 상징들로 언어와 역사를 뛰어넘어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지서를 통해 나는 모든 인간들이 어려움 없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는 꿈을 추구했다. 이것은 실현하기에는 너무 큰 종류의 문제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시도했다는 점이다”라고 밝혔다.

/민경화기자 m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