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서면 사방이 초록으로 가득하다. 비를 맞으며 걷는 길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장미가 화려함을 자랑하는 곁에 쥐똥나무가 좁쌀만 한 꽃을 달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개나리와 벚꽃이 조팝꽃과 함께 피었다. 꽃도 차례를 지키며 피고 지며 봄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할미꽃이 백발이 되어서야 구부리고 살던 허리를 피고 일어섰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모내기를 마친 논배미로 흩어지고 붓꽃은 하늘을 우러를 뿐 못 다한 말을 삼키며 여름의 길목을 지켰다.
지금에 와서 지나간 시절을 돌이킬 수는 없다 해도 계절조차 질서를 잃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방법으로든 대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예감과 맞닥뜨리게 한다.
아침 운동을 끝내고 가까이 지내는 몇몇 사람들과 빗소리를 들으며 부추전에 커피를 마시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하루의 출발은 행복 예감으로 가득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을 보려고 가게를 쉬기로 하고 제일 먼저 면사무소를 갔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민원인들이 있어 뒷줄에서 기다리면서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차례가 되어 주민등록등본을 발급을 신청했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온 사람은 여러 가지 서류를 발급받으려는지 한참을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먼저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우선 그 사람도 바쁠 수도 있고 담당 공무원이 사태를 파악해서 양해를 구하고 원활하게 처리하기를 바랐으나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고 내 기대를 살피기에는 역부족이었던지 포기하고 뒤에서 연달아 시계를 보며 기다렸다. 일을 처리하는 과정도 그랬고 내 앞의 민원인도 그렇고 무언가 소통이 안 되는지 서명과 본인확인 지문인식을 몇 번을 반복하기도 하며 애를 먹였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은 좀 과장이다 싶었지만 내 차례가 되자 이번에는 복사용지가 떨어졌다. 비록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과 동행하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나는 우산을 받고 빗길을 달려야 했다.
보건소에 도착해서도 평소에는 별로 기다리는 일이 없었지만 오늘따라 대기자가 있었다. 점심시간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오전 중에 일을 마칠 계획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찌감치 마음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창구에 접수증과 남편의 신분증을 제출하니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런 내용을 고지하지 않았음을 따져 묻고 배우자가 대리 수령하겠다며 내 신분증도 제출했으나 규정이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다. 그리고 관공서 출입하며 신분증도 지참하지 않은데 대한 비아냥이 덧붙여진다.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창구가 비는 것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규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과 민원인들을 위해 창구에 규정을 부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결국은 목소리를 높여가며 서류를 받아냈다. 처음부터 상세하게 설명을 하거나 신청서에 규정을 명기하고 창구에도 보기 쉬운 위치에 붙여 놓으면 이런 일로 감정을 상하는 일도 없을 터인데 아직도 행정편의는 주민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불쾌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봄비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행복했던 아침을 떠올려봐, 잠시 불쾌함으로 남은 시간까지 구겨버리기엔 모처럼의 휴일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