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으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하는 섬답게 영국의 낭만주의 회화는 독창적인 흐름을 탔다. 이웃나라들에서는 바로크 회화가 절정을 이루고 있는 와중에도 걸출한 예술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상류층의 초상화 수요조차 외국의 유명 화가들에게 의존해 해결해야 했을 만큼 회화사에서 뒤쳐져 있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한 세기를 뛰어넘어 근대예술을 예언했던 독특한 화풍의 예술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블레이크, 터너, 콘스터블 사이에는 공통점이라 할 만한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만큼 세 사람의 개성은 매우 달랐다.
물론 그 사이 영국에서도 유럽 최강 열강의 위상에 걸맞는 예술적 성과를 이루기 위하여 재정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왕립아카데미를 기반으로 인기있는 회화 작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느 나라에서들과 마찬가지로 낭만주의 회화 작가들에게 아카데미란 넘어서야 할 한계이자 적대시되어야 할 무엇이었다. 영국 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의미있는 방식이 만개했었던 시절을 꼽으라면 단연 낭만주의 회화를 주목해야 하고, 그 시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기만의 표현방식을 창조했던 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화가이자 시인이었고,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사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의 회화작품은 당시에도 매우 생소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1794년에 완성한 ‘태고적부터 계신 이’에서는 새카만 창공 위에 떠 있는 이가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앉은 자세에서 상체를 숙이며 아래쪽으로 손을 뻗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태양빛과 같이 강렬한 빛이 발산되고 있고, 아래로 뻗은 손에서도 두 줄기 강렬한 빛이 나오고 있다. 블레이크는 깊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고, 시와 그림을 통해 종교적 신념과 환상을 그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삽화에나 등장할 것만 같은 블레이크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책의 삽화로나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블레이크의 독창성은 인정을 받았다. 블레이크의 표현방식은 그 어느 시대의 양식에도 속해있지 않은 블레이크 자신의 것이었고, 그 점은 근대에 이르러 후대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얻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회화는 낭만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낭만주의가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조이기에 다른 나라에서도 문학작품과 성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게다가 영국에서는 회화분야에 앞서 문학 분야에서 낭만주의 경향이 일관되면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인들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많은 것들이 기계화되어가고 있는 시기에 반항심을 느꼈고 인간은 자연의 감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블레이크보다 18년 늦게 출생했던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젊은 시절 왕립아카데미의 스타로 급부상했던 인물이었다. 블레이크도 왕립아카데미에서 회화 공부를 했었지만 잠깐 그랬던 것뿐이었다. 터너는 매우 어린 나이에 왕립아카데미에 입학을 했고 일생동안 명망 있는 후원자들을 곁에 두었으며, 왕립아카데미의 최고 실력자를 스승으로 둘 수 있었다. 젊었을 때 터너는 대중들이 무엇에 열광할지 재빨리 알아채는 영민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재력가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사는 집과 정원, 풍경을 그렸다.
하지만 터너는 진정한 자신만의 예술관을 아카데미 밖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 수채화가 유화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수채화 연구에 열중했고 급진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습작했으며, 스승들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실험들에 도전했다.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었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이에 대해 깊이 고뇌했었고 이를 드라마틱하게 화면에 담았다. 터너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짙은 안개와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그리고 그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선척들을 그린 것이었는데, 대기의 소용들이에 대한 표현을 들어 그의 작품들은 근대 평면회화에 대한 예고였다고 논해지기도 한다. 이즈음 그는 회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을 굳혔다. 한때 터너의 작품에 열광했던 대중들은 중년의 그의 작품을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었고, 어느 독설적인 평론가는 그의 작품을 보고 회반죽 덩어리 같다는 표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