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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매너리즘의 역설

 

더 이상 미술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의 미술가들만이 하고 있는 고민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이 같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다. 이들을 깊은 좌절감에 빠뜨린 이들을 추궁하자면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로 추려질 수 있겠다. 르네상스의 정점을 찍었던 세 명의 천재로 인해 후배 예술가들은 그 이상 미술가로서 무엇을 어떻게 더 해낼 수가 있느냐며 깊은 허무감에 빠져들곤 했다. 그들 중 일부는 미켈란젤로의 인체를 습작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배경과 주제 속에 그와 같은 인체를 반복해 그려 넣곤 했다. 당대 평론가들은 요새 젊은 예술가들은 깊이가 결여된 채 미켈란젤로의 수법(manner)만을 따라한다며 혀를 차곤 했다. 매너리즘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정확히 라파엘로가 사망한 그해 1520년은 미술사에서 매너리즘이 시작된 시기로 매겨져 있다.

물론 모든 예술가가 좌절감과 허무감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나 그러했든, 르네상스 후기에도 예술의 위기를 뚫고 나온 진취적인 예술가들이 있었다. 간혹 이들의 작품과 업적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혁신적이어서 현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안타깝게도 라파엘로의 사후에 활동한 이들이었기에, 그리고 한동안 이들 작품에 대한 평가가 썩 좋지만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이들을 일컬어 ‘매너리즘 예술가’라고 명명하고 있다. 전혀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예술가들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틴토레토의 캔버스에는 기괴스러움이 충만했다. 그는 신화나 성경의 한 장면을 공포영화 혹은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하곤 했다. 화면의 구성은 극적이고 역동적이었으며, 명암대비는 불길할 정도로 극명했고, 강렬한 빛에 민낯을 드러낸 인물은 창백했다.

스페인에 정착해 활동했던 엘 그레코의 작품들은 이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번개처럼 섬광이 번뜩이고 있고 인물들은 연기처럼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뭉크의 작품과 비견될 정도로 생생한 표현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어떻게 16세기에 이와 같은 표현이 가능했었는지 후대인들은 의아해 하곤 했다.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은 라파엘로의 작품에 보다 가까웠다. ‘긴 목의 마돈나’에서는 유난히 목이 길고 손가락도 긴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신체를 변형시켜 표현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들 매너리즘 화가들은 회화의 완결성에 저항했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일부로 조화와 균형을 깨뜨렸으며,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올라 개인의 표현력을 중요시했다. 시대적으로도 완전무결함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가 어려웠다.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교황권을 위협하는 군주가 유럽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심지어 이탈리아 영토는 자주 침략당했다. (매너리즘 미술가들 중에서는 새로운 권력에 편승했던 궁정화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장식적이고 섬세한 표현으로 유럽 곳곳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때 과학적인 발견과 학문의 발달은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발견에 이를 즈음, 사람들은 발견에는 끝이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발 내딛고 있던 세계가 가늠하기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자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멜랑콜리한 정서가 맴돌았다.

하지만 매력적인 시대였다. 절대적인 권력과 법칙이 가시고 난 뒤,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진 예술혼들은 마구 꿈틀거렸다. 흥미로운 점은 매너리즘이라는 부정적 언어를 있게 한 장본인인 미켈란젤로가 바로 매너리즘의 창시자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범한 인물을 다시 한 번 더 언급해야 한다. 말년에 그가 직접 지은 시에는 후원자들의 요구에 시달려왔던 인생을 한탄하는 표현이 등장하곤 한다. 경제적으로 충분히 독립적이 된 이후에 미켈란젤로는 후원자의 요구 없이도 자기만의 작품에 몰두하며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곤 했다. 1564년작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예수와 성모의 윤곽은 녹아내리고 있다. 그는 일찍이 청년시절에서부터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있던 예술가였고, 작가가 손을 대기 이전에도 돌덩어리 속에는 어떠한 형태가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절정을 지나 매너리즘에 다다르면 한층 자유로워진 그를 만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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