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꼴을 베다가
/정원도
말꼴을 베다가 내 발등 내가 찍어 일로
뽑히지 않는 낫을 부여잡고 까무라치던 대낮
들녘 나가던 동네 아재의 손에
피 묻은 낫이 빠지고 벌어진 살 틈으로
어머니 풍년초 살담배를 털어 넣자
또 기절했다
언제쯤 다시 깨어났을까?
해거름 노을이 벌겋게 거품을 문 채
빛바랜 장독간 뒤로 저물고 있었고
말은 그런 피묻는 꼴 맛을 알기나 했을까?
내가 얼어붙은 연못에 빠져
영문도 모른 채 죽을 뻔 했던 이 후
마부 아버지와 그 말의 싱싱한 울음을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 정원도 시집 ‘마부’ / 실천문학사· 2017
모든 시(詩)에 동원된 시어(詩語)들은 상징과 실제가 중첩되어 있다. 정원도 시인의 제3시집 ‘마부’는 마치 영화 ‘마부’처럼 가축을 매개로 사는 가난한 민초의 삶을 한 씬 한 씬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시인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같지만, 이 안에는 한국 민중들의 삶을 꿰뚫고 지나가는 서사(敍事)였다. 이 시집은 마부의 아들, 유아시절 생모를 여의고 생모보다 더 사랑스러운 새어머니의 등장,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등 개인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시집의 배경에는 1950~70년대를 관통하는 가난한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가 그대로 드리워져 있고, 마치 유배지 같은 경상도 어느 시골 가난의 단애(斷崖)아래서 절망을 노래했던 마부의 아들이 또 다른 말(言)을 다루는 마부의 탄생을 예고했다. 자기가 사는 가정은 자신의 우주였으리라. 우주를 지탱해준 아버지와 말, 어머니와 말, 그리고 자신과 말 사이, 피 묻은 말의 꼴을 통해 시인과 함께 ‘마부의 시(詩)’는 자라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난의 그늘에서 시(詩)로 자라는 처연한 꽃들에게, 그리고 생명들에게 시인은 말(言)을 통해 뜨거운 생기의 입김을 불어주고 있다. 마치 소년기에 베인 손으로 말의 등을 어루만지고 눈을 맞추었을 그 때 그 말(馬)의 입김처럼. /김윤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