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제도, 경찰, 프로파일링, 전쟁, 혁명, 인종, 노예제, 대중문화, 정신분석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간 관련 자료를 수집, 연구, 비판한 수전 브라운밀러의 고전이 완역 출간됐다.
저널리스트이자 활동가로 집필을 시작한 저자는 1971년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 강간 말하기 대회’와 ‘강간 학술 대회’를 주최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증언을 접한 뒤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강간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를 역사화한다.
강간에 대한 기본 전제들을 의심한다는 것은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남성-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여성이라는 해묵은 구도 자체를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유구한 관념은 여성을 남성이 소유한 재산 즉 사물로 보는 관점과 맥을 같이 하며, 결혼이라는 부부 관계 계약의 초기 형태 역시 여기서 비롯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타고난 신체적 구조(삽입당할 수 있는 구조)로 언제든 남성에게 강간당할 수 있다는 공포야말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게 만든 최초의 원인이라고 본다.
강간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여성이 어떻게 의존적 존재가 됐고, 보호를 대가로 한 짝짓기에 의해 가축화됐는지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강제로 납치해서 강간하는 행위가 제도화된 것이 곧 결혼이었으며, 남성들 간에는 여성을 약탈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곤 했다.
그렇게 해서 여성은 남성에게 최초의 영구적 취득물이자 첫 번째 부동산이 됐다.
소유권 개념을 비롯해 사유재산 개념 역시 이 초기의 ‘여성 종속’에 기원을 두고 있다. 남성이 강제로 자신의 영역에 배우자를 귀속시키고 후에 자손까지 귀속시킨 것이 소유권 개념의 시초이다.
계급 억압 이론을 발전시키고 ‘착취’ 같은 단어를 이끌어낸 마르크스 같은 대가조차 경제구조에 내재된 강간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런 관념은 사회적으로 ‘강간 문화’라는 위험한 토양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강간을 각종 선전선동에 활용하는 행태, 여성의 신체를 한낱 쾌락거리로 소비할 권리가 남성들에게 충분히 있고, 그것이 시민의 마땅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리버럴한 신념, 강간당한 여성에게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냐며 따져 묻는 제도와 행정 절차, 문란하게 행동해서 당했다며 피해자의 과거 성 편력까지 들추려는 사법 시스템, 무엇보다도 여성 스스로가 주의해야 한다며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적 담론,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게 돕는 교육의 부재, 아름다운 피해자에게만 집중하는 언론 등 이 모든 것이 철저히 남성권력이 주도하는 강간 문화에 불을 지피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수전 브라운밀러가 연구를 시작한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서관에는 ‘강간’이라고 분류된 색인조차 없었고, 체계적인 자료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었음에도 집요한 끈기와 열정 끝에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완성했다.
저자는 신문 기사와 잡지, 사료, 재판 기록, 증언록, 자서전, 수기, 문학, 대중문화 텍스트와 같은 방대한 자료들을 풍부하게 녹여냈을 뿐 아니라 이런 자료들을 날카로운 풍자와 냉소, 위트를 겸비한 특유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민경화기자 m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