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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어느 노파의 일기

 

 

 

내 나이 어언 백 스물둘이다. 오늘 일흔두 살인 내 손자가 죽었다. 그가 누구인가. 천금 같은 내 손자. 그가 내 무릎 위에서 재롱을 떨고, 내 등에 업혀서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이제 그는 하늘나라로 갔다. 슬프다. 슬픔이 앞을 가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모진 놈. 무정한 내 손자 놈. 이 할미를 홀로 두고 하늘나라로 간 내 손자가 너무너무 그립다. 내 품에 안겨 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머리에 백발이 와서 앉았다.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온전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몹쓸 당뇨병까지 덮쳤다. 내 손자는 늘 이 할미 앞에서 병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약 먹으면 낫는다”고 했지만, 비싼 약값을 치를 돈이 없었다. 돈 없는 신세라니. 나도 그를 도울 만큼 부유하지가 않다. 그 위에 나는 그가 죽을 만큼 가난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현대의학이 어떠한가? 당뇨병 정도는 병도 아니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 먹고 주사 맞으면 백 스무 살까지 능히 살 수 있다. 그러나 내 손자는 현대의술을 거부했다. 그렇게 해서까지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들은 걸핏하면 장기를 바꾼다. 심장도 갈아 끼우고 위장도 인공위장으로 대체한다. 어디 그뿐인가. 치매가 걸리면 뇌에도 칩을 끼워 젊은이처럼 기억하고 생활하는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내 손자는 그걸 거부했다. 로봇인간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게 무슨 삶의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끝내 병원 침대 위에서 안락사를 선택했다. 백 스물둘이나 된 이 할미를 버리고, 독하고 모진 내 손자는 북망산천 길을 택했다. 이제 나는 어이 살꼬! 홀로 된 나는 어이 살꼬!

나도 성한 몸이 아니다. 인플란트로 갈아 끼운 이빨도 들뜨고 아프다. 안구를 갈아 끼웠지만, 눈이 시리고 눈물이 줄줄 흐른다. 내 보청기에서는 끊임없이 이상한 소음들이 들린다. 바람 소리 같고, 때로는 매미 소리 같은 소음들이 끊어지지 않는다. 병원을 찾으면 아마 그들은 다시 내 장기를 바꿀 것을 권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돈이 없다. 이제 내가 의지할 데라곤 아무 곳도 없다. 국가가 나를 보호한다지만 매달 삼십만 원 남짓한 기초연금뿐이다. 그 돈으론 먹고 살기도 힘들다. 인공관절이 고장 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갈아 끼운 이빨도 유효기간이 지났는지 제대로 씹을 수가 없다. 어디 한 곳 성한 데가 없다.

오직 나의 수족이 되어 주었던 내 손자마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이제 내가 갈 데라곤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 요양원밖에 없다. 나는 이제 그곳에 갇혀 사육당하는 짐승처럼 먹이를 얻어먹으며 연명할 것이다. 내가 아프면 그들은 내 장기를 인공장기로 갈아 끼우는 실험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무섭고 두렵다. 이 시대는 진시황도 못 이룬 무병장수의 꿈을 이뤘다지만 이것이 과연 보람 있는 인간의 삶인가?

적막강산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 두고 일흔두 살, 내 손자는 저승길로 떠났다. 그래서 더더욱 손자의 죽음이 애달프고도 슬프다. 슬픔을 뛰어넘어 절벽 같은 상실감과 허무함이 나를 막아서고 있다. 나 역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러니 이놈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 두렵고도 무서운 이 세상에 나만 홀로 남겨 두고 오늘 저세상으로 떠나간 내 손자야. 이제 이 할미는 어이 살꼬, 어이 살꼬!